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세기 세계사의
    빛과 그늘 담은 시대의 벽화
    [책소개]『패자의 기억』(미셀 라공/ 책세상)
        2014년 06월 21일 10:0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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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이란 삶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것

    우리에게 지나간 20세기는 어떤 의미인가? ‘파국과 번영이 함께했던 극단의 시대’(홉스봄)이자, 전쟁과 혁명의 연계 속에서 새로운 사상의 연쇄가 일어났던 ‘전쟁과 혁명의 시대’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러시아혁명, 스페인내전, 68혁명 등을 거치며 분출했던 혁명의 열기와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파시즘 등으로 타올랐던 사상의 쟁투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뜨거운 꿈을 꾸게 만든 한편, ‘불의한 권력의 타도를 지향했으나 결국 또 다른 권력의 탄생으로 귀결’되곤 했던 혁명의 그늘을 직시하게 한 뼈아픈 역사이기도 했다.

    프랑스 작가 미셸 라공의 장편 역사소설《패자의 기억》은 20세기 세계사의 벽화이자 그것을 관통한 ‘혁명’의 의미를 새롭게 제시하는 목격담이며, “한 세기 동안 금지되었던 사상과 행동을 망각으로부터 구해”내는 시대의 증언이다.

    심부름꾼, 기계공, 주물공장 노동자, 헌책 장수 등을 거치며 삶의 폭을 넓혔고 2차대전 당시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작가는 알프레드 바르텔르미라는 프랑스인 아나키스트의 회고록이라는 형식을 빌려 19세기 말부터 1968년 5월혁명에 이르는 격동의 ‘역사’와 그 현장의 한복판을 누볐던 ‘인간’ 군상, 그리고 그들을 사로잡았던 ‘이념’을 엮어 실제와 허구가 넘나드는 한 편의 대하드라마를 직조해냈다.

    소설의 주인공 알프레드는 파리 뒷골목 부랑아에서 출발해 1, 2차세계대전, 러시아혁명, 세계대공황, 스페인내전, 68혁명 같은 20세기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노동자로, 아나키스트로, 정치가로, 혁명가로, 망명객으로 성장하면서 사랑하고 분투한다.

    그의 ‘희망’과 ‘패배’의 연대기에는 레닌, 트로츠키, 크롯포킨, 고리키, 블룸, 마흐노, 소렐, 페기, 말로 같은 실제 인물들이 동행한다. 친구로, 동지로, 적으로 그들과 연대하고 반목하는 과정은 충실한 시대 고증의 기반 위에서 실제 역사의 흐름을 호흡하게 하며, 거기에 결합된 소설적 ‘이야기’는 극적인 흥미를 배가한다.

    주요 인물들 옆에서 역사의 주요 국면을 함께했지만 알프레드는 단 한 번도 권력자가 되거나 영웅이 된 적이 없었다.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에 반대하고 삶을 사랑하며 언제나 자유롭고자 했던 그는 “제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로 상징되는 “권력의 매독”을 경고하고, “결국 전제주의와 다른 점이 하나도 없”게 되어버린 혁명의 변질을 비판하며, “한 권력을 또 다른 권력으로 대치하려는” 전쟁의 감시자로 살다 결국 이름 없는 노인으로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공적인 역사에서는 어쩌면 ‘패배자’로 기록될 그의 이야기는 그러나 가장 자유롭고 존엄한 인간(들)의 초상을 보여준다. 또한 이념에 매혹되고 혁명에 가슴 뛰던 시대는 지나갔다고 말해지는 오늘, 혁명의 그늘을 숨기지 않는 이 작품은 오히려 현실에 발 디딘 새로운 희망을 다시 꿈꾸게 한다.

    “인간에 대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인간과 이 세계의 열정과 모순, 위선, 희망, 환멸, 절망, 비열함, 위대함에 대해, 인간들의 사회에 대해” 다시 성찰하게 한다. 정의로운 권력에 대한 갈망이 여전한 지금, 진보도 보수도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곳에서 우리가 꿈꾸고 실현해야 할 진정한 혁명의 모습은 무엇인지 묻고 있다.

     패자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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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에서 1990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1992년에《패배자의 회고록》(예하)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20세기 유럽 역사의 장대한 흐름 속 아나키스트들의 분투와 좌절을 그린 이 작품은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등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던 당시에 묘한 울림을 주었다.

    러시아혁명의 태생적 한계, 노동자와 농민의 낙원 소비에트가 일당독재로 변질되어가는 모습이 이미 날카롭게 묘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절판되었던 책을, 초판의 오류를 바로잡고 문장을 다듬어 새로운 제목으로 출간하게 되었다.

