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사회의 진보적 변혁을 위하여"
    반신자유주의 민주혁명, 사회주의 지향성과 고전적 케인즈주의 결합
        2012년 06월 23일 06:5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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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래의 글은 김세균 서울대 교수가 민교협 등 교수 4단체가 6월 22일 개최한 “2013체제와 진보적 변혁의 길 – 그 대안과 정책 1차 토론회”에서 발표한 기조발제문입니다. 김세균 선생은 이 글을 통해 현재 한국 진보좌파운동의 재결집과 새로운 출발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김세균 선생이 레디앙에 보내온 이 발제문의 전문을 싣습니다.(편집자)

    (1)

    주지하다시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오늘날 중대한 전환기에 처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세계자본주의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심각한 위기국면에 처해 있습니다. 이 위기국면은 아마도 미국 헤게모니 하에 조직된 전후 세계자본주의의 최종적 위기국면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의 세계적 헤게모니의 쇠퇴는 피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있고, 중국이 G2로 부상하고 있으며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가 산업적 축적의 세계적 중심지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응해 미국 대외정책의 초점이 중국을 견제하는 데에 모아지고 있습니다. 미국은 인도와 아세안 국가들과 군사적 협력을 강화하고 한미일 군사동맹을 중국 견제를 위한 새로운 동맹 차원으로 격상시키는 등 ‘아시아로의 귀환 정책’을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맑스코뮤날레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는 김세균 선생(사진=참세상)

    그런 가운데 국가재정 위기의 형태로 폭발한 유럽의 경제위기는 그 약한 고리인 그리스 등을 파산상태로 내몰고 있으며, 유럽의 경제위기가 세계로 확산되면서 1930년대의 경제공황을 능가하는 세계적 규모의 대공황이 조만간 발생할지 모르는 긴박한 정세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밀려오는 세계 경제위기의 쓰나미가 이미 위기 폭발의 뇌관을 안고 있는 한국을 강타할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신자유주의 세계화 및 그것이 야기한 금융공황과 국가재정 위기 등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파탄으로 내몰리면서 자본의 신자유주의 공세와 초국적 금융자본의 탐욕 및 국가의 긴축재정 정책 등에 대한 대중들의 항의가 세계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현 시기는 ‘대중의 반역’이 눈부시게 진행되고 있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런 운동의 시발점을 제공해준, 작년 중동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서 일어났던 민주화 운동은 반신자유주의 운동의 성격을 내장하고 있었습니다. 이 운동은 이후 지구적 수준에서 전개된 ‘Occupy 운동’으로 이어졌으며, 현재는 그리스 등지에서 대중운동의 폭발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런 운동이 유럽에서만이 아니라 늦든 빠르든 세계 전역에서 저항운동을 한층 더 촉발하는 계기가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총괄컨대, 미국 헤게모니 하에 조직된 전후 세계자본주의체제는 오늘날 확실히 숨을 거두고 있지만, 이 체제를 대신하여 어떤 새로운 세계체제가 등장할 지는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오히려 미래의 불확실성이 갈수록 더 커지고 있는 것이 우리 시대의 특징입니다. 아마도 상당히 긴 기간 동안 각국 지배층들 간의 갈등이 격화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기 위한 세계 민중들의 저항과 이런 저항을 저지하려는 자본과 각국 지배층의 반동적 시도들이 갈수록 격렬하게 부딪칠 것이 틀림없습니다.

    (2)

