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망과 희망 사이
    부산 진보정당 평당원들의 대화 ②, '나가는 글'
        2014년 06월 18일 10:4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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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지역 진보정당 평당원들의 긴 방담에 대한 글의 서문, 남종석씨가 대표 집필한 서문에 이어 이창우씨와 최희철씨가 쓴 나가는 글을 필자와 출판사의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들어가는 글과 나가는 글을 동시에 읽을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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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어가는 글 ‘진보정치의 어제와 오늘’ 링크  

    날은 저물고 막차는 떠났습니다. 진보의 폐허 위에서 이미 떠나버린 막차를 “가만히 앉아 기다리라”고요? “다시 시작하자”고요? 새로 시작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마치 양치기 소년 같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군요.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해 왔던 이들은 현재 진보정당이라는 명함이 오히려 짐이 되고 있습니다. 당이 그들의 도약대가 되기는커녕 ‘개미지옥’이 되어버린 것이 진보정당의 현주소로군요.

    모범적인 의정활동을 펼친 우수한 현역 기초의원들이 단지 진보정당의 공천을 받았다는 이유로 추풍낙엽처럼 낙선한 현실을 보며 드는 생각입니다. 새정치민주연합으로 들어와 출마하라는 제안을 무 자르듯 뿌리친 내 후배 정치인도 낙선했습니다.

    진보정당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못해 낙선의 길로 접어든 이들에게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정당이 마치 개미지옥처럼 느껴지다니! 정말 참담하군요.

    직업 정치를 해 온 현역들에게 아무런 힘도 되지 못한 진보정당 1세대인 나는 진보정당에 대한 의리를 차마 저버리지 못해 남아 있는 이들에게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비록 당장은 어렵더라도 꿈을 갖고 참고 견디라”고 말할 자신이 없어요. 그래서 그 꿈은 막차가 아니라 새벽 첫차를 타야 할 새로운 세대의 몫으로 남겨두려고 합니다.

    적어도 제가 몸담았던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통합진보당, 정의당에 이르기까지 양당 체제를 돌파해보려던 시도는 좌절되었습니다. 양당 체제는 더 강해졌고 진보정당에게는 재겨 디딜 한 치의 틈도 없어졌습니다.

    언젠가부터 진보정당은 자신의 고유 의제조차 잃어버린 채 표류해 왔습니다. 2012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3무1반(무상급식, 무상의료, 무상보육과 반값 등록금)을 내세우고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경쟁적으로 제시한 대선에 이르기까지 ‘좌클릭’한 민주당과 진보정당들의 차별성은 희미해졌습니다.

    통합진보당에서 분리되어 나온 정의당은 역으로 보다 책임 있는 공당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성장’과 ‘안보’에 대해 국민들이 갖고 있는 불신감을 털어내는 쪽으로 향했습니다. 모두가 좌향좌 하고 있을 때 정의당은 ‘통합진보당 트라우마’ 때문에 우향우 한 셈이지요.

    민주당과의 차별화를 시도해야 할 때, 통합진보당과의 차별화에 몰두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진보정당이 독자적으로 존재해야 할 이유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소득 주도 성장’과 같이 노동이 있는 복지국가의 비전을 제시하긴 했지만 정의당의 작은 마이크로는 국민들에게 자기의 목소리를 내기에 역부족이었고 ‘정치적 파장’을 만들기에 임팩트도 약했습니다.

    민주노동당 때는 그래도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 “무상교육, 무상의료”와 같은 자기 메시지와 브랜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진보정당의 메시지나 브랜드가 무엇인지 저조차 알 수가 없군요.

    정의당이 지방선거 전에 내세웠던 ‘정의로운 복지국가’와 ‘평화로운 한반도’는 그 직후 안철수의 새정치연합이 복사해 써버렸지요. 진보정당의 비전마저 완판(sold out)되었다고 해야 하나요? 정의당의 존재감은 이렇게 늘 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에 의해 가려졌습니다.

    그러고 보면 정의당이 지난 18대 대선에서 후보 사퇴하고 민주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지운 것은 그래도 ‘야권연대의 파트너’로 인정받기 위해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습니다.그러나 현실정치의 세계는 행위자들의 선의와 무관하게 정의당이라는 파트너를 토사구팽한 결과가 되었지요. 정치전략으로도 실패한 것입니다.

    복기해보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미래를 위한 종자를 남겨둬야 했습니다. 그 종자는 ‘미래 세대의 정당’이겠지요. 그를 위한 전략적 투자를 해왔다면 정의당의 정체성은 그나마 윤곽이라도 드러나지 않았을까요? 어쨌든 전략적 좌표도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밀려온 정의당의 실패가 아프게 눈에 밟힙니다.

    그래도 아버지의 꿈이 복지국가라던 근혜 대통령이 기초연금 약속을 파기하는 등 대선공약을 식언하는가 하면 새정치민주연합이 새누리당과 기초연금의 국민연금 연계 꼼수에 동의해주는 등 저들의 복지국가 약속이 현실에서 왜곡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잡고 강제하는 진보정당의 역할이 필요하다고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보정당의 존재이유를 설명하는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민주당에 들어간 진보정당 출신 인사들은 민주당 내의 중도좌파 블럭을 강화함으로써 그것을 실현하자고 합니다. 등대정당을 할 것 같으면 모르되 정책적 차별성도 별로 없는데 독자적인 진보정당이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요.