    파리 뒷골목 부랑아가 혁명의 현장을 누비는 아나키스트가 되기까지

    1차대전이 일어나기 전의 프랑스. 일찍이 부모를 잃은 알프레드와 자발적으로 부모 품을 떠난 플로라는 부랑아처럼 파리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자유롭게 살아간다. 그들은 아나키스트로 활동하는 청년 빅토르(훗날 알프레드가 러시아 인터내셔널 사무실에서 재회하게 되는 빅토르 세르주. 한때 볼셰비키였으나 혁명 이후 좌익반대파의 정치가이자 작가, 평론가로서 유럽 전역에서 활약했던 실제 인물을 모델로 했다)와 그의 연인 리레트를 우연히 만난 것을 계기로 부랑아 생활에서 점차 벗어나게 된다.

    두 사람과의 인연으로 서점을 운영하는 폴 들르살을 알게 된 알프레드는《레미제라블》을 비롯한 책 읽기에 빠져들고 여러 사상을 접하면서 세상을 보다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는 플로라와의 사이에서 첫 아들 제르미날을 얻지만 보노 패거리의 뒤를 이어 아나키스트의 모험에 동참하는 한편, 가족 곁을 떠나 1차대전에 참전한다. 러시아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프랑스군 대표단 일원으로 차출되어 소련 혁명정부에 파견된 알프레드는 러시아혁명 이후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그리고 이어서 굽이치는 역사의 격동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역사와 허구를 버무려 전기 형식으로 풀어낸 이 소설은 1917년 러시아 혁명정부, 양차 대전 전후의 혼란스러운 프랑스, 인민전선이 들어선 스페인 등 역사의 생생한 현장으로 독자를 인도하며, 노동자에서 정치 투사로, 참여적 지식인으로, 헌책방 주인으로 변모하는 알프레드를 통해 이상을 추구하다 실패를 맛보지만 삶에 대한 의지를 결코 잃지 않는 강건한 민중의 초상을 보여준다.

    일체의 권력과 권위에 맞서서 자유를 추구하는 알프레드는 훗날 68혁명을 촉발시키고 공산주의적 유토피아의 몰락을 극복하고자 노력한 아나키스트들의 모습을 대표한다.

    한편 주인공 알프레드의 첫 아내로서 제르미날의 어머니이기도 한 플로라, 러시아에서 만나 아들 알렉시를 낳은 갈리나, 우크라이나 출신의 혁명가이자 여성해방운동가로서 연인이자 어머니 같은 존재였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프랑스에 돌아와 공장 노동자로 성실하게 일할 무렵 결혼해 남매를 낳은 아내 클로딘, 말년의 알프레드를 돌본 이자벨 등 알프레드가 사랑한 여성들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자유분방하게 삶을 즐기고자 했던 플로라, 정치 일선에서 적극적으로 활약한 갈리나와 알렉산드라, 순종적이고 유순한 클로딘 등 각기 다른 성격과 매력을 지닌 이 여성들은 알프레드의 삶의 주요 국면에 등장하여 이후 행동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첫 아내로서 알프레드가 평생 사랑한 ‘생선 수레를 타고 온 소녀’ 플로라는 알프레드와 떨어져 지내는 동안 샤갈, 수틴, 뒤뷔페, 발튀스 등의 작품을 취급하는 파리의 대화상大畵商으로 자리 잡아 부와 명예를 거머쥐는데, 이 부분에서 미술 평론가로도 활약한 저자의 조예가 돋보일 뿐만 아니라 여러 예술 사조가 등장해 유행을 이끌었던 당시 화단의 분위기를 생생히 전해준다.

    스페인내전의 현장에서도 멈추지 않았던 알프레드의 여성 편력은 말년에도 계속되어, 임종에 다다른 그가 입원해 있는 병원을 낯선 여인이 찾아오는 장면이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기도 한다.

    그의 삶을 기록한 작중 화자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이 여인을 언급하며 모든 삶에는 불가사의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고 알프레드에게서 미처 듣지 못한 이야기가 많을 것이라고 여운을 남기며 긴 일대기에 마침표를 찍는다.

    역사의 체현자이자 진실의 폭로자, 알프레드의 눈으로 본 혁명의 빛과 그늘

    매일 저녁 마리에트가 잠든 후면 알프레드는 식탁 한 귀퉁이에 노트를 펼쳐놓고 글을 써 내려갔다. 러시아에서 겪은 일들, 혁명 초기의 감격, 이후에 몰려온 환멸, 정부 출범, 정상화 작업, 관료주의화, 군국주의화, 감옥의 세계, 소련 공산당 정치국 간부들의 각축전, 반대파의 숙청 등 모든 것을 적어 내려갔다.