    이런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위해 노력해야 할까요? 우리는 먼저 현 시기에 전개되고 있는 세계 민중의 투쟁이 기본적으로 ‘반신자유주의 민주혁명’을 성취하려는 투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날 인류가 처한 지구적 수준의 거대한 사회적 재앙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체제가 만들어내고 있는 환경재앙의 극복과 더불어) 반신자유주의 민주혁명의 성취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며, 이 점에서 반신자유주의 민주혁명의 성취야말로 진보적 변혁을 바라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힘을 합쳐 성취해 내야 할 우리 시대의 가장 절박한 당면과제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그런 혁명을 성취해 낼 객관적 조건들이 성숙하고 있고 대중의 잠재적 역량이 증대하고 있지만 그 혁명을 성취해 낼 정치적 역량이 최하점으로 떨어진 역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비정규직의 양산과 이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의 가중, 청년실업 50%와 자살률 (특히 청년 자살률) 세계 1위, 날로 심화되는 소득양극화와 가계부채의 급증 등이 대중의 삶을 파탄으로 내몰고 있는 가운데 체제에 대한 대중의 불만은 누적되고 있고, 이 누적된 불만이 언제 어떻게 폭발할지 모르는 지극히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정세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주체적 역량과 관련하여 반신자유주의 투쟁에 나설 대중의 잠재적 역량은 비약적으로 증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중의 불만과 저항을 반신자유주의 혁명의 동력으로 전화시킬 정치적 역량은 현 시기에 이르러 최하점으로 떨어진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먼저 오늘날 한국의 야당세력이 사회발전의 대안으로 제출하고 있는 이른바 ‘진보적 자유주의’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이 아니라 (노무현 정권 시대에 외혀려 후퇴한) 김대중의 ‘민주적 시장경제론’을 일정하게 업그레이드시킨 ‘신자유주의의 좌파적 버전’에 불과하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진보적 자유주의는 이명박 정권의 노골적인 신자유주의적 친재벌-친부자 노선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이지만, 이 노선이 제시하는 개혁의 내용들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신자유주의의 극복이 아니라 오히려 그 원활한 작동을 지향하는 프러젝트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들 자유주의자에게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모순과 그 모순이 몰고 오고 있는 경제위기 등에 대해 단호하게 맞서 대중의 생존권을 지키고 또 이를 위해 신자유주의체제를 극복하겠다는 분명한 의지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경제위기가 닥치면 현재 자신들이 내세우고 있는 개혁 정책들조차 상황 논리 등을 내세워 없던 것으로 내팽개칠 것이 분명합니다.

    한편 야당진영에 속한 사람들 중 일부는 스웨덴 식 구사민주의를 대안으로 제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구 사민주의체제가 전후 세계자본주의의 상승국면에 꽃필 수 있었고 강력한 노동운동과 노동자정당의 존재에 힘입어 출현할 수 있었던 점을 무시한 채 사민주의적 대안을 오늘의 자유주의적 야당이 선 듯 받아 안을 수 있는 정책적 대안 정도로 여기고 있는 듯 합니다. 게다가 이들은 (이전에 신자유주의 공세에 맞서 스웨덴 사민당 좌파세력이 ‘더 많은 사화화’를 요구했던 데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경제위기에 대응해 완전고용과 대중의 유효수효 창출을 통한 경제성장 및 보편적 복지체제와 같은 사민주의의 본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금융은 물론 주요산업과 대기업의 사회화/국유화 등을 추진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오늘날의 조건 속에서 반신자유주의 민주혁명은 노선 상으로 최소한 분명한 사회주의적 지향성과 결합된 고전적 케인즈주의 노선의 채택을 요구합니다. 자본주의가 상승국면이 아니라 하강국면, 그것도 하강국면의 최저점으로 치닫고 있는 오늘날 반신자유주의 민주혁명은 자본주의 극복 지향성과 분명히 결합할 때에만 성취될 수 있는 혁명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구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 및 통합연대가 주축이 되어 결성된 통합진보당은 대중들에게 진보정당을 대표하는 정당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진보적 자유주의의 좌파적 버전 이상의 노선을 제출하지 못하고 있는 데다가 이른바 민족주의 노선을 우선시하는 ‘자주파’와 그 속에서 자유주의세력이 가장 큰 분파를 형성하고 있는 ‘쇄신파’의 대립이 격화됨으로써 앞으로 진보정당다운 진보정당의 역할을 수행하리라고 기대하기 어려운 진보진영의 애물단지로 변하고 있습니다. 민주노총 역시 내부의 정파대립과 간부의 관료화 등으로 말미암아 힘 있는 대중투쟁을 전개할 능력을 잃은 지 오래됩니다. 이와는 달리 반신자유주의 민주혁명을 끝까지 밀고 나갈 잠재력을 지닌 진보좌파세력은 여러 정파로의 내부적 분열과 진보신당의 최근의 법적 해산 등으로 대외적으로 힘 있는 하나의 정치적 세력으로 자신을 등장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3)