    크게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습니다. 현실정치에서는 야권연대 없이 치러진 이번 지방선거 결과 진보정당의 현역들 대부분이 낙선한 것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유권자들이 진보정당을 찍어야 할 동기가 그만큼 약해졌다는 것이죠.

    물론 분산된 진보정당들이 받은 표의 총합을 볼 때 거의 10% 가깝다며 진보정당이 통합된다면 여전히 캐스팅보터로서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2012년 통합진보당 사태와 이석기 사태를 거치면서 진보정당의 재통합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설령 재통합을 하더라도 10%의 지지율을 회복할 지 의문입니다.

    정의당 지지자들이 통합진보당과 다시 통합한다면 고스란히 따라올까요? 그 역은 어떨까요? 녹색당은 자신의 정체성을‘근대적 패러다임’인 진보정당류로 규정하려 할까요? ‘민족주의자’들과는 피 한 방울이라도 섞이고 싶어 하지 않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진보정당의 재통합을 당위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진보정당의 재편에 질곡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가능한 경로를 찾아보려는 이들의 수고를 폄하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릴 수 있으니 주의해야겠죠.

    지금 최대치는 ‘따로 또 같이’의 지혜를 찾는 것입니다. 각자의 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면서 선거 시기에 무지개연합정당으로 대응하는 것이지요. 통합? 그게 급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번 지방선거에서 교육감 선거가 보여준 것은 진보에 의지하려는 시민들이 다수라는 것입니다. 진보정당은 부스러기가 되어버렸지만 진보정당이 뿌려놓은 진보적 의제들은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지금 우리의 문제는 진보가 외면당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정당이 외면당한 것이고, 그것은 순전히 진보정당을 해 온 주체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주체는 리더십일 수도 있고, 진보정당의 운영체제, 구동원리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바꿔야 한다면 우선 나부터 바꾸려고 합니다. 운동의 열정은 초심으로 리셋하고, 방법론은 보다 겸손하고 온유하게 말입니다. 이념과 가치가 옳다고 국민들이 인정해주는 게 아닙니다. 이념과 가치만큼 방법론이 옳아야 합니다. 과격을 자랑삼는 진보에게 누가 곁을 주겠습니까? 그저 유유상종일 뿐이죠.

    차이를 인정하면서 함께 일하는 법을 익히는 것, 여전히 민주주의적 소양에 관한 문제입니다. 혁신이 필요합니까? 내가 혁신의 대상입니다. 나부터 바꾸겠습니다.

    진보3당

    보통 ‘배움’이라면 잘 아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라 합니다. 너무 일방적이고 계몽적인데요, 우리 토론은 적어도 그런 방식은 아니었던 같습니다. 일방적이 아니라 모두에게 열려있는 방식이랄까요. 그건 일종의 ‘감응(感應)’이었던 것 같습니다.

    접속을 통하여 서로 다른 점을 알게 되고, 자신과 상대가 감응을 넘어 ‘감흥(感興)’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 말입니다. 하여 새로운 범람을 많이 만난 것 같습니다.

    한계를 넘어야 문턱이 보이고 문턱을 넘어야 새로운 지평이 열립니다. 한계와 문턱의 두께는 종이 한 장일 수 있을 겁니다. 한계를 느끼는 바로 그 순간이 문턱일 수도 있으니까요. ‘줄탁동시’라고나 할까요.

    삶이 점점 힘겨워져 감을 느낄 때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외치며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게 발화점입니다. 어쩌면 그저 지나쳐 버렸을지도 모르는 그 지점에서 우린 진보정당의 주변에 머물던 일반 당원들이었기에 더 쉽고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겁니다.

    물론 토론 중에 우리가 갖고 있던 생각의 두께가 커지는 걸 느꼈던 적도 있습니다. 일종의 벽을 만났거나 만들었던 셈인데요, 그런 의미에서 ‘민족좌파(혹은 자주파)’ 내부의 사건, 즉 ‘경기동부 사건’을 비판한다는 게 혹시 그런 벽들을 더 두텁게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건이나 역사는 비실체적이라는 과거와 현재가 만나서 여러 가지 주름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진보진영의 비판과 반성은 늘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도 모르는 어떤 찰나에 우리 스스로 어떤 잣대를 만들고 그 잣대가 마치 영원한 것처럼 여기는 것은 아닌지 늘 의심하고 경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진보정치는 한계 내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려는 작업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히려 한계를 넘어 무언가를 발명하는 일이지요. 하여 늘 새로운 문턱에서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내어야 할 겁니다. 그건 정치를 좀 더 미세한 지점까지 끌고 가는 것일 수도 있을 겁니다.

    어떤 억압을 어떻게 깨어버릴 것인가의 문제보다, 억압의 계보학을 알고 드러내는 것이라고나 할까요. 끝없이 드러내는 작업의 연속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욕망이 사라져 보여 너무 무력해 보이나요?

    우린 드러내고 그 드러냄이 미세하지만 대중 속으로 전염되어 다시 정치력으로 작동하는 그런 ‘분자혁명’적 과정이 끝임 없이 시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어쩌면 단순한 실험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정치적 활동이란 그런 실험의 극미(極微)적 요소는 아닐까요. 그게 우리의 정치활동이 작은 부품이 되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늘 ‘불꽃’ 같은 것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화기(火氣)가 접근하는 순간 ‘펑’하고 터지죠. 어쩌면 거짓말 같은 달콤함 말이죠.

    그럼, 모두 행운을 빕니다.

    2014년 6월 16일 네 사람을 대표하여 이창우 최희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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