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정치의 미래는 어디에?
    [기고] 슬프기보다는 씁쓸한, 화나기보다는 허탈한
        2014년 06월 10일 09:3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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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대 서영표 교수가 지방선거가 끝나고 느낀 소회와 평가지점을 글로 보내왔다. 이전 <진보평론>60호에 기고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글이 길어 2회에 나누어 게재한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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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한 번의 선거가 끝났다. 때가 되면 밥을 먹듯 선거를 치른다. 끼니마다 메뉴가 조금씩 달라지듯이 선거 때마다 이전투구의 주제가 달라지기는 하지만 큰 변화를 느낄 수 없다. ‘그놈이 그놈’이고, 선거 때 이야기된 무수히 많은 약속과 호소가 선거가 끝나자마자 흔적만 남기고 사라질 것이 뻔하다는 것을 잘 알기에 투표권을 포기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나의 삶의 경로를 나의 의사와 관계없이 결정하는 소위 ‘정치’에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하게 허용된 권리가 투표이기에 기권도 내키지 않는 선택지다. 기권을 능동적 정치 행위로서의 보이콧이라고 자위하기엔 너무 무력하다.

    이번에도 ‘믿어 달라’, ‘밀어 달라’는 정치인들의 홍수 속에 인신공격과 지키지 못할 공약만이 난무한 선거였다. 흑색선전과 불법선거도 매한가지였다. 세월호 참사가 ‘정권 심판론’과 ‘박근혜 마케팅’이 충돌하는 모양새를 만들어 준 것을 제외하면 언제나 그랬듯이 소리만 요란스러운 빈 수레였다.

    겉모습만 약삭빠르게 바꿔가며 프레임 경쟁에서 앞서나가는 새누리당은 여전히 한국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진단하지 못 했다. 한국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진단하는 순간 존재 의미가 없어지는 정당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언제나 새누리당이 제시한 프레임에 갇혀 헤어나지 못하는 무능한 새정치민주연합은 기획도 비전도 없는 정권 심판론 말고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새누리당과 지역 기득권 세력간의 ‘권력 나누기’와 ‘이익 나누기’를 함께 하고 있는 새정치민주연합의 차별성은 당의 이름과 지역 거점과 인물에 있을 뿐이다.

    백번 양보해서 지금 야당이 박근혜 정권에 비판적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는 있지만 그들은 권력을 얻는 순간 지겹게 들어왔던 ‘현실 가능성’이라는 이름 아래 부끄럼 없이 입장을 바꿀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이 구조와 체계는 그대로 둔 채 자기들한테 힘을 주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때때로 자신들을 진보라고 생각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6·4 지방선거의 결과는 승자도 패자도 없는 세력균형이라고들 한다. 어느 쪽에도 힘을 실어주지 않는 ‘국민의 현명한 선택’이라고도 한다. 수도권과 충청권의 광역자치단체장, 서울의 구청장을 싹쓸이한 새정치민주연합은 인천을 새누리당에 내주고 턱밑까지 추격했던 경기도지사와 부산시장 당선에 실패함으로써 정치적 기선을 잡는데 실패했다.

    인천을 탈환하고 기초자치단체장에서 압승을 거두었지만 서울에서 완패한 새누리당도 애매한 상황에 처해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상태를 ‘균형’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안하무인인’ 새누리당과 ‘무능한’ 새정치민주연합 모두에 대한 국민의 경고로 선거결과를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개의 거대 정당이 국민의 경고를 알아듣기는 할까? 세월호 참사로 분노한 국민의 정서를 이해하고는 있는 것일까? 아니 선거는 애초부터 국민의 의견을 반영하기보다는 왜곡하는 제도가 아닐까?

