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우슈비츠에서
    우리는 과연 멀리 있는가
    [책소개]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프리모 레비/ 돌베개)
        2014년 05월 18일 01:2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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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증언문학의 걸작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생애 마지막 작품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1986)가 국내에 첫 번역·소개된다. 프리모 레비는 증언문학의 고전 반열에 오른 <이것이 인간인가>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작가이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레비가 수용소에서 풀려난 지 40년, <이것이 인간인가>를 집필한 지 38년 만에 쓴 책으로, 아우슈비츠 경험을 바탕으로 나치의 폭력성과 수용소 현상을 분석한 탁월한 에세이다.

    특히 레비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한 해 전에 쓰고, 생환자로서 그의 삶의 핵심 주제였던 아우슈비츠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에게는 유서遺書와도 같은 작품이다.

    레비는 이 책에서 강제수용소 안에서 벌어졌던 현상들을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 가라앉은 자(죽은 자)와 구조된 자(살아남은 자)를 가로지는 기억과 고통, 권력 관계의 문제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에서는 계통적이고 조직적으로 유대인, 집시, 장애인, 성적 소수자, 정치적 반대파 등을 박해하여 대학살로 몰아넣었다. 이 사건은 규모로 보나 성격으로 보나 인류사에 유례없는 사건이었다.

    이 책은 상상을 뛰어넘는 폭력의 피해자이자 ‘인간성 파괴’의 희생자인 당사자가 그날의 사건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대인 학살을 증언하는 책들 가운데서도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보통은 증언자와 분석자(연구자)는 불가피하게 분리되어 비록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둘 사이에는 왜곡이나 거리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레비는 철저한 자기성찰과 비판정신을 통해 그와 같은 왜곡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작가는 자신을 포함한 생존자에게도 가차 없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다. 생환자의 기억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이뤄지는 왜곡 문제, 해방의 순간 그들이 경험했던 수치심과 죄책감의 근원을 깊숙이 파고든다.

    레비는 아우슈비츠 경험에서 나치에 한정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위기를 보았다. 레비가 그려 보이는 수용소 세계는 인간 세계의 축소판이다. 그 안의 포로들은 한 줌의 권력을 위해, 또 자신보다 더 낮은 계층을 만들려고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레비는 폭력의 체제에 노출된 인간이 어떻게 그 체제와 닮아가는지 수용소라는 실험실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책은 서문, ‘1장 상처의 기억, 2장 회색지대, 3장 수치, 4장 소통하기, 5장 쓸데없는 폭력, 6장 아우슈비츠의 지식인, 7장 고정관념들, 8장 독일인들의 편지’의 8장과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주제들은 비단 아우슈비츠 문제에 머물지 않고, 인간 존재를 둘러싼 굉장히 논쟁적인 질문을 품고 있다. 폭력(이토록 끔찍한 폭력이, 왜?), 책임(그 책임은 누구에게, 어디까지?), 기억(이 사건은 어떻게 기억에 남을 것인가?), 증언(이 사건은 증언 가능한가, 그 증언은 전해질 수 있는가?), 윤리(극한의 피폐와 갈증 속에서 우연히 손에 넣은 물 한 모금을 동료와 나누지 않은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등등, 실로 아우슈비츠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위기적 물음을 던져준다.

    가라앉은 자

    억압이 만들어내는 회색지대

    출간 당시 가장 논란을 일으킨 부분이 2장 ‘회색지대’이다. 여기에는 수용소의 포로들이 자신보다 약한 희생자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한 분석이 담겨있다. 레비는 흔히 영웅의 귀환으로 표현되는 생환자들에 대한 수사修辭에 저항하면서, 그 이면에 감추어진 그들의 수동적이고 폭력적인 세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신입 포로들은 불행을 같이하는 동료들의 연대감을 기대하며 입소했지만, 최초의 폭력은 특권을 지닌 동료 포로로부터 온 것이었다. 이들은 “최종 해결책”(가스실)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또는 죽 한 그릇을 더 먹기 위해 당국에 협력함으로써 크고 작은 특권을 손에 쥔 자들이었다. 특권층 포로는 수용소 전체 인구 중에서 소수였지만 생존자들 가운데서는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레비는 우치 게토의 위원장 하임 룸코프스키의 이야기를 통해, 억압의 체제 속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그 체제와 닮아가는지 생생하게 묘사한다.

    실패한 기업가이자 유대인 자선단체들의 책임자로 알려진 룸코프스키는 사악한 나치식의 조롱에 의해 게토 위원장에 오른다. 그는 절대 왕정의 군주를 흉내 내기 시작한다. 화폐를 만들고, 자신의 친위대를 세우는 한편, 뛰어난 예술가들과 장인들을 시켜 자신의 초상을 넣은 우표를 인쇄한다. 또 학생들에게는 자신을 칭송하는 작문 과제를 내주기도 했다.