    오늘날 한국의 진보정치 운동은 그 존립이 위태로울 정도의 유례없는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 위기는 단시일 내에 극복하기 어려운 위기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중이 자신의 ‘구원자’가 될 수 없는 ‘구원자들’에게 열광하는 것과 같은 현상들도 대거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다시 미리 예측할 수 없는 대중의 자생적 투쟁이 폭발할지라도 그 투쟁이 유의미한 정치적 성과를 내는 것을 가로막을 결정적 요인이 될 것입니다. 이런 사정들로 인해 한국이 반신자유주의 민주혁명을 ‘선도’하는 나라가 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론적 비관주의’에도 불구하고 저는 한국이 그 혁명의 대미를 장식하는 나라가 되길 바라며, 또 우리 한국사회가 그렇게 될 충분한 진보적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의지적 낙관주의’의 입장을 취하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한국이 밑으로부터의 대중 저항의 빛나는 전통을 지닌 나라이고, 또 사회를 변화시킬 밑으로부터의 동력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진보세력은 중장기적 전망을 가지고 우선적으로 진보정치의 재구성에 착수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진보정치의 재구성에 직-간접적으로 힘을 보탭시다. 그런데 저는 진보정치의 재구성이 ‘통진당의 쇄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통진당을 대체하는 새로운 좌파정당의 건설’을 통해서 이뤄져야 한다고 믿으며, 또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저의 이런 판단을 많이 공감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사실 다른 모든 것에 공감할지라도 정치적 결론까지 함께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결론까지 함께 함으로써만 우리는 사회변혁의 진정한 동지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새로운 좌파정당이 (노조간부들의 주도하에 이뤄졌고, ‘국민승리 21’ 운동으로부터 시작하여 민주노동당의 창당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의 분열을 거쳐 통진당의 창당에 의해 최종적으로 파탄 난 ‘제1의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와는 달리)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주축이 되고 누구보다도 비정규적 노동자들에게 깊이 뿌리내리는 ‘제2의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에 기초하여 제 진보세력들이 결집하고 ‘녹-적-보’ 연대 등을 실천하는 새로운 유형의 대중적 진보정당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와 관련, 우리 진보진영은 내부 분열을 극복하고 최근 제2당의 지위로까지 성큼 뛰어오른 그리스의 ‘급진좌파연합(SYRIZA)’의 사례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 진보세력이 성취해 내야 할 과제는 새로운 좌파정당의 건설만이 아닙니다. 진보운동은 모두 정당운동으로 환원될 수 없고, 또 환원시켜서도 안 됩니다. 진보운동이 대중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진보정당이 허브 역할을 맡는 가운데 정당운동에 대해 상대적 자립성을 지닌 노동자들의 현장투쟁은 물론 진보적 사회운동과 학술-문화운동 및 진보적 지역운동과 생활운동들이 활성화되어야 하고, 이들 운동들 간의 전국적인 연계망이 구축되어야 합니다.

    진보운동의 성과를 정치적으로는 진보정당으로 모으는 가운데에서도 진보운동을 대중에 착근시키고 진보운동의 외연을 무한히 확장시켜 나가는 다양한 사회운동들의 활성화도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보적 학술운동의 경우 대중 획득과 대중의 급진화에 기여하는 구체적인 정책적 대안들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변혁을 위한 거시적-이론적 문제들에 대해서도 대결해 나가야 하며, 변혁을 위한 ‘고전적’ 주제들은 물론 노동자들의 내적 분화와 성적 차이, 계급-성-생태 등의 관련성과 같은 ‘현대적’ 주제들에 대해서도 적극 대결해 나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분과학문적 분할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타개하고 통합적 관점에서 사회변혁을 위한 이론-정책 생산에 적극 나설 필요가 있습니다. 민교협이 이런 일들을 성취해 나가는 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한국의 진보세력은 오늘날 지금 당장 무엇을 가시적으로 성취할 처지에 놓여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진보세력의 능동적 역할을 요구하는 시기가 앞으로 분명 2,3 년 이내로 도래할 것이라는 강력한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런 역할을 떠맡을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할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무엇보다 진보운동의 토대를 튼튼히 구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당장 어떤 성과를 내려는 조급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 조급함은 낡은 것들과의 결별이 아니라 타협으로 이끌 따름입니다. 급할수록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할 자는 오직 우리 자신들 뿐이다”를 온 몸으로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여러분, 끝까지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함께 전진합시다.

    필자소개
    서울대 교수. 진보교연 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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