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의 노동자도 사람이다.
    <그의 슬픔과 기쁨>...어떤 사람들의 이야기
        2014년 05월 20일 09:5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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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봄, 쌍용차 노동자들의 잇단 죽음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던 나는 마침내 이런 돼먹지 않은 의문까지 품게 되었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유독 약골인가?” ‘생존을 위한 죽음’이라는 역설이 일상으로 강요되는 사회는 본질적으로 야만사회이지만, 쌍용차 노동자들의 죽음에서는 그나마 다른 사업장 노동자들의 죽음에서 떠오르는 잔인한 ‘열사의 미학’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해 4월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에 실린 ‘철의 노동자, 숨죽여 아프다’라는 글(1)은, 그 매체 편집장 노릇을 하던 나의 가학적인 질문에 기록노동자 이선옥이 내놓은 응답이었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전국의 장기투쟁 사업장 노동자들은 마음의 병을 속으로 꾹꾹 눌러 앓으며 삶과 죽음의 까마득한 경계 위에서 제가끔 흔들리고 있었다. 각자가 감당하는 고통이 인장강도를 넘어서느냐 마느냐는 건 다만 한 끗 차이일 뿐, 그들의 죽음은 실존적 투신이 아니라 개별적 추락의 일대 증후군이었다.

    삶의 조건이 철저히 파괴당한 이들에게는 마음의 병 또한 예외가 아닌 일상의 조건일 수밖에 없음을 나는 왜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을까.

    세월호 참사 이후 자주 거론되는 ‘공감능력 부재’가 내게는 그때부터 이미 심각한 상태였는지 모르겠지만, 한편으로 고통의 당사자들이 정작 내 무지의 원인 제공자는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다. 그들은 한 번도 대놓고 아픈 티를 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철의 노동자”는 지독한 예외성의 호명이다. 누구나 아플 수 있지만, 철의 노동자만큼은 예외다. 아파서도 안 되고 아플 수도 없다. 그 ‘윤리’를 가장 깊게 내면화한 건 다름 아닌 투쟁하는 노동자들인지 모른다.

    가장 아픈 사람이 가장 강인한 척해야 하는 전도된 상황은 고통을 해소하거나 완화하기는커녕 배가하고 극대화할 것이다. 그 끝에 죽음이 있다. 어쩌면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맞아야 하는.

    노동자들의 개별성에 주목하는 일은 자칫 탈정치화의 의도로 비칠지 모르지만, 그것을 외면하는 일이야말로 탈정치화의 개연성이 크다. 쌍용차 노동자들의 죽음이 잇따르던 그해, 진보 이론가를 자처해온 이들 몇몇이 한진중공업 희망버스에 궤변을 퍼부었다.

    누군가는 자본주의가 완전고용이 불가능한 단계로 이행했으므로 비정규직 철폐 요구는 “진보의 재앙”이라고 했다. 다른 누군가는 쌍용차 사태에서 더 큰 희생을 치른 비정규직들은 멀쩡한데 정규직들만 목숨을 끊고 있다며 사회적 고용이 하향평준화 되어야 한다고 했다. 물론 비정규직들은 멀쩡하지 않았고, 쌍용차 불법해고와 관련한 최초의 죽음도 비정규직에서 나왔다.(2)

    의도와 결은 다르지만, 77일 옥쇄파업에 참여했던 노동자들만큼은 죽지 않는다는 ‘간절한’ 믿음도 훗날 무너졌다. 인장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인간은 누구나 고통에 취약하다.

    앞의 두 자칭 진보 이론가의 궤변이 정작 주류 경제학 이론을 답습하고 표절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양쪽 모두 노동자들을 이기주의의 기계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은 이타주의의 기계도 아니다. 철의 노동자라는 예외적인 주체의 상은 뜻하지 않게 저들의 노동자상과 닮은꼴의 대칭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어떻게든 비인격화를 넘어서는 역능을 스스로 발휘한다. ‘산 자’와 ‘죽은 자’를 나눈 건 자본이지만 그렇게 이름 붙인 건 노동자들 자신이다. 해고와 비해고라는 비인격화한 이분법을 삶과 죽음의 심급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그 이분법조차 거부하고 넘어서는 노동자들도 있다. 쌍용차 옥쇄파업 현장을 지켰던 500여 명 중 72명이 ‘산 자’였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이 1800일 넘게 싸워온 이유는 한 가지로 환원될 수 없지만, 그렇게 싸울 수 있었던 힘은 오로지 그들이 개별성을 간직해온 인간이라는 사실에서 나왔다.

    그의슬픔과기쁨 북토크-2

    죽음 아닌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

    이제 책 이야기를 해야겠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삶에 대한 이야기의 책이다. <그의 슬픔과 기쁨>(정혜윤 지음·후마니타스)을 나는 그런 맥락에서 읽었다. 책 제목은 언뜻 평범해서 진부해보이기까지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보면 지은이의 의도를 가장 적확하게 재현한 시어(詩語) 같다.