    아마도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은 7월 30일에 있을 보궐선거만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정책선거를 주문처럼 외워대겠지만 국민을 표 찍는 ‘기계’정도로 생각하는 그들이 인물과 연줄을 통한 ‘습관의 정치’를 버리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정책이란 선거 때만 되면 글줄께나 읽었다는 명망가들이 모여 앉아 급조해 내는 말의 성찬일 뿐이다.

    만약 그들이 정말 정책선거를 바란다면 선출된 정치인들이 4년 내내 있어야 할 곳은 ‘거리와 시장’이어야 하다. 선거 기간 2주간이 아니라 임기 내내 거리와 시장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스스로 정치적 주체로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정치인들을 감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국민들은 정책을 토론하고, 정책에 기반 해서 대표를 뽑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된 정책은 4년을 훨씬 넘어선 장기적인 전망과 기획 아래 제시되어야 하며, 그것의 실현을 위해 요청되는 자원을 주권자인 시민에게 배분하여 정치의 주체로 만들 수 있는 계획을 담고 있어야 한다.

    화려한 말의 성찬을 정확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각 정당이 가진 기획과 비전과 맞추어 보아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표를 달라고 하는 정치인들 중 그 누구도 그런 의도도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지방선거64

    출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진보정당의 몰락, 왜?

    이번 지방선거가 4년 전의 그것과 다른 점도 있다. 진보정당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이번 선거에서 진보정당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였으며, 보이지만 의미 없는 세력이었다.

    이미 선거 전 세월호 정국에서부터 진보정당의 공백이 크게 느껴졌다. 여러 개로 쪼개진 진보정당의 명망가들의 논평은 있었지만 의미 있는 세력으로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선거결과는 더욱 처참하다. 광역의원의 경우 통합진보당이 전국적으로 114명, 정의당이 12명, 녹색당은 3명을 후보로 세웠지만 한 명도 당선되지 못했다. 노동당은 68명 중 단 한명이 당선되었을 뿐이다. 기초의원의 경우 통합진보당은 255명 중 31명, 정의당이 94명 중 10명 당선되었다. 신선한 도전을 시도한 녹색당은 기초의원 후보 7명 모두 낙선하는 시련을 겪었다.

    그나마 노동당이 기초의원 출마자 25명 중 6명이 생환한 것이 가장 좋은 성적이다. 초라하기 그지없다. 왜 진보정당이 이렇게 몰락할 수밖에 없었을까?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자.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부정과 부패의 근원은 우리가 흔히 ‘풀뿌리’라고 부르는 부와 권력 사슬의 말단에 자리 잡고 있는 ‘그들’만의 철옹성에 있다. 지금까지 지역정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근거는 중앙의 정치는 크고 강력해서 공략하기 어려우니 풀뿌리로부터 새로운 정치를 실현하자는 것이었다.

    이 주장은 반만 맞는 말이다. 지역은 중앙의 그것보다 더 강력하고 더 끈끈하게 유착된 기득권집단이 똬리를 틀고 않아 권력과 부를 공유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부정하고 부도덕한 권력의 단단한 기초를 제공하는 것이 지역인 것이다.

    그래서 지역은 ‘악’인 중앙에 반대되는 ‘선’이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사회를 바꾸기 위해 지역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이 반은 진실인 것은 바로 이 기초에 ‘또 다른’ 정치의 뿌리를 내리지 않고서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지역 정치를 ‘풀뿌리’ 정치라고 부른다. 풀뿌리가 상징하는 것은 다양성과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다. 이런 의미라면 한국의 지역정치는 ‘풀뿌리’ 정치가 아니라 기득권이라는 거대한 거목을 지탱하는 ‘나무뿌리’ 정치라고 해야 한다. 한국사회를 민주적으로 개조하는 정치가 그 뿌리를 파고드는 수 없이 많은 ‘잡초’들의 뿌리 내림이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식적으로 잡초들이 거목의 뿌리를 파고들어 그것을 쓰러트리는 것은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을 좌절하게 하고 분노하게 하는 현실을 직시할 때, 잡초뿌리에 의한 거목의 고사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정의와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동의해 주는 것이다. 착취와 억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상식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착취와 억압에 도전하거나! 이것 말고 선택지는 없다.

