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민주의의 기본소득 접근법
    [기고] '사회책임 기초보장'으로서 실현 가능한 전략 필요
        2014년 05월 22일 09:3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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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보진영 일각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기본소득제에 대해 사회민주주의자로서의 접근법을 고민하는 정강길 사회민주주의센터 교육국장의 기고글을 싣는다. 글의 분량 관계상 2회에 나누어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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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중루유(三重樓喩) 비유 -“1층을 지어야 2층을 짓고 3층을 지을 수 있다!”

    부처님 말씀에 다음과 같은 비유가 있다. 어떤 어리석은 부자가 어느 날 동네 목수에게 3층집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목수가 집을 짓기 시작하자 부자는 말했다.

    “나는 3층집을 지을 것인데 왜 1층을 짓고 있는가?”

    그러자 목수가 말했다.

    “1층을 지어야 2층을 짓고 그리고 나서 3층을 지을 수 있다!”

    하지만 부자는 계속 자기주장만 고집하여 결국은 어리석은 부자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필자가 이 비유를 먼저 말씀드리는 이유는 나 자신이 현재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라는 노선을 선택한 이유와 관련되기도 하면서도 동시에 <기본소득>basic income에 대한 본인의 견해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함축적인 비유로서 잘 대변해주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사민주의자로서 기본소득을 반기는 이유, 기본소득은 <경제 민주주의>에 기여

    나는 소신 있는 사회민주주의자다. 사회민주주의 스펙트럼 안에서도 크게 오른쪽형과 왼쪽형으로 나눈다면 나의 포지션은 <왼쪽형으로 가는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한다.

    따라서 필자가 표방하는 사회민주주의(이하 사민주의)는 현실 자본주의에서 출발하여 보다 이상적 도착지인 민주 사회주의에 안착하기까지 그 과정을 민주주의적으로 실현해나가려는 <과정으로서의 민주적 사회주의>에 가깝다.

    물론 나와 다른 사민주의자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사민주의를 민주주의를 통해 점진적인 사회주의 실현을 추구하는 이념 노선으로 본다면 필자가 추구하는 바는 이 정의에 영락없이 해당된다. 그럼에도 이 같은 사민주의에 대한 몇 가지 오해가 있다는 점도 알고 있기에 지면상 이에 대해선 따로 링크해두고자 한다.(관련 글 링크)

    여기서는 <사회민주주의적 기본소득제>에 대한 논의를 풀 것이다. 필자는 사민주의자인 비그포르스(Ernst Wigforss)의 말대로 너무 멀리 있는 유토피아보다는 그보다는 좀 더 가까이 있다고 생각되는 <잠정적 유토피아>를 바라고 있는 것뿐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예컨대 아나키즘 정도는 나에겐 1층이 아닌 좀 더 멀리 있는 3층쯤에 해당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삶의 자세로서는 유효하다고 본다.

    필자가 <기본소득>basic income에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 번째는 기본소득이 기존의 선별복지의 치명적 한계와 단점들을 극복할 수 있는 <철저한 보편복지>라는 점에서다. 이점은 이미 기존 사회복지학 연구에서도 기본소득제가 보편주의 원칙에 가장 근접한 소득보장제도로 널리 알려져 있는 바와도 궤를 같이한다(참고로 기본소득제의 보편성 정도는 소득기준과 인구학적 기준을 교차하여 복지제도의 보편성 정도를 분류한 사회복지프로그램을 통해서 보다 정밀하게 확인해볼 수 있다고 한다. 백승호, “기본소득 모델들의 재분배 효과 비교분석”, <사회복지연구>제41권 제3호, p.192. 재인용).

    알다시피 기본소득제는 대상자에 대한 자산심사 및 근로능력 유무를 따져 묻지 않고 누구에게나 지급하는 무조건성의 막강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적어도 현행 사회복지 프로그램보다 기본소득제의 소득재분배 효과가 훨씬 더 우월한 것으로 나온 연구 분석결과는 분명 고무적인 것이며, 게다가 이는 국내 연구만이 아니라 미국의 인구조사자료를 활용한 해외연구 분석의 경우에도 기본소득의 소득재분배 효과의 우월성 역시 입증된 바 있다고 하니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을 갖기엔 매우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보편복지에 관심하는 한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을 안 가질 순 없었다.

