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려한 스카프와
    챙 달린 흰색 모자의 그 사람
    [클래식 음악 이야기] 루치아노 파바로티 (1935-2007)
        2014년 06월 18일 03:1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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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말. 말.

    “음악을 만드는 것은 나에게는 그 어떤 감정에 대한 가능한 매우 즐거운 행위이자 가장 완벽한 표현이다.”

    “…오페라는 모든 이에게 청취되어야 하고 음미되어야 한다.” “나는 멋진 오페라 음악의 메시지와 함께 가능한 한 많은 이들에게 다가가고 싶다.”

    파바로티2

     “빈체로 (Vincero), 빈체로(Vincero)”(이기리)는 푸치니(Giaccomo Puccini, 1858-1924)의 <투란도트>(Turandot)(1926)중 3막에 나오는 아리아(Nessun dorma)에 나오는 높은 음(하이 C)이다. 이를 당당히 소화해 내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이탈리아 테너 가수가 있다. 그가 바로 파바로티이다.

    이 오페라는 중국을 무대로 한 얼음같이 차가운 공주의 이야기이다. 푸치니는 후두암에 걸려 그의 <투란도트>을 미완으로 남겼다. 3막에 나오는 “류의 죽음”까지가 실제로 푸치니의 작품이며 그 이후는 푸치니의 제자 알파노(Franco Alfano, 1875-1954)의 작품이다.

    1926년 4월 5일 라 스칼라에서 작품이 초연되던 날 이탈리아 지휘자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1867-1957)는 3막 “류의 죽음”까지만 연주하고 지휘봉을 내렸다. 그리고는 청중들을 향해 소리쳤다. “푸치니 선생께서는 여기까지 쓰시고는 펜을 멈추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퇴장했다.

    파바로티의 아리아 “네쓘 도르마”(Nessun dorma)는 “류의 죽음” 이전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칼라프가 부르는 “승리”의 아리아이다. 하마터면 아찔한 순간이었다. 만약 푸치니가 더 일찍 세상을 떠났다면 그의 아리아 “네쑨 도르마”도, 그 아리아를 불러 줄 테너 가수 파바로티도 그 유명세를 맛볼 수 없었으리라!

    레지오 에밀리아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푸치니 오페라 <라보엠>(La bohème>(1896)의 로돌포역으로 오페라 무대에 공식 데뷔(1961)했던 파바로티에게 그의 음악 인생의 최고의 기회가 또 다시 찾아온다.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이며 제작자인 리처드 보닝(Richard Bonynge)이 부인인 소프라노 조앤 서덜랜드(Joan Sutherland, 1926-2010)의 파트너를 찾고 있었다. 그녀는 180cm의 키에 최고의 찬사를 받는 음악계의 주목받는 높은 음색을 가진 소프라노였다. 이러한 그녀에게 걸 맞는 상대를 구하긴 쉽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 앞에 마침 혜성같이 나타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거구의 파바로티다. 그의 음역 대는 다양하였으며 다른 테너들이 어려워서 힘들어하는 하이 C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성악가였기에 그녀에게는 더 없는 행운이었다.

    1972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그녀와 함께 한 도니체티(Gaetano Donizetti, 1797-1848)의 <연대의 딸>(La Fille du Regiment, Daughter of the Regiment)(1840)의 공연이야말로 파바로티를 세계적인 성악가로 자리 잡게 한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그를 세계적인 성악가로 만들었는가. 그의 파트너 서덜랜드의 역할도 컸지만 특히 이 오페라 아리아 “친구여 오늘은 즐거운 날”(Pour mon ame)에서 나오는 9번의 하이 C가 파바로티로 하여금 “하이 C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만드는 순간이었다.

    도니체티가 왜 이렇게 높은 음을 그것도 테너에게 무리한 요구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음이 너무 높아 한 세기 이상 한 번도 제대로 불려지지 못했던 이 곡이 파바로티에 의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결과적으로 도니체티가 파바로티를 위해 만든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게 웬 말인가. 파바로티가 악보를 읽지 못한다니. 상상이라도 할 수 있는 이야기인가. 너무 놀라지 말기를. 놀랄 일은 슈만, 베를리오즈, 바그너의 최고의 낭만 작곡가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파바로티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음악성,” “특별한 버릇”? 아니다. 그것은 “절대음감(Absolute Pitch, Perfect Pitch)”이다. 대단하다. 그는 많은 음악가들이 지니지 못한 절대음감으로 그가 부르는 모든 음악들을 소화해냈다는 것이다.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은 절대적인 음 높이를 파악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 어떤 음을 듣고 그 음높이를 즉석에서 어떤 악기의 도움 없이도 판별할 수 있는 청력이다. 쉽게 말하면 88개의 피아노 건반의 음을 다 가려낼 수 있는 능력이다.

    우리가 익숙한 음역은 일반적으로 가운데 위치한다. 음역이 매우 높거나 낮은 음역에서의 소리까지 다 찾아낼 수 있는 능력, 그것이 바로 절대음감을 가졌다고 한다. 유명한 스승이 첫 제자를 맞아들일 때 절대음감 테스트를 하는 경우가 있다.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음악적 성장 발전에 유리한 고지를 점할 테니까 말이다.

    절대 음감을 가진 파바로티는 자신의 몸이 악기였다. 그 또한 식도락가이었다.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한 성악가는 미식가이도 하다. 이탈리아가 오페라의 산지로서 성악가들이 몰리는 이유도 있겠지만 또 다른 이유는 음식의 나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들 성악가들은 좋은 음식을 만났을 때 그 때 기분이 노래할 때 기분과 같다고 한다. 즉 노래와 음식의 공통점은 인간이 자연스럽게 느끼는 하나의 “즐거움”일 것이다. 제빵사 아들이었던 파바로티는 이탈리아 작은 도시 모데나에 위치한 ‘유로파 92(Europa 92)’라는 작은 레스토랑의 주인이었다.

