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는 곧 지역정치
[기고] 시장의 사회화, 국가의 민주화, 민중의 정치 주체화
    2014년 06월 11일 10:4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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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치와 저항적 주체의 출현

지역 정치의 핵심은 고립된 ‘나’가 아니라 ‘우리’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회복하는 과정은 ‘그들’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를 ‘우리’ 안에서 찾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지배적인 문화, 우리의 일상생활, 학교, 직장, 심지어 구매행위까지 경쟁 논리가 스며들어 있어 그것 없이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고 발자국 하나 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연대와 행복한 삶을 열망하는 우리들 자신이 연대와 행복한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실천들을 통해 스스로를 억누르는 체계를 재생산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몸은 이미 자본주의적으로 길들여진 순응적 신체이며 우리의 의식은 자본이 불러주는 이름에 대답하는 종속적 주체이지 않은가?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

하지만 대안이 없어 보이는 것 자체가 사람들이 지배적인 사회적 관계와 이데올로기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매일 매일의 삶에서 사람들은 억압, 착취, 불공정을 경험한다. 지금의 체계는 엄청난 모순과 갈등을 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억압, 착취, 불공정을 경험하는 그 순간 갖게 되는 분노와 좌절을 표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표출의 대가를 본인이 책임져야하기 때문이다.

직관과 체험으로 체계의 모순을 알고 있지만 그것에 도전하지 못하게 하는 개별화된 주체, 이것이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사회메커니즘의 결과인 것이다.

이제 이렇게 말해야 한다.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Another world is possible!). 그리고 다른 세상이 가능한 근거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결과로서 구성된 종속적 주체의 ‘몸’과 ‘의식’ 안에 모순적 상태로 존재한다고 이야기해야 한다.

순응적 주체로 길들여진 몸일지라도 자본의 논리를 견뎌내지 못한다. 이윤만을 추구하는 장삿속에 의해 공급되는 오염된 식품, 현대 문명이 만들어낸 편리함 때문에 초래된 대기오염과 소음, 실업과 직업 불안정에 따른 스트레스, 계속된 경쟁과 긴장을 요구하는 업무 때문에 겪게 되는 신체적·정신적 고통은 불만, 좌절, 분노의 에너지를 몸 안에 쌓이게 한다.

동물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사회적 행위자가 되기 위해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원리’(reality principle)가 무제한적으로 ‘쾌락원리’(pleasure principle)를 억누를 수는 없다. 이제 신자유주의가 부과한 경쟁과 긴장은 희생된 쾌락원리가 소비-욕망의 사슬로 보상될 수 있는 정도를 넘어 규율화된 몸마저도 견디기 어려운 외적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동등한 권리를 가진 시민으로 대접받는다. 모든 것은 본인의 선호(preference)에 따른 자율적 결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공정함과 평등함, 자율성은 실제 삶의 불공정, 불평등, 타율성의 체험과 대면할 때 깨어지게 된다.

단속적이고 짧은 순간이지만 이러한 균열 또는 탈구의 계기는 무수히 많다. 이러한 균열 또는 탈구가 개별적이거나 소수만의 체험으로 드러날 때 체계는 사회전체의 이름과 공공성의 이름으로 무마시킨다.

무마된다고 하더라도 균열과 탈구를 경험한 사람들은 결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불만, 분노, 좌절을 마음 속에 품고 살게 되는 것이다. 때때로 균열과 탈구가 소수를 넘어 다수의 체험으로 나타날 수 있다. 2008년의 촛불시위가 그랬고 2014년 세월호 참사에 의해 초래된 전국민적 정부비판이 그렇다. 이런 경우는 공정, 평등, 자율로 포장된 ‘정상성’이 거짓된 이데올로기였음이 폭로된다.

자본의 논리에 의해서 산산이 부서지고 있지만 인간은 원시시대부터 공동체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었다. 지금 소위 신자유주의 시대 인간들 사이의 신뢰와 연대마저도 보험과 상조의 금융적 관계가 되어버리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바로 그러한 사회적 관계가 동반할 수밖에 없는 극도의 긴장과 피곤함은 연대와 협동을 열망하게 한다.

직장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거주지에서만큼은 이웃과의 유대를 회복하고 싶어 한다. 각종 동호회와 사이버공간의 다양한 모임도 그런 열망의 반영일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 깊이에는 역사적으로 켜켜이 쌓여온 사회적 존재로서 희미한 연대의 기억이 남아 있다.

이 희미한 기억의 흔적이 몸이 견디지 못하고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정당화하지 못하는, 그래서 개인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착취와 억압의 체험으로 생겨나는 연대에의 열망과 만나게 되는 무수히 많은 ‘지금-여기’가 또 다른 세상이 출현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개인들에게 연대의 기억과 연대에의 열망은 파편화되고 분절화 된 개인의 삶을 사회적 유대 속에서 되찾으려는 시도로 나타난다. 거대한 기계의 부품처럼 취급받는 것이 아니라 ‘나’의 역사, ‘나’의 서사(narrative)를 가지려 한다는 것이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의 역사와 서사를 가능하게 하는 동료인간들과의 소통과 유대는 성공의 유일한 잣대가 되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박탈당한다. 대학에 가게 되면 더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목숨을 건 또 한 번의 경주가 시작된다. 대부분 인턴과 비정규직의 불안정한 삶에 시달린다.