    ‘잔뿌리’ 정치로는 대안이 안돼

    하지만 한국 정치 현실에서는 ‘풀뿌리 내리기’를 시도하는 진보정치조차 나무뿌리에 기생하는 ‘잔뿌리 정치’로 전락하고 만다. 풀뿌리로 나무뿌리를 이길 수는 없다는 비관주의와 당장 가시적인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조급증은 ‘풀뿌리 정치’가 아닌 ‘잔뿌리 정치’를 추구하게 한다.

    지역운동은 나무 주변 이곳 저것에 제멋대로 자라고 있는 무수히 많은 풀들을 보지 못한 채 나무뿌리에 붙어 잔뿌리로 생존하려 한다는 것이다. 거대한 나무가 수분과 영양분을 빨아들이는 토양과 얕지만 거기에 뿌리 내리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잡초들의 힘은 거대한 나무를 쓰러뜨릴 수 있는 잠재적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지역 기득권연합의 나무뿌리 정치는 대지 위로 뻗어나 있는 나무줄기에 영양분과 수분을 공급한다. 문제는 나무뿌리를 통해 영양분과 수분을 빼앗기고 있는 토양이 바로 그 나무를 지탱하고 있으며 주변의 잡초들은 영양분과 수분의 아주 적은 부문만을 나누어 쓸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지역주민들은 지역 기득권 동맹의 착취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지탱하는 토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지역주민은 집합적인 행위자로 권력의 토대가 되지만 개인으로 돌아가면 권력의 희생양이며 착취의 대상이 된다. 다른 한편 지역 주민들은 집합적으로 지역공동체의 대의에 동의하지만 일상의 개인으로 돌아가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주체가 된다.

    ‘당연시 되는’ 기존 질서 아래서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원된 사람들은 새누리당-새정치민주연합의 기득권 동맹을 지지한다. 그들의 이해관계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지만 기득권 동맹의 나무가 넘어지면 자신들의 생존마저 위협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지지의 대가로 돌려받는 것은 더욱 강력해진 기득권 동맹이며 그것은 더욱 많은 양분과 수분을 빨아들인다. 사람들은 ‘당연한 질서’로 받아들여지는 보수정치의 이데올로기적 공모자인 동시에 현실적 피해자인 것이다.

    정치의 장에서 공모자-피해자인 보통사람들이 경제적 영역에서는 또 다른 분열증에 시달린다. 개별적 주체로서 사람들은 지극히 이기적인 행위자가 되어야 한다.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행위자만이 능력 있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합적으로 이들은 경쟁보다는 협동과 연대를 갈망한다. 경쟁의 압력은 개별로 파편화된 주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기 때문이다. 항상 패배자로 전락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현실의 이기적 주체와 공존하기 어려운 이데올로기적인 연대성을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체계로부터 착취 받고 억압받지만 자본주의적 실천을 통해 이 체계를 재생산하는데 동참하고 있다. 체계를 유지하는 정치에 집합적으로(이데올로기적으로) 동원되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적 열망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분열증적 주체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권력의 희생자임을 깨닫고 권력에 저항하는 집합적 주체가 되는 것이며, 개별적 주체로 파편화시키는 자본주의적 질서에 맞서 동료인간들과의 공통의 경험을 통해 주체의 서사적 통일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뒤집음’은 공통의 체험과 실천을 통하지 않고서는 성취될 수 없다. 지역정치(local politics)는 공모자-피해자로부터 저항적 주체로 전화할 수 있는 공통의 체험과 실천을 가능하게 한다.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세월호’는 한국사회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들’이 ‘우리’와 얼마나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지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국민의 80% 이상이 이런 사고는 다시 발생할 거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체념하고 있는 것이다.