    존 본 조비(Jon Bon Jovi), 리키 마틴(Ricky Martin), 스팅(Sting),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다이애나 왕세자비(Diana Princess of Wales)와 같이 유명 인사들이 이 레스토랑에 다녀갔다고 한다.

    그는 삶을 향유하는 즐거움은 식사하는 시간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미식가였다. 또한 “. . .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조마조마했지만 한숨 푹 자고 일어나거나 맛있는 음식을 배 부르게 먹으면 모든 것이 잘될 것만 같은 긍정적인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음식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이는 그의 절대미각을 가진 낙천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그의 이러한 식도락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L’elisir d’amore, Elixir of Love)(1832)의 2막 파티 장면에서 파바로티는 인조 음식이 아닌 진짜 음식을 갖다 놓으라고 부탁한 뒤에 통닭을 먹으면서 노래했다고 한다. 그런 광경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이는 파바로티만이 감행할 수 있는 장면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무대 위의 음식들은 색깔과 모양만 낸 가짜 플라스틱들이다. 실제로 성악가들이 음식을 먹게 되면 음식이 목에 걸려 노래를 제대로 부를 수가 없기에 가짜음식을 올려다 놓는다. 그럼에도 파바로티는 실제 음식을 요구했다. 이는 그가 미식가의 경지를 넘어 그의 노래에 대한, 작품에 대한 현실적 감각을 체험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의 가창력을 뽐내고 싶은 마음에서일까.

    모든 음악인들에게는 자신의 타고난 재능도 필요하지만 그에 따른 후천적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파바로티는 그의 절대음감으로 극복했으며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의 모든 정열을 음악에 바쳤다. 그는 공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기사에게 “발성 연습을 좀 해도 되겠습니까?”고 양해를 구하고 도착할 때까지 계속 발성 연습을 했다고 한다. 공연장 대기실에서도 그의 발성연습은 끊이지 않는다.

    파바로티의 목소리는 웅장함 속의 아름다운 것이 존재한다. 무대 위를 꽉 채울 정도의 뚱뚱한 거구와 개성 있는 외모, 거기에 어울릴 법 하지 않은 아름다운 고음과 풍부한 성량의 소유자인 파바로티!. 그런 파바로티가 자신의 외모에도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파바로티

    그는 여러 가지 화려한 장신구(모자, 악세서리, 스카프 등)로 사용하여 그를 바라보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켜 보완했다. 그는 데뷔 당시 무대 위의 자신의 얼굴을 돋보이기 위해 수염을 길렀고 항상 아이펜슬을 가지고 다니면서 진한 눈 화장을 했다고 한다.

    또한 그의 흰 손수건이 트레이드마크가 된 데에는 특별한 동기가 있었다. 감기에 걸린 그에게 그리고 무대 공포증을 가진 그에게 하나의 안식처의 역할을 해 준 것이었다. 관중들을 향해 무대 위에서 흰 손수건을 흔든 파바로티에게 관중들은 환호했고 그 답례로 파바로티는 열창을 했다. 그 흰 손수건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았다. 여기서 우리가 그가 흔든 흰 수건의 시선 분산 작전에 휘말려 든 것은 아닐까.

    고음과 미성으로 20세기 후반을 향유했던 파바로티는 푸치니의 “Vincero Vincero”를 극중의 남자 주인공인 칼라프처럼 “승리”를 외치며 2007년에 세상을 떠났다. “테너의 제왕,” “하이 C의 제왕”등의 수식어가 따라붙던 테너 파바로티가 바로 이 작품을 그가 작고하기 1년 전 이탈리아 토리노의 동계 올림픽 개막 공연에서 병세 악화로 인해 립싱크(lip-syn)를 해야만 했다.

    그런데 파바로티만 립싱크한 것이 아니라 모든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핸드 싱크, 몸 싱크를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립싱크가 네거티브 공세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우리는 진정한 파바로티를 본다. 여기서 파바로티는 관중들의 그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기에 그러한 선택을 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는 그 순간 만감이 교차했을 터이다.

    립싱크를 한 파바로티도 대단하지만 그를 심리적으로 음악적으로 받쳐주고 후원해 준 오케스트라 단원들 또한 대단하다. 그들의 몸 싱크는 단순한 싱크가 아닌 파바로티를 향한 존경심과 경외심 그 이상의 무언의 제스처였을 것이다. 파바로티 자신이 테너의 “제왕”의 자리를 굳히는 순간이었다.

    “음악을 위한 삶은 환상적이었고, 그로 인해 나는 인생을 음악에 바쳤다.”

    “음악 자체가 삶에 있어서 나 자신만의 열정을 대신할 수 없다.”

    “음악을 감상하기 위해 두뇌가 필요 없다.”

    이 모두 파바로티의 말이다.

    그렇다! 파바로티는 절대 음감, 절대 미각, 절대 감각이 필요했다!

    그런 파바로티에게 우리 모두 기립 박수갈채를 보내자. 그는 1시간 7분간의 박수 갈채와 165번의 커튼콜로 기네스 북에 올랐다.

    필자소개
    한양대 음악대학 기악과와 동대학원 졸업. 미국 이스턴일리노이대 피아노석사, 아이오와대 음악학석사, 위스콘신대 음악이론 철학박사. 한양대 음악연구소 연구원, 청담러닝 뉴미디어 콘테츠 페르소나 연구개발 연구원 역임, 현재 서울대 출강. ‘20세기 작곡가 연구’(공저), ‘음악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번역), ‘클래식의 격렬한 이해’(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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