좋은 직장에 들어간다고 해도 경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승진을 위한 경쟁, 밀려나지 않기 위한 경쟁이 기다리고 있다.

이 모든 과정에 삶의 주체로서 ‘나’는 빠져 있다. 인간에게 ‘나’의 정체성, 스스로 삶의 조건을 해석하고, 동료인간들과 소통하고 협력하는 주체에 대한 열망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 그래서 현대인은 심각한 분열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나’를 잃어버리고 살지만 ‘나’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나’의 존재 근거인 사회적 연대와 협력을 허무는 실천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위험사회의 경고음은 다른 세계로의 안내!

또 다른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체계는 지속적으로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경고음’을 보낸다. 위험의 경고음을 무시하고 눈앞의 이윤만을 추구하면 작은 위험들이 누적되어 커다란 재난으로 치닫게 된다.

원자력발전소의 예들 들어보자. 원자력 발전소의 작은 사고들이 계속 보도된다. 사용연한을 늘려 가동되고 있는 원자력 발전소도 문제려니와 만연한 부품납품 비리도 잦은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이러한 경고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수자원원자력공사는 근본적인 문제는 없다고 한다. 이미 소위 원자력 마피아의 구성원인 전문가들도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세월호를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판정했던 전문가들처럼. 그리고 여전히 원자력이 깨끗하고 경제적이며 안전한 에너지원이라고 주장한다.

원자력은 결코 안전한 에너지가 아니다. 백번 양보해서 불가피하게 원자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그것이 가지는 위험이 국민들에게 정확하게 전달되어야 한다. 원자력 발전에 대한 모든 정보와 지식을 원전마피아가 독점하고 있는 상태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하게 된다면 국민들이 겪게 될 고통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사고 위험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공개되어 논의된다면 원자력 발전을 더 이상 추진할 수 없다. 정보와 지식은 원자력 발전에 엄청난 액수의 정부지원(국민의 세금)이 되고 있다는 것, 우라늄의 체굴, 폐기물 처리에 많은 비용이 든다는 것, 사용 후 발전소의 폐기에 천문학적 액수의 비용이 소요된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원자력이 ‘경제적인’ 에너지원이라는 주장이 거짓말임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청정 에너지원이라는 주장도 우라늄 체굴과 정련, 발전소 건설, 폐기물 저장고 건설, 발전소 폐쇄 과정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를 고려하면 거짓말이다. 더구나 수 십 만년 동안 완전히 격리시켜야 하는 고준위핵폐기물을 보관할 방폐장은 아직 건설계획조차 없다. 청정한 에너지라는 것도 허구인 것이다.

이렇게 위험을 은폐하고 경제적이지도 않고 청정하지도 않은 원자력 발전이 계속 추진되고 있는 이유는 막대한 이윤을 챙기는 원자력마피아가 정책결정을 좌지우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사능-1

방사능 급식조례 기자회견 자료사진(사진:나눔문화)

우리는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통해 원자력 발전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학습했다. 이렇게 위험한 에너지원에 투자되는 막대한 재원을 중장기적 에너지전환 정책의 수립에 맞추어 재생가능 에너지로 돌린다면 단계적으로 원자력발전의 비중을 줄일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미 독일은 그러한 길에 접어들고 있다.

그리고 재생가능한 에너지 체제로의 전환은 풍력, 태양력, 바이오매스 등 에너지원을 다변화 할 수 있고, 다변화된 에너지원은 지역적으로 분산되어 소규모로 공급될 수 있다. 수도권과 도시의 에너지 공급을 위해 밀양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생존권을 위협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원자력발전소를 둘러싼 정치는 중앙정부와 전문가들만의 담론을 넘어선 지역의 풀뿌리 정치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에너지 소비지의 주민과 생산지 주민들 사이의 공감과 소통, 연대의 정치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합리적이며 실현가능한 주장이며 지속가능한 에너지생산과 소비의 길이다.

이 길을 가로막는 자들은 공감능력을 결여한 자들이며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이권을 유지하는 것을 합리적이라고 ‘선동’하는 집단들일 수밖에 없다.

진보정치,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정치!

지역의 정치, 풀뿌리 정치의 과제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인간다움’을 실현하는 정치이다. ‘유엔권리선언’과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원리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권리 요구가 현실 정치에서는 유토피아적이고 실현 불가능하다고 비난 받는다. 권리의 실현은 항상 미래로 연기되고, 이념은 실현 불가능한 이상으로 밀려난다.

