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권리'와 '동정'사이
    [끝나고 쓰는 노점일기] '노점상답다'는 것의 폭력성
        2014년 06월 09일 12:40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물통 이야기가 아니다.

    노점을 하러 출발. 승용차로 금천까지 간다. 시흥 홈플러스 옆길로 600미터 정도 들어가면 금천노인종합복지관이 있다. 그 앞에 넓은 공영주차장이 있는데, 여기에 차를 주차한다. 워낙 외진 곳이기에 주차비는 한 달에 4만원.

    차를 세우고 트렁크에서 접이식 파란 손수레를 꺼내어 짐을 옮긴다. 얼린 물 두세 개와 충전한 밧데리 그리고 오뎅다시와 다듬은 파, 삶은 달걀 등 집에서 준비해 가야 하는 것들. 간혹 전날 마차 정리를 못하면 떡볶이 판을 집에 가져가서 씻어오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떡볶이 판이 추가.

    대부분의 그날 쓸 물건은 재료상에서 마차에 넣어주고, 물통은 전날 물을 떠서 마차 뒤에 두고 오기 때문에 많은 짐은 아니나 들고 갈 수 있는 수준도 아니다. 밧데리와 얼린 물의 무게가 제법 나가기도 하지만 내가 꼭 손수레를 이용하는 것은 밤의 일을 위해서다.

    저녁 물 뜨기. 물통을 옮기기 위한 미션을 위해서.

    하루의 일이 끝나고 마차 정리를 마치면 물을 뜨러 갈 차례이다. 빈 물통 네 개. 무게야 새털 수준이지만 부피가 커서 주차장까지 옮기는 데에는 손수레가 필요하다. 세 개는 눕혀서 손수레에 묶고, 한 개는 들고 간다.

    600미터를 걸어 주차장에 가서 빈 물통을 차에 싣고 소하동에 있는 약수터로 향한다. 약수터 조금 밑 공터에 차를 세운다. 길이 좁기 때문에 약수터 바로 옆에 차를 세워두기 애매하다. 물을 뜨는 동안 다른 차가 오면 차를 옮겨줘야 하기 때문이다.

    차에서 말통 4개와 얼려야 하는 2리터짜리 물통 4개를 꺼내 약수터에서 물을 받는다. 물을 받고 나면 물통은 두고 다시 차로 간다. 차를 물통 있는 곳까지 옮긴다. 물통을 차에 싣는다.

    사진 576

    나의 악명 높은 물통^^

    나는 노점하기 전까지 12년 동안 똥색 마티즈를 몰았다.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모두 기억할 매우 너덜너덜한 외양의 차였는데, 이 차가 기특하게도 엄마가 탔을 때 퍼져버리는 바람에 가족들이 돈을 모아 중고차를 마련해 주었다.

    중고차이기는 했지만 나름 준중형이었고 매끈한 외양의, 새 차 티가 제법 나는 아반떼이다. 차를 바꾸고 얼마 되지 않아 노점을 시작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애지중지 차를 몰던 터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물통을 트렁크에 실었다. 물통 하나에 20kg의 무게가 나간다. 네 개의 물통을 번쩍번쩍 들어 트렁크에 세워놓고 금천으로 돌아와 열어보니. 물통 네 개가 주르르 쓰러져 있다. 그 중 하나는 뚜껑이 열려서 물이 모두 쏟아져 있다.

    나는 다시 약수터로 간다. 차를 세우고, 물을 뜨고, 차를 다시 옮기 기전. 트렁크를 아래 비상타이어가 보관되어 있는 움푹한 곳. 그곳에 찰랑거리는 물을 퍼내야 했다. 수건으로 적셔서 짜는 방법으로 한시간 가까이 물을 빼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산 밑이라 공기는 좋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밤공기만 잔뜩 마시기 위해 노력했다. 물을 짜내면서.