    현실의 체험은 자본과 그것과 결탁한 권력을 적대적인 대상으로 인식하지만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변하지 않는 고정된 것으로 가정된다.

    집합적 주체로서 국가권력과 탐욕스러운 자본에 분노하지만 개인의 삶으로 돌아오면 하루하루 먹고살기에 바쁜 일상인으로 이웃을 밟고 올라서야만 하는 자본주의적 정글의 동물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이 다시 지역정치를 말해야 하는 이유이다.

    자본과 권력이라는 나무의 뿌리에 기생하는 잔뿌리가 아니라 나무뿌리를 고사시킬 수 있는 다종다양한 잡초가 더 넓게 더 깊이 토양에 뿌리내리게 하는 지역정치를 주장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지역정치에서 억압과 착취의 경험은 고립된 개인의 경험이 아닌 집합적 체험이 되고, 그럼으로써 우리 안에 내재화된 자본의 논리를 넘어서 잊힌 연대의 정서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회복된 연대의 정서는 고립된 개인으로 느껴야 하는 분노와 좌절의 내적 에너지를 공적인 정치적 실천으로 끌어 낼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착취와 권위주의적 권력구조를 변형시킬 수 있는 정치적 힘을 축적할 수 있게 한다.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국가권력과 극도의 긴장을 부과하는 자본주의적 시장의 힘으로부터 생겨나는 분노와 좌절의 내적 에너지가 공적인 장에서 정치의 힘으로 전환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자살과 우울증 같은 자기 파괴의 길로 들어서거나 엉뚱한 곳으로 그러한 에너지를 표출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과 언어적 폭력은 희생자가 또 다른 희생자를 공격하는 일상의 파시즘적 증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은 이러한 분노와 에너지를 뒤틀린 소비주의적 욕망으로 변형시켜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잠식한다. 불행히도 한국사회는 국가와 시장이 만들어낸 분노와 좌절을 공적인 장의 정치로 전환시킬 통로를 가지지 못한 채 높은 자살률, 사이버공간에서 일상화된 타자에 대한 공격과 폭력, 성장과 소비의 파괴적 신화에 붙들려 있다.

    이런 조건에서 우리는 말하고, 대화하고, 비판하고, 체험할 수 있는 정치의 장이 필요하다. 누군가가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우리를 억압하지 않는, 민중과 진보의 이름으로 우리를 대표하겠다고 주장하지 않는, 그래서 우리가 우리 스스로 안으로 쌓여가기만 하는 부정적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공적’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누구의 책임일까?

    ‘부정적’ 에너지의 ‘긍정적’ 표출의 첫 번째 장애물은 권력과 자본, 즉 억압적 국가와 독점적 시장일 것이다. 하지만 권력과 자본은 처음부터 투쟁의 대상이기 때문에 결정적 장애물은 아니다. 부정적 에너지의 긍정적 표출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장애물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쌓여 있는 분노와 좌절의 에너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방전되게 하는 진보좌파의 무능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다시 ‘세월호 참사’를 언급할 수밖에 없다. 2014년 4월 16일 이후 한 달간의 체험은 한국사회의 문제점들을 모조리 보여주었다. 기득권 집단이 얼마나 부정의하고 부패해 있는가, 국가와 국민을 이야기하지만 어떻게 공적 제도를 통해 ‘그들’끼리의 사적 이권을 나눠먹고 있는가가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세월호 침몰이라는 우발적 사건이 민주주의 국가라는 이데올로기 속에 감추어졌던 권력과 자본의 속살을 여지없이 드러낸 것이다.