거꾸로 추론해보자. 우리사회에서 불가능한 것은 무엇일까? 우선 우리가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세월호 참사와 같은 대형 재난을 막을 수 없다. 즉 재난을 막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어린 학생들에게 놀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주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불가능하다. 앞선 세대와 다음 세대와의 역사적 유대감과 공감을 형성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땅값과 집값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노인 요양 기관을 혐오시설이라고 부르며 추모공원, 심지어는 재난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추모시설까지 혐오시설이라고 반대하고 있다. 오염되지 않는 먹을거리, 안전한 식품을 구매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되었다. 식품도 생존이 아닌 돈을 버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마음 놓고 밖에 내보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거리를 가득 매운 자동차는 규칙을 지키지 않고 정부는 보행자의 안전보다 자동차를 위해 도시를 계획하고 공간을 배분하고 있다. 이 목록은 끝이 없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이다. 살만한가? ‘최소한의’ 인간다움이 보장되고 있는가?

인간다움과 현행(as usual)의 체계는 공존할 수 없다. 사람들은 일상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겪어도 한국사회는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직관적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

지역정치는 이러한 직관이 공감 능력의 회복, 연대성의 구현으로 발전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직관이 공감이 되고, 연대성으로 발전하는 길은 참여와 체험을 경유해야 한다. 참여와 체험이 공유될 수 있는 장소가 지역정치인 것이다.

국민의 안전을 지키고 공익을 대변하는 중립적인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는 계급적이며 기득권 세력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노골적으로, 그리고 배타적으로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은 곧 권력의 정당성을 허물고 체계 자체를 붕괴시키기에 그것을 방지하는 한에서만 공익을 대변한다.

이러한 계급적 성격은 민주주의의 외피와 운명공동체로서의 국가라는 이데올로기로 은폐된다. 한국의 국가는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공공성의 이데올로기로 스스로를 감추는데 서투르다. 권위주의적 정치의 잔재와 노골적인 사적 이익 추구가 강하게 결합되어 있어 위기가 닥치면 여지없이 천박함의 밑바닥이 드러난다. 재난조차도 돈벌이가 되는 세상에서 국민의 안전보다는 이윤추구가 더 앞서게 되는 것이다.

사명감을 가진 공무원은 찾기 힘들고 책임회피와 전가만이 보일 뿐이다. 그리고 재난 복구의 책임은 국민의 몫으로 돌아온다.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하는 정부는 자원봉사와 성금모금에 의존하며 자신의 책무를 내려놓는다.

그리고 정부의 무능과 여기에 동조하는 보수적 언론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공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진다. 국가는 제 역할을 못하고 국민에게 책임을 전가하지만 그 국민이 국가를 비판하거나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견제 받는다.

이러한 국가는 ‘우리의 국가’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존재 이유가 없는 국가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민에게 권력을 나누어주고 책임을 지우는 것만큼 참여하고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국가이다. 이것은 ‘민중의 정치 주체화’이다.

그리고 민중의 정치주체화는 국가의 오류가능성을 인정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의 의견과 지혜를 모아 오류의 정도를 줄여내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의 민주화’이다. 민중의 정치 주체화와 국가의 민주화는 대중의 자발적 참여와 그것을 보장하고 고양하는 민주화된 국가가 시장의 힘, 맹목적으로 이윤만을 추구하는 시장의 원리를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것으로 나가야 한다. 이것은 ‘시장의 사회화’이다.

시장의 사회화, 국가의 민주화, 민중의 정치 주체화의 정치가 실험되고 제도화되고 발전되는 곳이 바로 지역정치다. 지역정치는 정치의 민주적 성격이 급진화 되는 장이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지방정부 관료와 정치인, 언론인, 지역주민 모두의 책임성을 강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민주적 참여를 통해 상호견제하고 최종적으로 풀뿌리 주민에게 결정권을 부여하는 정치만이 책임성을 보장할 수 있다. 이렇게 강화된 민주주의와 책임성은 정치의 공공성을 강화하게 할 것이다. 민주성, 책임성, 공공성의 목적은 체계의 유지가 아니라 인간다움의 실현이어야 한다.

혹자는 이상주의라고 비웃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성, 책임성, 공공성이 강화되는 국가의 민주화, 시장의 사회화, 민중의 정치 주체화가 없이 제2의 세월호가 출현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환상이 아닐까?

당연하고 실현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을 이상주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습관’이다. 사람들은 통치 받는 것에 익숙해 있다.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를 탓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사람들은 체계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다. 수동적으로 권력에 순응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것도 습관이라면 국가가 강요하는 ‘습관’을 벗어나 자기통치의 ‘습관’에 익숙해질 수 있게 하는 정치의 장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지역정치인 것이다.

자기통치를 위한 시간을 갖는 것, 비판과 참여를 위한 정치적 공간을 갖는 것이 당연한 권리가 되어야 하고 그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래서 지역정치는 ‘습관의 정치’가 되어야 한다.

습관은 오랜 시간을 거쳐야만 몸에 달라붙는다. 우리 몸에 달라붙어 있는 습관은 소비의 습관, 체념의 습관, 복종의 습관이다. 낡은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습관에 익숙해지는 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습관의 씨를 뿌리고, 뿌리가 내리게 하고, 올라온 줄기에서 가지가 뻗어 나오게 하고, 잔뿌리가 뻗어나가서 서로 뒤엉키게 하는 과정에서 성취될 자기통치의 경험은 희열과 즐거움을 가져다 줄 것이다.

필자소개
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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