    그 와중에 그는 점점 자신이 메시아이자 자기 민족의 구원자라고 확신하게 된다. 그러나 1944년 9월, 러시아 전선이 가까워오자 나치는 우치 게토를 해산하기 시작했다. 수만 명의 포로들이 아우슈비츠로 강제 이송되었다. “겁쟁이든 영웅이든, 겸손하든 오만하든 독일의 수중에 있던 유대인들의 운명은 오직 하나였다.” 유대인의 왕 룸코프스키의 운명도 이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룸코프스키는 권력과 위신에 쉽게 현혹되는 우리 인간의 나약함을 표상한다. 레비가 보기에 이것은 역사 속에서 되풀이되는 광경이다.

    레비는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히틀러의 궁정에서, 살로 공화국의 장관들 사이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암투를 떠올린다. 그들 역시 회색 인간들로, 처음에는 맹목적이었다가 나중에는 범죄자가 되었고, 죽어가는 사악한 한 줌의 권력을 나눠가지려고 맹렬히 싸웠다. 레비는 룸코프스키의 이야기가 곧 우리들의 이야기임을 강조한다.

    한 체제를 위해 일하고 그 체제의 죄에는 자진해서 눈감아버리는 하위 권력층들의 이야기이다. 서명에는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니까 모든 것에 죄다 서명을 하는 중간 간부들의 이야기이다. 고개를 가로젓지만 묵인하는 사람의 이야기이며, “내가 하지 않으면 나보다 더 못한 다른 사람이 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 우리 모두 게토 안에 있다는 것을 (……) 그 밖에는 죽음의 주인들이 있으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기차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자발적이든 아니든 간에 권력과 타협하게 되는 것이다.(79~80쪽)

    그러나 레비의 관심은 거대한 억압기구의 각 층위에서 어쩔 수 없이 죄에 가담한 한 사람 한 사람을 단죄하는 일이나 용서하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체제 자체의 범죄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선악의 이분법으로 갈라낼 수 없는 보통 사람들이 억압기구의 범죄에 의해 가담자나 공범자가 되어버리는 메커니즘에 주의를 기울였다.

    나치 : ‘적’은 죽어야 할 뿐만 아니라 고통 속에 죽어야 한다

    레비는 히틀러주의를 규정하는 하나의 특징으로 쓸데없는 폭력을 들고 있다. 살인자는 보통 돈 때문이든, 적을 진압하기 위해서든 살인을 위한 분명한 동기를 갖고 있다. 전쟁 또한 나쁘거나 사악한 목표라 하더라도 어떤 목표를 겨냥한다. 그 자체로 고통을 가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치 체제하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례들은 포로들에게 쓸데없는 잔인함을 보여준다.

    강제 이송자들은 식량, 물, 심지어 요강까지 아무 준비 없이 열차에서 태워졌다. 며칠, 몇 주간 이어진 지옥여행으로 미쳐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수용소에 도착한 후에도 매일 저녁 이뤄지는 집계점호(죽은 자도 누워서 나타나야 했다), 일상적인 벌거벗겨짐, 맨손으로 죽 먹기 등 포로들은 자신들이 동물화되는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된다. 레비는 이와 같은 나치의 잔혹함에 몸서리를 친다.

    왜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 대문 역시 치고 들어가야 했단 말인가? 왜 그들을 머나먼 곳에서, 무의미한 여행 끝에 폴란드의 가스실 문턱에서 죽게 만들려고 굳이 끌고 가 기차에 태우는 그 고생을 해야 했단 말인가? 내가 탄 열차에는 (……) 다 죽어가는 아흔 살 노파 두 명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딸들이 곁에서 돌봤지만 헛되이 여행 중에 죽었다. 열차 안의 집단적인 고통 속에 그들의 고통을 보태 넣기보다, 그들을 자신들의 침대에서 그냥 죽게 내버려두거나 차라리 그 자리에서 죽이는 것이 더 간단하고 더 ‘경제적’이지 않았을까? (145쪽)

    이와 같은 나치의 폭력성은 주로 유대인들로 구성된 특수부대 존더코만도스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끔찍한 임무는 수용소의 화장터를 관리하는 것이다. 가스실로 보내야 할 사람들 사이에 질서를 부여하고, 가스실에서 시체들을 꺼내 화장터로 운반하고, 재를 꺼내 없애는 일련의 작업을 해야 했다. 곧 “유대인을 화로 속에 넣어야 했던 것도 유대인이었다.”

