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은 다른 곳에 - 추억과 흔적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 "'흔적'으로 있을 때 더 선명"
    2014년 06월 16일 11:3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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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물방울 하나가 한동안 머물다가 날아가 버린 ‘흔적’이 있다. 이 마른 ‘흔적’은, 지금은 그 물방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더없이 확실한 물증이지만, 한때 물방울이 여기 존재했었다는 가장 유력한 알리바이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물방울을 돌이킬 수는 없지만, 우리는 “물방울이 여기 있었다”고 말할 수는 있다. 곧 물방울의 ‘흔적’은, 일정한 시간을 사이에 둔, 물방울의 ‘존재/부재’를 동시에 증명하고 있는 실체이다.

비유하자면, 우리의 삶도 이 물방울의 마른 ‘흔적’과도 같다. 언젠가 존재했었던 것들에 대한 소중한 ‘기억’과, 이제는 그것들이 한결같이 우리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끔찍한 ‘실감’ 사이에서 살아가니까 말이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흔적’이 타인의 기억 속에 각별하게 깃들이기를 바란다. 물론 누가 알아주건 말건 아예 초연한 사람이 없지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타인의 기억 속에서 가장 직접적이고 중요한 목적어가 되기를 욕망한다.

자신의 생의 한순간이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 속에 뚜렷이 각인되어 항구적으로 남아주기를 그들은 안타깝고 뜨겁게 열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의 어느 한 순간이 기억 속에 스스로의 활력으로 남아 있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그에 대한 ‘추억(追憶)’이라 부른다.

이때 ‘추억’은 그냥 건조하게 머릿속에 남아 있는 ‘메모리memory’와는 다른 ‘꿈꾸는 기억’으로 거듭난다. 기억이 꿈을 꾸다니? 기억되던 그 순간의 온기와 생기로 새록새록 살아나는 ‘꿈꾸는 기억’, 그것이 말하자면 저마다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추억’이다. 그러니 ‘추억’은 물방울 자체가 아니라 물방울의 ‘흔적’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어느 누구는 이 물방울의 ‘흔적’보다는 물방울 자체에 대한 미련과 집착으로 시간과 힘을 낭비한다. 그리워하는 마음보다 그리워하는 대상 자체에 골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움은 그리움의 행위 자체에서 빛을 발하고 그 빛을 통해 생을 아름다움을 완성해가는 것이지, 그리움의 대상을 획득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모든 재회가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대중가요 중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에는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라는 구절이 나온다. 만약에라도 그 ‘늙어가는’ 첫사랑을 우연히 만나게 되면 어떨까. 그 순간 반가움과 상실감이 동시에 밀려올 것이다. 그러니 ‘추억’은 그리움의 깊이로만 완성되는 것이지, 그것을 현실화하려는 욕망이 앞서면 추억에서 ‘꿈’이 빠져나가게 되고 현재의 물리적 어색함만 남게 되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프랑스 영화 <무도회의 수첩>이나 <쉘부르의 우산>은 연인들의 쑥스럽고 어색한 재회 장면을 그리고 있다. 그들은 서로 만나자 곧 서로를 잃어버린다. 현실 속의 그 사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동시에 추억 속의 시간마저 잃어버린다.

쉘부르

영화 ‘쉡부의 우산’의 한 장면

오래된 한국 영화 <겨울 나그네>에서도 사랑하는 연인인 민우와 다혜가 어색하게 만나는 장면 또한 반가움보다는 안타까움을 담고 있다. 이처럼 모든 만남은 그 만남에 대한 열망과 그리움의 시간만큼 아름다운 것이지 그 만남의 성사 여부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도 많은 시청자들에게 포근함을 안겨주는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TV프로는 그 점에서 매우 역설적인 프로그램이다. 나는 그 프로를 보면서 가끔 엉뚱한 상상을 하곤 하는데, 그것은 방송국에서 정성을 다해 찾아낸 유명인사의 첫사랑, 그들 사이에 일고 무너지는 오래된 관계와 새로운 관계에 대한 것이다.

자, 상상해 보자. 그들은 오랜 시간을 되돌리면서 ‘그때’의 추억 속으로 간다. 추억 속에서 되불러낸 그 첫사랑을 방송국 스튜디오라는 현실 공간에서 짧게 만난다. 반갑다. 너무도 변해버린 그 아이가 어색했지만 그것도 잠시 반가움에 눈물 흘린다. 방송이 끝나고 그들은 그동안 쌓였던 이야기를 올올이 풀어가겠지.

이처럼 시간의 저편에 있던 한 사람을 추억 속에서 불러내 현실적으로 만난 후,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그 추억 속의 사람을 이제는 그 추억의 힘만큼 만나갈 수 있을까. 오히려 그가 추억 속에 있을 때보다 그 만남이 더 왜소하고 가난하게 되지는 않을까. 이렇게 생은 ‘실체’일 때보다 ‘흔적’으로 있을 때가 더 아름답고 오히려 선명한 법이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가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들의 이름을 불러봅니다”(‘별 헤는 밤’)라고 노래한 이는 시인 윤동주(尹東柱)였다.

추억 속의 대상을 안타깝게 호명하는 시인의 목소리 속에서 그들은 역설적으로 불멸한다.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 때 배웠던, 피천득(皮千得) 선생의 수필 ‘인연(因緣)’의 마지막 장면도 떠오르지 않는가.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그가 세 번째 만난 아사코[朝子]의 시들어가는 얼굴은 그의 추억 속에 있던 아사코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사코를 만나는 순간, 아사코를 되찾은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이다. 그렇다. 생은 ‘만남’으로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결핍이 부르는 그리움에서 완성되는 역설의 그 무엇이다. 그러니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지 않는가.

저마다의 생의 가치는 이처럼 ‘추억’의 부피만큼만 세어질 수 있는 것이다. 누구라서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명료한 척도로 계측할 수 있겠는가. 다만 자신의 시간 속에서 길어 올린 ‘추억’이 불러주는 ‘꿈’을 통해 이 불모와 결핍의 생을 견뎌가는 힘에서 생의 완성도는 갈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생의 가치는, 분주한 일상이나 만나는 사람들의 머릿수에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추억’ 속에 살아 움직이는 ‘흔적’의 활력과 온기에서 입증된다.

그러나 ‘추억’이 아무에게나 저절로 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순간의 생을 가장 치열하게 살아간 이들에게만 남는 물방울의 ‘흔적’ 같은 것이니, ‘흔적’ 곧 생의 추억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의욕적이고 치열하게 살아간 사람인 것이다.

체코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밀란 쿤데라의 장편 <생은 다른 곳에>는 프랑스의 시인 랭보의 시에서 그 제목을 따왔다. 거기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온갖 생의 아이러니가 담겨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은 우리의 생이 갑자기 낯선 방식으로 완성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생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다. 추억의 저편에, ‘흔적’으로만.

필자소개
한양대 교수. 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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