    어쩔 수 없이 뒷좌석에 물통을 싣기 시작했다. 20kg의 물통을 들어 바닥에 두 개 의자에 두 개를 대충 실었다. 금천에 돌아와보니 물이 출렁이면서 새어나와 의자가 젖었다. 그래도 쏟아지진 않았다.

    나는 며칠이 지나서야 물통의 물을 입구까지 가득 채워야 물이 출렁거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물이 샐까봐 가득 채우지 않은 것이 오히려 화근이었다. 또한 물통이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할 방법이 필요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서 운전석을 당기고 두 개를 꼼짝 못하게 고정시키고 의자에는 큰 쟁반을 두어 수평을 맞춘 뒤 세로로 하나 가로로 하나 싣고 다니는 나름의 노하우(?)를 터득했다.

    이제 물통을 마차에 갖다 두어야 한다. 차를 마차에서 50미터 정도 떨어진 뒷골목에 세운다. 파란 손수레를 꺼내어 물통을 두 개씩 올려 옮긴다. 물이 꽉 찬 물통의 면은 둥그렇고 미끈해서 묶어야만 한다.

    그런데 얘를 묶는 것이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끈 양쪽이 갈퀴처럼 되어 있어 수레 세로면에 걸어야 하는데 나는 이게 잘 안 된다. 처음에는 멀지 않으니까 묶지 않고 조심조심 간다는 것이, 마차 바로 앞 건물 들어가는 주차장의 경사로에서 물통이 쓰러져 버렸다. ‘펑’소리와 함께 물통의 물이 쏟아졌다. 아……. 마음 같아서는 경사로로 흘러내리는 물을 쓸어 담고 싶었다. 다시 물을 뜨러 가야 한다…….

    밤에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빗물을 받는 게 훨씬 수월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간혹 저녁에 약수터에 가지 못하는 날이 있다. 아침의 약수터는 자정 가까이의 약수터와는 아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약수터 한켠에 야채 파는 아주머니가 상추며 마늘이며 파 등을 팔고 계셨다. 물 받는 사람들도 많다.

    오전에 약수터를 다녀오면 시간도 많이 걸리지만 무엇보다 차가 문제다. 밤에 세우던 골목에도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공영주차장까지 갔다. 손수레로 물통을 옮겨야 한다. 손수레에 물이 가득 든 물통은 2개밖에 옮길 수 없으니 한번을 더 갔다 와야 한다. 그러기엔 ‘600미터’였다.

    머리를 썼다. 물통 하나를 포기했다. 청소를 간단하게 한다면 물통 3개로 그날의 장사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물통 두 개는 손수레에 묶고, 하나는 들었다. 20kg 물통이다.

    무식하면 몸이 고생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이 날은 마차를 펴기도 전에 지쳐 버렸다.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게 뭐냐고 물으면 나는 물통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 다음 싫은 게 뭐냐고 물으면 나는 또 역시 물통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럼 세상에서 제일 미운 건 뭐냐고 물으면 나는 더욱 큰 목소리로 물통이라고 답할 것이다……. 나는 물통이 정말 미웠다.

    자동차 이야기이다.

    물통을 쏟지 않고 차에 싣는 방법은 일주일 안에 터득했으나 물통을 마차까지 옮기는 일은 늘 피하고 싶은 과정이었다.

    사실 차를 가져와서 마차 앞에서 빈 물통을 싣고, 물을 떠서 마차 앞에 차를 세우고 물통을 내리면 끝나는 일이다.(이것도 아주 쉬운 일은 아니다) 주차도 마차 바로 건너편 홈플러스에 세우면 그만이었다. 시흥 홈플러스는 주말을 빼고는 주차비를 받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최대한 멀리 차를 세우고, 가능하면 사람들이 내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80kg의 물통을 600미터를 옮기는 몇 달 동안 누군가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면, 나는 조금 더 일찍 이 무식한 행위를 중단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지 내 입으로 이야기하고, 정말 그렇다는 대답만 들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나는 단지 한 가지 이유로 묵묵히 물통을 옮기는 일들을 기꺼이 해냈다.