    이제 ‘세월호’는 우발적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눌려 있던 분노와 좌절의 에너지가 개인적 자기 파괴와 타자에 대한 파시즘적 공격이 아닌 국가를 향한 목소리로 모아질 수 있는 잠정적인 결절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세월호’가 파편화된 좌절과 분노의 경험이 ‘등가인 연쇄’의 상징적 중심으로 원초적인 연대의 감정을 되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쇄는 대단히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5월 9일 안산의 고등학생들이 촛불집회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지방선거가 치러지고 월드컵이 시작되면 ‘세월호’라는 상징은 우리의 기억 속에 희미한 윤곽으로만 남게 되고 서서히 잊힐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연쇄는 소비자와 유권자로 호명하는 자본과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영향력 아래 파편화된 주체들이 분노와 좌절의 에너지를 잠정적으로 모아내는 것을 가능하게 했지만 여전히 분노와 좌절이라는 부정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정치의 긍정성은 파괴나 해소가 아니라 창조를 의미한다. ‘나’의 파괴와 ‘타자’의 부정이 아닌, 그리고 절규를 통한 일회적인 해소 또는 배설이 아닌 현실의 물적 운동을 통해 새로운 대상을 만들어 내는 정치를 가리킨다.

    세월호 참사에 앞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고의 위험을 경고했다. 하지만 국가의 관료들과 자본가들은 그러한 경고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사고 현장에서 희생자 가족들과 진도지역 어민들은 구조방법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정부와 해경은 역시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알리는 것조차 국가의 권위에 도전하고 공공질서를 위협하는 것으로 느낄 만큼 기존 질서의 치부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상황에 대해 청와대와 정부부처, 대통령과 특정 정치인들을 비난하고 그들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에 머문다면, 그리고 선거를 통한 ‘정권 심판’이라는 공허한 구호에 휩쓸려 투표장의 표찍기에 만족한다면, 종국에는 지방선거와 월드컵을 거치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면, 분노와 좌절의 부정성을 결코 넘어서지 못하고 ‘해소’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부정적 해소가 아닌 긍정적인 창조는 어떤 것일까?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관료의 손으로 관료제도를 개혁할 수 없다면, 규제완화가 참사를 불러왔지만 정부는 여전히 그것을 추진하고 있다면 ‘그들’에게 우리의 생명과 안전을 맡길 수 없다.

    그렇다면 정부의 정책결정 과정이 국민들에게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함을 요구해야 한다.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보장된 민주적 참여와 감시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적 참여가 ‘선언’으로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민주적 참여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정보와 자원의 급진적 재분배가 보장되어야 한다.

    만약 이렇게 ‘당연한’ 주권자의 권리요구에 반대하는 집단이 있다면 그들은 ‘민주주의의 적’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그들’이 적으로 규정될 때, ‘그들’이 터하고 있는 현행의 제도는 투쟁의 대상으로 된다. 제도 안으로부터 제도의 확장을 요구하는 운동은 제도의 틀을 넘어 체계의 성격을 둘러싼 사회적 실천으로까지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체계의 성격을 둘러싼 적대의 선이 명확해지면 질수록 ‘우리’를 묶어주는 연대의 힘은 더욱 강력해 질 수 있을 것이다.

    우발적으로 드러나는 체계 자체의 균열만으로는 부정적인 힘으로써의 좌절과 분노의 에너지가 창조적인 정치적 실천으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분노와 좌절의 에너지가 체계의 균열과 만날 때, 민주주의라는 이상과 현실의 착취 사이의 간극이 체험될 때 그 에너지가 제도 안으로 넘쳐 들어갈 여러 갈래의 길이 있어야 한다.

    비록 그 길들이 잘 닦인 넓고 평탄한 길이 아닐지라도 솟구치는 에너지가 방향 없이 흩어져 공기 중으로 사라지지 않고 흐를 수 있는 통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람시라면 이것을 ‘진지’라고 불렀을 것이다.

    진보정당은 이러한 길을 닦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진보정당은 ‘우리’의 길을 내기보다는 제도 안의 대로를 달리는 자동차에 올라타려는 시도를 반복했다. 제도 바깥의 에너지가 제도의 외벽 사이에 뚫린 구멍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목격할 때마다 그것을 자기 자동차의 연료로 공급받을 궁리만 했다.