    알프레드는 프랑스혁명이 공포정치로 전환되었을 때 지롱드당 지도자인 베르니오가 프랑스혁명에 대해 “자신의 아이들을 아귀아귀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라고 지적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책의 서두도 그렇게 시작하고 싶었다. 러시아혁명 역시 자신의 아들들을 집어삼키는 사투르누스였다. 볼셰비키라는 식인귀는 정적들을 몽땅 먹어치우더니 이제는 자신을 식인귀로 만들었던 사람들마저 잡아먹고 있는 중이었다. 식인귀는 자신의 살점을 뜯어먹고 있었다.(437쪽)

    러시아에서 지내던 시절 트로츠키와 경쟁하던 지노비예프 밑에서 일한 알프레드는 레닌의 유언장 사본을 훔쳐내 프랑스로 돌아오지만 그 진위 여부를 의심받고 모두의 관심에서 소외당한다.

    러시아에서 누렸던 직위와 후원자를 모두 잃은 그는 다시는 정치 활동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공장 노동자로서 묵묵히 살아간다. 하지만 일하던 공장에서 농부 출신 아나키스트이자 ‘마흐노 반란’의 주역인 네스토르 마흐노를 우연히 만난 것을 계기로 자신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쳐준 볼린(아이헨바움)과 재회하고 정치 활동에 다시 가담하게 된다.

    이 무렵 자신이 러시아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글로써 증언해야 한다고 절감하고는 그간 겪은 일들을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이윽고 알프레드는 러시아혁명을 변질시킨 주역들이 누구인지를 폭로하고 새로운 이상의 대두와 몰락을 면밀히 분석한 글들을 모아 ‘자식들을 집어삼키는 사투르누스’라는 상징적인 제목을 붙인 소책자를 발간하게 된다. 러시아혁명을 이끈 주역들이 탐욕스러운 권력투쟁으로 인해 숙청되고 이것이 반복되는 악순환을 고발한 것이었다.

    볼셰비키 혁명의 결과는 아나키스트들의 관점, 특히 독재사회주의에 대한 아나키스트들의 비판이 정확했음을 입증한다고 결론짓고, 볼셰비키 혁명은 어떻게 하면 혁명이 실패하는가에 대한 교훈을 주었다고 서술한 이 책자는 발표 당시 주목받지 못했고, 훗날 작중 화자의 도움으로 알프레드가 임종을 앞두었을 때 재출간된다.

    책자의 발간을 시작으로 여러 정치 간행물에 글을 기고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친 알프레드는 1935년 말에 불온 사상 유포죄로 반 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한다. 이후 아나키스트들의 활약이 돋보이던 스페인으로 부푼 마음을 안고 건너간 알프레드는 오히려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세력 다툼을 목도하고 보다 빈곤해진 농민과 노동자의 현실을 피부로 느끼며 환멸을 맛본다.

    스페인내전이 강대국들의 각축장으로 변모하여 혼란을 겪을 때 이베리아아나키스트연맹의 일원으로 프랑코에 맞서 싸우다 감옥에 갇히는 등 모진 고초를 겪은 아들 제르미날과 재회한다. 비참한 상태의 아들을 보며 실패한 혁명 때문에 ‘자식을 집어삼키는 사투르누스’가 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그는 제르미날을 데리고 프랑스로 돌아온다.

    스페인내전의 혼란 속 알프레드와 제르미날의 긴박한 행로를 그린 부분은 조지 오웰이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 민병대의 일원으로서 스페인내전에 참전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카탈루냐 찬가》와 비견할 만하다.

    파리에 돌아와서도 평화주의를 설파하고 여권신장 운동을 벌이다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감옥에 갇힌 알프레드는 레지스탕스 활동가들과 대독 협력자들이 벌인 싸움에 끼지 못하고 해방 이후 공백 상태에 있던 권력을 향해 쇄도하지도 못함으로써 결국 시대에 완전히 뒤진 패자처럼 여생을 살아간다.

    이렇듯 알프레드는 아나키즘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러시아와 프랑스, 스페인에서 잇따라 좌절을 맛보지만 역사의 냉철한 목격자로서 그 과오를 끊임없이 성찰한다. 그는 패자로서 역사에서 잊히고 말았으나 ‘삶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과 ‘자유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의지’를 지니고 투쟁해온 강인한 인간의 생명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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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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