    ‘그’라는 인칭 대명사는 3인칭이면서 단수다. 지은이가 인터뷰한 인물들이 불법해고에 맞서 지금까지 선도투(생업 활동을 떠난 상태에서 벌이는 진실 규명과 복직 투쟁)를 해온 26명의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뜻밖이다. 왜 3인칭이고, 왜 단수일까.

    3인칭은 타자다. 우리는 타자의 고통을 말할 때 흔히 동일시의 화법을 쓰곤 한다. 그러나 고통은 소진될 때까지 개별적으로 앓을 수밖에 없는 자극이다. 고통의 당사자가 설령 자식이라 해도 부모가 할 수 있는 공감의 최대치는 “내가 대신 아프고 말겠다”이다.

    얼마나 많은 ‘우리’와 ‘동지’는 말의 성찬이 끝난 뒤 당사자의 고통을 쉽게 망각하고 주변화했던가. 그래서 타자의 고통 앞에서 동일시의 화법을 ‘애써’ 쓰지 않는 것은 냉정함이 아니라 오히려 공감과 기억의 영속을 지향하는 윤리적 긴장으로 보인다.

    5년 동안 함께 고통받으며 싸워온 26명을 하나로 묶지 않고 ‘여러 단수’로 표상한 이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슬픔’과 ‘기쁨’이라는 표현도 밋밋하기만 한데, 3인칭의 호명과 조응하는 절제된 감정이입으로 읽힌다. 슬픔이 앞서고 기쁨이 뒤서는 것은 그들이 처한 조건이나 최종 결과를 낙관하려는 의지가 반영된 순서로 짐작되지만, 두 감정을 병렬 배치함으로써 억지로 둘 사이에 인과적인 서사를 구성하려 하지 않는다.

    세상은 고통 뒤에 낙이 온다는 우화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1천 명 중에 이탈하는 사람들에도 순서가 있는데, 일반 조합원이 아니라 방귀 깨나 뀌었다는 활동가들이 더 빨리 빠져나가요. (…)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은 싸워서 될 게 아니라는 정세 판단을 하고 먼저 백기를 드는 거죠.”(3)

    이 책의 문체와 구성도 제목의 취지를 철저히 좇는다. 단문으로 이어지는 문체는 건조해서 차라리 삼엄하다. 당사자 26명의 담담한 입말투 진술이 책 한 권 치의 분량을 채우는데, 그것이 감성을 극도로 제한한 지은이의 간헐적인 개입과 만나 커다란 서사를 이룬다.

    개별적 진술이 서사를 밀고 가는 힘이 된다는 것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이 책을 통괄하는 메타포를 발견한다. 건조한 문체는 26명의 개별적 사연들이 신파로 전락하지 않도록 할 뿐 아니라(신파가 오히려 개별성을 억압한다), 행간의 연쇄와 동행함으로써 오히려 풍부한 서사가 가능해진다. 개별성을 간직한 노동자들의 차이가 끊어질 수 없는 연대의 물매가 되듯이.

    지은이가 자신의 감정을 유일하게 드러낸 표현은 서문에 실린 ‘통증’(4)이 아닌가 싶다. 2013년 6월7일,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이 시민들의 후원금으로 장만한 중고 코란도를 분해해 재조립한 뒤 ‘H-20000’이라는 모터쇼를 열었다.

    늦은 밤 뒤풀이 자리에 동석한 지은이는 자기 앞에 앉은 작업복 차림의 한 노동자가 몽롱한 행복감에 젖어 몇 번이고 되풀이한 말에 통증을 느꼈다. “또 하고 싶다.” 애써 꾸미지 않은 아픔이 읽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 장면은 이 책 전체를 이끄는 모티프다. 조립라인 위의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었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또 하고 싶다”는 그들의 욕망은 우리의 믿음을 배반한다. 그러나 그 배반감은 철의 노동자가 아플 수 있다는 데서 오는 배반감이나 희망버스가 자본주의 이행의 장애라고 느끼는 배반감과 상동적이지 않을까. 그들은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를 강요당하지만 자신의 역능으로 소외를 넘어서고자 한다.

    그것이야말로 지난 5년의 싸움을 이끌어온 힘인지 모른다. 그것은 투쟁의 취약성이 아니라 투쟁이 얼마나 질기고 강고할 수밖에 없는지를 일러준다. 그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사람’인 것이 아니라 ‘노동자도 사람’이자 ‘노동자이기에 사람’이다.

    투쟁은 기계가 하는 것도 아니고 이론이 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하는 것이다. 이 책은 비정하고 잔인한 자본의 철권지배에 균열을 내고 마침내 종식할 수 있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묻고 있다. 이 책이 죽음에 대한 책이 아니라 삶에 대한 책인 이유이자, 읽고 나면 슬프면서도 기쁜 이유이다.

    <참고>

    (1)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1240
    (2) 정혜윤, <그의 슬픔과 기쁨>, 후마니타스, 65쪽.
    (3) 같은 책 244쪽, 한상균의 말.
    (4) 같은 책 11쪽.

    필자소개
    월간 <나들>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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