• ‘기륭성호’가 보고 싶다
    차광호의 굴뚝일기(2) 민주노조 지킨 동지에게 뇌경색이...
        2014년 06월 24일 03:3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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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광호의 굴뚝일기-1 링크

    지난 밤에는 천둥 번개를 동반한 장대비가 내렸다. 며칠 동안 폭우가 쏟아졌다. 천막 쪼가리를 쳐놓았지만 비가 계속 들이친다. “조금 있으면 태풍도 올 텐데 이 정도 불편쯤이야” 하며 버틴다. 맑은 날 땅에서는 바람이 없어도 45m 굴뚝엔 강풍이 분다.

    굴뚝은 그렇다 치더라도 공장 정문에서 투쟁하는 동료들이 걱정이다. 스타케미칼 해고자는 12명이 남았다. 다들 먹고 살기 어렵지만 청춘을 바친 공장과 기계를 하루 아침에 팔아버리겠다는 회사에 맞서 무릎 꿇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싸우고 있는 동지들이다. 일부는 전국을 순회하며 연대를 하고 우리 상황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같이하지 못하는 동료가 있다. 그의 이름은 박성호다. 그를 처음 만난 건 18년 전인 1996년 4월이었다. 박성호는 한국합섬 파업 현장에서 문화체육부장으로 율동패와 1공장 조합원들을 조직하는 열의에 다하고 있었다.

    굴뚝 농성

    1996년 처음 만난 박성호

    1996년 파업은 전체 조합원들이 준비가 미흡한 상황에서 시작됐다. 2공장 기숙사에서 쉬고 있는 조합원들을 모아 1공장에 모여 옥쇄파업을 벌였다. 며칠 지나지 않아 2공장이 가동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노심초사한 간부들은 2공장 가동을 멈추기로 결의하고 간부 6명이 시너를 들고 2공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2공장 진입 과정에서 2명의 몸에 불이 붙는 참극이 벌어졌다. 구미 순천향병원에서 경찰과 몇 시간을 쇠파이프로 대치했다. 경찰의 감시를 뚫고 서울 한강성심병원으로 후송했다.

    서울에 도착하니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우리 투쟁에 결합했다. 하지만 이미 흐트러진 조직은 100여명 남짓 남았다. 다행히 김영삼 정권이 노동법 개악을 앞둔 상황에서 정치적 압력으로 38일간의 전면파업은 끝이 났다. 준비되지 않은 파업은 너무나 많은 상처를 남겼다. 노동조합이란 틀이 남아 있는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노동조합은 반(半) 어용의 길을 걸었다. 그 때 박성호는 노조 교육부장을 맡아 간부들부터 교육을 해가기 시작했다. 공장 안에서 교육을 할 수가 없어 구미지역협의회가 있는 건물 한 칸을 빌려서 회사 몰래 교육을 했다.

    어렵게 조합 활동을 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노조위원장이 직권조인을 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1, 2공장 상집 간부 전체가 조합원들이 보는 가운데 삭발을 하며 직권조인이 무효임을 선언했다. 새로운 민주 위원장을 선출하고, 그 해 임금과 단체협상을 마무리했다.

    준비 안 된 파업과 직권조인, 다시 민주노조

    회의에 가면 사람들은 박성호를 교육부장이라 부르지 않고 ‘개코’라고 불렀다. 조합원들의 모임이나 행사가 있으면 어떻게든 알고 찾아온다고, 냄새를 잘 맡는다고 붙여진 별명이었다. 산을 좋아했던 개코는 3교대 야간 노동을 마치고 산에 갔다가 출근할 정도였다. 백두대간 종주를 계획하고 절반 정도 다니기도 했다.

    2003년에는 노조 사무장을 맡아 화섬업계 처음으로 4조 3교대를 일주일 파업을 통해 쟁취했다. 이 때가 한국합섬 조직력이 가장 강력했고, 90% 이상의 조합원이 파업에 참여해 민주노조의 꽃을 피운 시기다.

    한국합섬 800여명 조합원은 일 년에 2번 40명이 퇴직금 중간 정산을 한다. 단체협약에 따라 순번이 결정되는데 개코가 받아야 할 순번인데 사정이 딱한 조합원에게 양보한다. 어찌 조직이 되지 않겠는가?

    기술개발을 통한 경쟁력 강화는 외면하고 값싼 원사의 대량생산에만 매달리던 한국합섬은 2007년 결국 폐업을 하게 됐다. 우리는 자본이 떠난 빈 공장을 지키며 정부를 상대로 파산공장을 책임지라는 요구를 내걸었다.

    채권단인 삼성석유화학, 신한은행, 산업은행을 타격하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서울상경팀 단장을 개코가 맡았다. 서울상경 다녀온 조합원들은 불만이 많았다. 연대투쟁을 너무 많이 다닌다는 것이었다. 그랬다. 그 때 가장 치열하고 처절하게 투쟁하던 기륭에 집중하면서 박성호는 ‘기륭성호’라는 별명을 얻었다.

    서울 상경투쟁, 기륭전자에 연대하며 얻은 별명 ‘기륭성호’

    2008년 기륭성호가 노조 지회장을 할 때 나는 사무장을 하면서 몇날 며칠을 토론하고 논쟁하고 투쟁하면서 우리는 더욱 믿는 동지로 거듭났다.

    스타케미칼이 인수하고 나서 지회장을 맡고 있던 나는 2013년 1월 4일 아침에 지회장을 사퇴하려는데 기륭성호에게 전화가 왔다. “광호야, 마무리 투쟁 우리가 해야 한다. 어용에게 맡길 수 없다.” 하지만 어용성이 있더라도 5년을 함께 투쟁한 조합원들이 다시 공장을 멈출 수는 없다는 생각에 모두 내려놓았다.

    그 때 나는 ‘멘붕’에 빠졌다. 하지만 동지들은 지회의 잘못된 방향을 바로 잡기 위해 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해복투)를 결성하고 기륭성호가 대표를 맡았다. 1년 투쟁 과정에 멘붕에서 탈출하고 굴뚝에 오르기까지 기륭성호의 도움이 컸다. 이 동지가 뇌경색이라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고 있다.

    기륭성호는 1년을 투쟁하면서 생계를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자녀를 키워야 하는데 부인이 운영하던 문방구가 어려움에 처했다. 어느 구미 시의원이 학생들의 준비물을 학교에서 일괄 지급하는 좋은 제도를 발의해 시행했는데 이로 인해 영세 문방구는 폭탄을 맞은 격이 됐다. 그는 해복투 대표를 그만 두고, 생계를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난 5월 해복투 전체회의를 하는데 기륭성호가 말이 한마디도 없었다. 회의가 끝나고 나서 겨우 몇 단어를 꺼내는데 말이 어눌했다. 자기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가까운 한의원에 달려 가니 대구의 경북대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뇌경색이었다. 경북대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지금은 울산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청춘을 받쳐 일한 공장에서 먹튀 자본에 속아 이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며 싸워야 하는 세상이다. 성호를 생각하면 정말 눈물이 난다. 기륭성호가 미치도록 보고 싶다.

    필자소개
    스타케미칼 해고자 복직투쟁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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