    두 번째 이유로는 기본소득이 기존의 임금노동 중심으로 설정된 노동 개념의 한계를 극복하고 비임금의 <그림자 노동>shadow work을 비롯해 모든 종류의 <몸일>momm’s work에 대해서 기본적인 보편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점은 어떤 면에서 전통적 복지국가론이 신자유주의에 의해 위기를 맞게 되면서 많은 복지정책들이 <워크페어>workfare로 전환되었으나 결국 심각한 사회적 격차의 현실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던 점이 있었고, 이에 대한 새로운 대안 사회복지 패러다임을 요구하는 측면과도 함께 맞물려 있다. 기본소득은 보편적 복지이지만 그 안에 어느 정도 노동 중심성을 상당히 탈피하는 점도 없잖아 있기 때문이다.

    다만 노동 유인에 있어 높은 기본소득은 노동 회피가 발생할 가능성 역시 높을 수 있다고 보지만, 적절하게 조정된 낮은 기본소득일 경우엔 그렇지 않고 오히려 더욱 생산적인 활력을 불어넣을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에 기본소득이 갖는 노동 유인의 연계성 문제도 결국은 ‘어떤 종류의 기본소득이냐?’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높은 기본소득>에 대해선 반대하는 입장이다.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사민주의자들 중에는 기본소득제를 은폐된 공산주의 정책이라고 힐난하기도 하는데 내게는 적어도 <어떤 기본소득이냐>가 중요한 것이지 기본소득 자체가 은폐된 공산주의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게다가 나 자신은 모든 걸 국가사회가 죄다 보장해주는 완전 보장제보다는 어차피 개인과 사회는 이미 존재론적으로도 관계되어 있기에 어느 정도 개인의 능력과 책임이 연관되는 사회책임 보장제를 주장하는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보는 기본소득은, 일단은 모든 종류의 몸일에 대해선 기본적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보편적 복지제도라는 점을 보다 분명하게 강조하고 싶다. 특히 모든 종류의 몸활동 중에서도 <사회에서의 기초 생존활동 보장>에 좀 더 가치 우선성을 둘 수 있다고 여겨진다.

    우선은 <생존>이 되어야 <생활>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활이란 <생존의 일상화>를 추구하는, 보다 만족스런 생존 여건의 조성에 해당한다. 따라서 기본소득은 모든 종류의 몸일에 대해 기본적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에 현재의 노동의 의미와 가치는 거의 임노동중심에 깊숙이 함몰되어 있는 형국이다.

    실제로도 우리 사회에서 임금노동만이 사회적 생산을 담당하고 있다기보다는 비임금의 가사노동 및 돌봄 노동을 포함하는 여러 종류의 <그림자 노동> 역시 사회적 생산을 담당하는 매우 중요한 한 축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그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지 못한 채, 오히려 <임노동 중심주의>는 그야말로 <그림자 노동>의 희생 위에 터를 잡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본소득의 경우는 임금노동과 비임금노동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으며, 기본적으로 모든 종류의 몸일에 기본적인 경제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기에 이는 일종의 <경제 민주주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쉽게 말해 <정치 민주주의>에서는 부자든 가난한 자든 대통령이든 일반 사람이든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1인 1표>를 부여하듯이 <경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서도 부자든 가난한 자든 대통령이든 일반 사람이든 모든 사람에게 동등한 <1인 1기초소득>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참고로 2014년 올해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의 논의 주제가 “Re-democratizing the Economy”이다. http://basicincome.org/bien 참조).

    만일 사회민주주의가 민주주의를 본질로서 추구한다면 이 역시 사회민주주의 정신과 취지에도 정확히 부합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어느 정도 <기초적인 보편적 소득>의 토대 위에서 자신의 차등적인 능력별 성과에 따른 <능력 소득>도 함께 도모하는 것이 나는 좀 더 낫다고 여긴다. 그런 점에서 내겐 선별복지보다 보편복지가 더 우선한다.

    개인이 자살을 하든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든지 간에, 알고 보면 전적인 개인의 책임이란 것도 없으며, 전적인 사회적 책임이란 것도 없다. 둘 다 반쪽씩 맞고 둘 다 반쪽씩 틀린 얘기일 뿐이다. 이미 개인과 사회는 분리될 수 없을 만큼 존재론적 지평에서부터 하나로 얽혀 있으며, 개인의 삶에는 언제나 그 사회가 함께 녹아 있는 것이다.

    이미 사회와 역사가 <신체화>embodiment되어진다는 사실은 최근 많은 사회과학자들도 심리학자들도 인지과학자들도 심지어 의학 전공자들 역시 언급하고 있을 정도다(실제로 ‘신체화 증상’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개인들이 다시금 우리의 전체 사회를 형성해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되먹임 관계로서의 존재가 사실상 <과정>process으로서의 인간이며 <실재>reality로서의 인간인 것이다.