    제도의 철옹성은 그 정도의 작은 균열로는 무너지지 않는다. 이미 준비된 수많은 작은 침투로가 없이는 예기치 못한 균열은 손쉽게 수리된다. 그리고 잘 닦인 대로를 달리는 자동차는 진보정당을 일상의 분노와 좌절로부터 격리시킨다.

    진보좌파 안에는 제도 안의 대로를 추구하는 집단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시도가 결국에는 체제 안으로 흡수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면서 ‘혁명’의 깃발을 높이 세우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들의 선택은 제도의 철옹성 바깥에 깃발을 꽂고 그것을 지키는 것에 몰두하는 것일 뿐이다. 때때로 맨몸으로 성벽을 기어오르는 ‘용감함’을 보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눈에 띠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우발적인 계기에 의해 드러나는 체계의 약한 고리와 항상적으로 존재하는 분노와 좌절의 에너지를 다양한 실천의 연대 구축으로 전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기존 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강력하게 작동하지만 적대와 모순은 완전히 감추어질 수 없기에 일상의 다양한 계기는 순간적이고 국지적인 저항의 계기들을 만들어 낸다. 국가와 시장이 결합된 자본주의적 구조가 가지는 힘은 자본주의적 주체를 형성해 내는 힘에 있다.

    착취와 폭력의 ‘피해자’인 사람들을 시장에서의 개별화된 소비자로, 국가권력 앞에 고립된 개별 시민으로 호명한다. 자본주의로부터 착취 받고 그것과 결합된 국가권력에 의해 억압받지만 체계에 동의하고 순응하게 만드는 것이다. 실존적으로 경험하는 적대는 문화적인 코드에 의해 현실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로의 복귀와 순응이 적대적 경험 그 자체를 소멸시키지는 못한다. 적대적 경험은 언제 어디서나 발생한다. 진보좌파의 역할은 이러한 순간이 순간으로 끝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과의 선거연대를 통해 약진했던 통합진보당은 자신들만이 옳다는 독선과 편협한 자기이익추구에 빠져서 진보정치의 저변을 확대하기는커녕 있는 기반마저 갉아먹어 버렸다. 아마 통합진보당은 이런 몰락의 원인을 박근혜 정권의 ‘독재’로부터 찾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통합진보당의 위기는 낡은 패러다임에 갇혀 있으면서 그것을 되돌아볼 수 있는 성찰능력을 가지지 못했고 ‘풀뿌리 정치’가 아닌 ‘잔뿌리 정치’로 기울었기 때문이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통합진보당이 가진 대표성에 의해 진보정치 자체의 불신이 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의당이라고 나을 것은 없다. 필자는 수년전 민주노동당으로부터 진보신당이 떨어져 나왔을 때 레디앙을 통해 스타 정치인을 앞세운 정치는 곧 당의 몰락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다시 진보신당과 분리하여 친노 세력과 합당했을 때 노회찬-심상정-조승수라는 명망가들(그들이 착각하는 것만큼, 즉 그들의 이름만으로 진보정치를 대표할 수 있을 만큼의 명망을 가진 것은 아니다)은 그나마 가지고 있었던 진보정치의 토양을 버리고 기득권 정치의 구석진 곳 썩은 나무 가지에 올라탄 것이다. 그 가지는 약한 바람에도 부러져 날아가 버릴 것이다. 토양과 풀뿌리를 포기한 정당에 ‘진보’의 수식어가 어울리기는 한 걸까?

    노동당의 몰락은 ‘처절하다.’ 기초의원을 6명 당선시켰다고 하지만 그 결과는 노동당이 아니라 후보자 개인이 일궈온 풀뿌리 정치의 성과일 뿐이다. 보이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 형체마저도 희미한 정당이 되어 버렸다.