    ‘노점상답기 위해서’

    내가 자주 지나다니는 한 아파트 단지 앞에는 야채를 바구니에 담아 파시는 할머니가 있다. 상추며 고구마며 다듬은 야채 등을 이것저것 바닥에 늘어놓고 파는 분이다. 저녁이 되어 이 할머니가 장사를 접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까만 중형차가 와서 남편으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정리한 물건을 트렁크에 싣고 있었다.

    나는 까만 중형차가 거슬렸다. 내가 아는데. 차가 없으면 그 물건을 어떻게 옮기며, 물건은 어떻게 떼어오겠는가 말이다. 그런데도 그 미끈한 중형차의 까만색이 거슬렸다.

    운전을 하시는 할아버지나 장사를 하는 할머니나 새카맣게 탄 얼굴에 주름이 가득했고, 복장도 그 얼굴에 어울렸다. 노점과는 어울리고, 까만 승용차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미친년. 노점상은 처음부터 얼굴에 노점 한다고 쓰고 태어나나.

    2004년 최저생계비로 한 달 나기 체험을 한 후기를 본 적이 있다. 거기에는 한 달 생활비에 대한 가계부가 적혀있었는데, 대학생 체험단 중 500원을 주고 비디오테이프를 대여한 것이 적혀 있었다. 다른 가구의 여학생은 3000원을 주고 헤어젤을 샀다.

    이 가계부를 보고 달린 댓글 중에 무시무시한 글들이 있었다. 돈이 없으면 주제에 맞게 살아야지, 무슨 영화를 보고 헤어젤을 바르냐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나는 그런 시선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초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지금까지 ‘여자답지’못하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부터는 범죄자들을 ‘노숙인 차림의 복장’이라고 언급하는 언론과, 장애인에 대한 시혜와 동정 이외에는 한 치도 양보되지 않는 시민의 권리를 보아왔기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할 것이다. 옷을 사러 가거나, 신발을 사러 가거나 미장원에 갈 때 우리는 엉망인 모습으로 가지 않는다. 내 모습으로 수준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싸구려 신발을 신고 가면, 그런 수준의 신발을 권한다. 후줄근한 차림으로 옷가게에 가면 별로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그렇게 미장원에 가면 그에 어울리는 머리가 되어 나온다.

    이 사회는 계속 사람들을 나누어 규정하고 그에 걸맞게 살라고 강요하고 있다. 가난하면 가난한 사람답게. 노점상이면 노점상답게. 주제에 맞게.

    왜 그랬냐고?

    나는 사람들의 동정이 필요했다. 동정은 곧 묵인이고 인정이었다.

    사람들은 동정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해 쉽게 관대해 진다. 자신이 직접적으로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더라도 동정해주는 것 자체가 미덕이 된다. 거기까지이다. 동정은 어느 순간에 ‘ 거지근성’이라는 손가락질로 돌아오기 일쑤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노점상에 대해서 사람들은 쉽게 동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세금을 안내고 돈을 버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화풀이의 대상으로 언제든지 신고해버릴 수 있는 것이 노점의 현실이었다. 권리? 나의 생존권은 결국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동정과 그에 따른 묵인에 달려 있었다. 시혜와 권리 사이의 절묘한 균형감각 따위는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자동차가 없으면 먹거리 노점을 할 수 없다. 아주 조금만 생각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당연한 현실이 ‘노점상답지 않다’는 시선 앞에서는 현실이어서는 안 되는 현실이었다.

    노점을 하면서 내가 부정했던 시선이 내게도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나는 그러한 시선에 대해 순응했으며, ‘노점상답기’ 위해 ‘여성답지’ 않는 힘을 발휘하여 물통을 옮겨야 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내 외모가 퍽 노점상다웠다는 것이랄까.

    필자소개
    전직 잉어빵 노점상. 반빈곤 사회단체에서 활동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