    결국 어떤 개인의 삶이든지 여기에는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으로서의 기초보장 정도는 마련될 수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저 깊은 존재론적 지평에서부터도 그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모든 인간의 삶에는 개인으로서의 책임뿐만 아니라 그 안에는 이미 사회전체 역시 항상 관여되고 있기에 어느 정도는 <사회적 책임>이라는 것 역시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사민1

    인간이 관계적 존재이자 사회적 존재라는 표현은 그저 수사적인 문구가 아니라 이미 존재론적 정당성을 확보한 표현에 속한다. 고립적 개인이란 추상일 뿐, 오늘날 현대철학에서도 관계는 존재의 부차적인 특질이 아닌 존재의 본성에 속하고 있다. 나 자신이 인간 존재의 관계성을 존재의 본성으로서 강조하는 이유에는 그 어떤 개인이라도 여기에는 관여되고 있는 사회책임의 자리가 어느 정도는 있을 수밖에 없음을 보다 분명하게 말씀드리기 위해서다.

    기본소득은 다양한 이념 노선의 배선 위에서 다양한 명칭들로 불려왔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기본소득론은 많은 이념 노선들의 배선 위에 놓여 왔었다. 혹자는 기본소득의 사상적 뿌리와 철학에 대한 문제제기도 하지만, 실제 역사상에서 기본소득 아이디어는 매우 다양한 철학자와 경제학자 그리고 정치가들로부터 주장되어 왔었을 뿐, 하나로 일관되고 있진 않다.

    예를 들어 몇몇 사람들을 나열해본다면, 수학자이자 근대 계몽주의자였던 콩도르세(Marquis de Condorcet)도 주장한 바 있으며, 푸리에(Fourier, Charles)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도 주장했지만, 노동당원이자 퀘이커 교도였던 데니스 밀너(Dennis Milner)와 마벨 밀너(Mabel Milner) 부부도 주장한 바 있다.

    또한 제임스 미드(James E. Mead) 같은 노벨상 수상의 경제학자도 주장했었고,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같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도 주장했었다. 알다시피 기본소득을 주장한 경제학자들 중에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도 10명 정도 된다고 한다. 나는 이들 모두가 동일한 사상적 뿌리를 지녔다고는 보질 않는다.

    게다가 기본소득은 네덜란드 기독민주당 좌파도 주장한 적이 있으며, 생태자유주의자가 주장한 기본소득도 있지만, 자신을 좌파 드골주의 경제학자라고 말하는 프랑스의 요랑 브레슨(Yoland Bresson)이나 장-마르크 페리(Jean-Marc Ferry) 같은 하버마스주의자도 기본소득을 주장한 바 있다.

    또한 필자가 좋아하는 저 유명한 비폭력 운동의 개신교 목사인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역시 사회보장 소득을 내세웠던 기본소득론자에 속한다. 최근에는 페미니즘 진영에서도 기본소득 연구와 지지자들이 많이 나오곤 한다. 왜냐하면 기본소득은 가사 노동, 돌봄 노동 같은 <그림자 노동>에도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기본소득의 확고한 이념과 철학이라고 할 만한 것, 아주 확실하고 분명한 단 하나의 철학이란 없다. 역사적으로도 보면 다양한 이념과 노선의 포지션들 자체가 우에서 좌로 좌에서 우로 두루두루 있어왔다.

    그렇다면 결국 기본소득은 그 어떤 확고하게 체계화된 하나의 사상에서 논리적 산출의 결과로 나왔다기보다는 다양한 사상의 맥락적 배선 위에 놓여질 수 있는 일종의 정책적 아이디어로 봐야 할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사회민주주의자로서도 기본소득론을 주장하는 것 또한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현실의 국가가 상이한 계급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투쟁의 장이 되듯이 기본소득론 또한 그 자체로 저마다의 이념을 둘러싸고 벌어질 수 있는 노선 투쟁의 장일 수 있다. 여기에는 신자유주의자의 기본소득론도 코뮌주의자의 기본소득론도 있듯이 나 같은 사회민주주의자가 추구하는 기본소득론도 충분히 가능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미 현대 기본소득 이론의 주창자로도 잘 알려진 판 빠레이스(Van Parijs) 또한 1995년 이후로 코뮌주의로의 직행으로서의 기본소득이 아닌 <최상의 자본주의>optimal capitalism로의 이행으로서의 기본소득 입장으로 수정한 바 있다.