    노동당의 몰락이 비극적인 동시에 희극적인 것은 민주노동당 분당파가 만들어 낸 ‘종북’이라는 말이 ‘반공’을 대체하면서 좌파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자들마저도 국가의 적으로 몰아붙이는 효과적인 프레임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소위 분당파가 ‘6년 전에 저지른 일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한다. 아마 지금의 통합진보당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옳았다!’고 외칠 것이다. 무지와 자아도취의 결합이 불러온 비극적 결과는 쓴 웃음을 짓게 만든다.

    한국의 진보좌파는 지역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도 풀뿌리를 내리기보다는 나무의 뿌리에 기생하려 하거나, 나무줄기에서 뻗어 나온 구석지고 왜소한 가지를 차지하는 것이 진보인 것처럼 착각 또는 오도하거나 주변의 잡초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고립되어 고사되어 가는 한

    송이 꽃이 되고 싶어 한다. 분노와 좌절의 부정적 에너지가 긍정적 에너지로 표출되는 것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장애물이 진보좌파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 기회?

    단체장과 지방의회 선거는 여전히 강력한 나무뿌리 정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불만과 좌절이 제도를 가로지르며 관통할 수 있는 작은 길이 없는 조건에서 국민의 선택은 투표를 포기하거나 기존 정당에 표를 던지는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교육감 선거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세월호 사고가 우발적으로 한국사회의 모순을 드러내 주었듯이 사람들의 불만과 좌절이 우발적으로 진보교육감 압승으로 나타난 것이다.

    ‘우발적’이라는 것은 하나의 사건을 하나의 원인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에 세월호참사의 불만과 좌절이 곧바로 교육감 선거의 결과로 드러났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선거과정의 돌발적인 변수들이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중요한 것은 누구도 이러한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준비된 상태에서 지금의 상황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발적이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직면한 상황이지만 진보좌파에게는 새로운 전기가 될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가장 큰 불만을 가지고 있는 교육문제에서 진보는 이상적이거나 원칙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다움’이라는 당연한 가치, 실현가능한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가시적인 결과를 통해서 실현 불가능한 것은 ‘저들’의 이익과 가장 기본적인 인간다움의 공존이라는 것을 보여 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시적으로 드러날 진보적인 교육정책의 성과는 그람시적 의미의 진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진지 구축은 수많은 작은 길들을 닦는 것이다. 이러한 길닦기는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들 없이는 불가능하다.

    앞으로 4년 동안 교육청은 교육과 관련된 자원, 정보, 지식을 학생과 학부모에게 나누어 주어 이들을 정치의 주체로 만들면서 제도정치 안에 저항의 에너지가 흐를 수 있는 작은 길들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민중의 정치 주체화이며 국가의 민주화인 것이다.

    바램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언론에서 ‘진보’라고 수식어를 붙이는 교육감들이 얼마나 ‘진보적’인지, 즉 교육을 교육제도의 민주화와 학생과 학부모의 정치주체화의 장으로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것이 진보좌파가 가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이다. 진보좌파는 이제 기득권 세력의 ‘나무뿌리’ 정치에 기생하는 ‘잔뿌리 정치’를 벗어나 ‘풀뿌리 정치’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스타정치인에 의존하거나 거대정당과의 선거연합에 의해 ‘진보’정치를 확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한다. 제한된 진보좌파의 입지를 서로 차지하려는 ‘자기소진의 정치’도 넘어서야 한다.

    우리의 조건은 여전히 비관적이다. 하지만 비관적인 현실을 ‘비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기파괴의 충동으로 귀결될 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낙관이 필요하다.

    의지의 낙관은 비관적인 현실에서 생겨나는 불만과 좌절의 에너지가 진보정치로 발현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나오기에 실제적이다. 우리는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분석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현실은 우리를 견딜 수 없게 하고 그래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계속>

    필자소개
    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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