    이렇게 볼 때 결국은다양한 색깔의 여러 기본소득론‘들’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나 역시 <사회민주주의적 기본소득론>을 제안하고 있는 것뿐이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사회복지정책연구자들을 대상으로 기본소득에 대한 유의미한 연구가 있었는데, 여기서 나온 사회복지학자들의 분석연구 결과에 따르면 결국 <사회민주주의에 기반한 기본소득> 도입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난 바도 있었다(이명현ㆍ강대선, “한국에서의 기본소득 도입을 위한 우선순위 설정에 관한 연구: AHP 방법론을 적용하여”, <사회복지정책>제38권 제2호 [2011. 6], p.60. 참조). 그렇다면 적어도 <사회민주주의적인 기본소득> 모색이 전혀 뚱딴지같은 영 엉뚱한 발상만은 아닌 것이다.

    게다가 이 연구자는 결론에서 고율의 조세를 정치 어젠다로 설정할 수 있는 정치지도자나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정치적 임파워먼트 및 권력획득이 매우 필요하다는 점도 함께 주문하고 있다(이명현ㆍ강대선, “같은 글”, p.61. 참조).

    사회민주주의가 지향하는 기본소득의 이름, <사회책임 기초보장>

    사회민주주의자로서의 기본소득을 나는 <사회책임 기초보장>이라고 부를 것이다. 필자가 굳이 따로 이 명칭을 주장하는 이유에는 기존의 다양한 우파 및 좌파 버전의 기본소득론‘들’과 구분을 위한 것도 있겠지만, 실은 우리 사민주의자들 안에서도 기본소득 개념 자체를 이해 못해서 나오는 명칭에 대한 논란도 있기에 실제 정책상의 명칭 자체는 별문제가 안된다는 역설로서 제기하는 점도 있다.

    그런 점에서 <사회책임 기초보장>이라는 것도 내 나름대로의 제안일 뿐, 정책상의 명칭이야 더 좋은 이름이 있다면 뭐라 이름붙이든 나또한 상관없다. 단지 여기서 말하는 <사회책임 기초보장>이란 <사회민주주의적 기본소득론>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알다시피 이미 기본소득은 역사적으로 토지 배당, 사회적 배당, 국가 보너스, 보장 소득, 생존 소득, 보편 수당, 시민 임금 등 매우 다양한 명칭들로 불려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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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말하는 <사회책임 기초보장>에는 당연히 무상급식, 무상교통, 무상교육, 무상의료 같은 무상시리즈들을 포함해 사회공공재에 대한 각종 기본적인 보편복지서비스 제공까지 포함한다. 또한 노인과 유아 및 청년에 대한 사회책임 기초보장으로서 현물/현금(각종 화폐 및 상품권 포함)으로 지급가능한 모든 보편복지서비스를 총망라한다. 여기에는 많은 <부분 기본소득들>이 해당할 것이다. 다만 선별복지는 내가 말하는 <사회책임 기초보장>에 우선적으로는 들어가지 않는다.

    나는 선별복지보다는 보편복지의 선차성을 주장하는 입장인 반면에 전면 기본소득을 시작부터 실행하는 것에 대해서도 다소 회의적인 입장에 서 있다. 전자는 사민주의 내에서 입장이 갈라질 수 있는 지점이 되겠고, 후자는 아마도 기본소득 진영에서도 분분하게 갈라지는 입장일 수 있겠다. 현시점에서 볼 때 유아부터 노인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전면 실행을 주장하기에는 분명 현재로선 많이 부담되는, 비현실적인 요소도 없잖아 있다. 그렇다면 실행을 위해서는 도대체 어떤 전략이 가능할 것인가?

    아무래도 사회민주주의자의 입장은 좀 더 현실적인 접근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 생각되는데, 나는 실현접근 전략을 위해선 여러 기본소득론자들 간의 갈등과 투쟁도 좋지만 기본적으로 좌파 노선을 표방한다면 보다 생산적인 협력적 제안을 말씀드리고 싶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기본소득제 실행 전략을 그려 보일 수 있을는지를 모색해가는 가운데 그 과정에서 전략적인 복지동맹 연대를 제안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한국의 경우는 좌파 기본소득론자들의 주장 및 논의와도 몇 가지 중첩되어지는 공통지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얼마 전 한국의 기본소득론자들도 <기본소득 공동행동> 출범을 통해 전략적 연대와 모색을 논의한 바도 있긴 하다. 나는 이를 위해서라도 좀 더 구체화시켜 언급해보이고자 한다. 내가 생각할 때 모두 함께 출발할 수 있는 그 시작점이 바로 거대한 3층집 건설로 향하는 우리의 1층짓기가 될 것이다.

    <사회책임 기초보장>의 핵심 전략은 부분적인 보편복지의 실현을 통한 점진적 확장을 추구

    사회책임 기초보장의 전략은 선별복지제도의 도입보다는 제한적이더라도 부분적인 보편복지의 실현을 통해 점진적으로 확장하면서 전면 실행의 기본소득으로 나아가기를 나는 희망한다.

    선별복지는 어떤 식으로든 복지사각지대 및 부정수급자의 발생 그리고 행정심사비용과 사회적 낙인을 낳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선별복지는 그야말로 국가로부터 시혜적으로 내려 받는 그런 식의 오도된 복지마인드를 형성하기에도 딱 알맞다. 즉, 복지는 모든 시민의 기본적 권리라는 인식을 선별복지에선 갖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차등을 두며 선별을 가늠하는 심사 기준이 있는 데다 그 심사의 주체가 민(民)이 아닌 국가행정 관료들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복지제도라면, 복지는 모든 시민들에게 보편적 권리라는 인식을 갖게 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선별복지 자체를 대놓고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매우 제한적이겠지만 지자제별로 한정된 특수한 상황에서는 선별복지를 융통성 있게 탄력적으로 고려할 여지는 있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복지인프라 자체는 보편복지가 먼저 깔려 있는 기반 위에서 선별복지의 도입을 원하지 그 역은 결코 아니라는 얘기다.

    따라서 나는 기본적으로는 선별복지가 아닌 보편복지의 인프라를 우선적으로 원하며, 그리고 전면 기본소득이 아닌 ‘부분 기본소득부터’를 우선적으로 원한다. 이는 실제 있었던 무상급식의 실행전략과도 비슷하다. 원래 무상급식도 처음엔 설득과 재원 마련이 매우 힘들었지만 무상급식은 5, 6학년부터 부분적으로 실행해가면서 그 효과의 경험을 근거로 하여 나중에는 전체 학년으로 확대한 것이었다. 이는 확실히 1-2-3층집 짓기의 모범사례라 할 만하다.

    알다시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스웨덴을 비롯해 북유럽의 여러 사회복지국가 모델을 쫓아 다양한 사회복지 정책들을 한국형으로 제안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 사민주의 복지정책의 경우에는 선별복지와 보편복지가 다소 함께 뒤섞여 있기도 하다. 우선은 사회적 도움이 필요한 저소득 계층 지원 및 사회안전망으로서의 선별적 복지로 접근하는 경우들도 있다.

    그러나 선별복지는 될수록 한정적 상황이나 매우 특수한 경우에만 허용될 뿐인 것이지 일반적으로는 선별복지 자체가 기본적인 복지인프라로 깔려 있는 것은 분명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의 사회복지운동은 보편복지를 더욱 개발하며 실현해나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면서도 사민주의자들 내에서는 정작 보편복지인 기본소득론을 놓고는 그 핵심 주장에 대해선 필자와 같이 찬성하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대단히 회의적인 시각으로 보는 경우들 역시 많이 있다. 그러나 한 발 더 깊이 얘길 나눠보면 기본소득론에 대해 정확히는 잘 모른다고 시인하는 분들도 태반이었다. 그냥 막연한 느낌과 인상만 갖고서 기본소득을 회의적으로 보거나 이를 반대하는 경우 또한 많았던 것이다. 심지어 기본소득을 은폐된 공산주의로 보는 분도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듯이 사회민주주의 안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기도 하듯이 기본소득론 역시 그 안에도 다양한 기본소득론이 있을 수 있다. 여기서는 우선 본인이 생각하는 <사회책임 기초보장>으로서의 사민주의적 기본소득론의 로드맵을 그려보고자 할 것이다.

    물론 나의 이 제안에 대해 정작 사민주의자들 내에서도 그리고 기존의 기본소득론자들에게서도 거부당할 여지 또한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음도 잘 알고 있다. 나는 나의 제안이 현재로선 최선으로서의 제안일 뿐이지 확고부동한 절대적 주장은 결코 못된다는 점도 덧붙여 말씀드리는 바이다.<계속>

    필자소개
    사회민주주의센터 교육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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