    나치는 이러한 기관을 통해서 희생자들에게 죄의 짐을 떠넘기려고 시도했다. 레비는 특수부대의 존재로부터 하나의 메시지를 읽는다.

    지배 민족인 우리는 너희들의 파괴자이지만, 너희들은 우리보다 나은 것이 없다.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 우리에겐 너희의 육신뿐만 아니라 영혼을 파괴할 능력이 있다.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파괴한 것처럼. (61쪽)

    레비는 히틀러 체제가 위로부터 강요한 선택은 포로들에게 “최대한의 괴로움, 최대한의 정신적·도덕적 고통을 짜내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적’은 죽어야 할 뿐만 아니라 고통 속에 죽어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레비는 트레블링카 전 사령관 프란츠 슈탕글의 인터뷰 속에서 나치의 잔혹행위에 담긴 경악스러운 진실을 마주한다.

    “그들을 어차피 다 죽일 것이었는데… … 굴욕감을 주고 잔혹행위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나요?” 뒤셀도르프의 감옥에서 종신형에 처해 있던 슈탕글에게 작가가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실질적으로 임무를 수행해야 했던 사람들을 길들이기 위해서. 그들에게 자신들이 하고 있었던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152쪽)

    나치가 포로들에게 대하여 잔혹행위를 벌인 기저에는 죽이는 자의 죄책감을 덜려는 목적도 있었다. 죽이는 자가 제대로 일을 할 수 있게끔, 희생자는 죽기 이전에 인간 이하로 비하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생환자가 겪는 수치심과 죄책감

    레비에 따르면 포로들에게 해방이 무조건 기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유를 되찾음과 동시에 치욕감과 죄책감에 휩싸였다. “어둠에서 나왔을 때, 사람들은 자기 존재의 일부를 박탈당했다는 의식을 되찾고 괴로워했다.”

    그 죄의식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생환자들은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자신들이 휩쓸려 들어간 체제에 대항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나 충분히 하지 않았다는 데 인식이 미쳤다. 또한 연대감의 실패라는 측면에서도 그랬다.

    생환자들은 그때 도움을 베풀지 않은 데 대해 자신이 유죄라고 느꼈다. 더 약하고 더 서툰 옆자리의 동료는 도움을 청함으로써, 또는 단순히 ‘있다’는 사실만으로 집요하게 괴롭혔다. 보통은 자신들도 매우 도움이 필요한 처지에 있었지만 그 죄책감은 해소되지 않았다. 그러나 레비를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한 또 다른 수치심이 있다. 레비는 자신이 누군가의 자리를 빼앗고 살아남은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다.

    다른 사람 대신에 살아남았기 때문에 부끄러운가? 특히, 나보다 더 관대하고, 더 섬세하고, 더 현명하고, 더 쓸모 있고, 더 자격 있는 사람 대신에? (95쪽)

    이와 같은 뿌리 깊은 의심, 곧 “다른 사람을 희생하여 내가 살아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사실상 죽인 것일 수도 있다”는 의혹은 바로 수용소의 ‘구조된 자’는 최고의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최악들의 사람들이었다는 데서 비롯한다.

    최고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그들이 못나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가진 용기라는 미덕 때문에 죽은 것이다. 반면 이기주의자들, 회색지대의 협력자와 같은 수용소 체제에 적응한 자들, 최악들의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래서 레비는 자신이 구조된 사람들 무리에 어쩌다 섞여 들어간 것처럼 느낀다.

    진짜 증인들은 우리 생존자가 아니다. 우리 생존자들은 근소함을 넘어서 이례적인 소수이고, 권력 남용이나 수완이나 행운 덕분에 바닥을 치지 않은 사람들이다. 바닥을 친 사람들, 고르곤을 본 사람들은 증언하러 돌아오지 못했고, 아니면 벙어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무슬림들”, 가라앉은 자들, 완전한 증인들(……)이다. 그들이 원칙이고 우리는 예외이다.(98~99쪽)

    이와 함께 레비는 우리 가운데 의로운 사람들이 느끼는 좀 더 광범위한 수치심을 이야기한다. 많은 이들이 타인들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그리고 자신들이 거기에 연루됐다는 생각 때문에 가책과 수치심이라는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주위와 눈앞, 그리고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레비는 이 고통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사람들은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라 알기를 거부한다

    레비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독일인들이 자신에게 보내온 편지로 장식한다. 레비는 한 독일 출판사가 <이것이 인간인가>의 번역권을 계약했다는 소식을 듣고 흥분한다. 이 책의 진정한 수신자이자 무기처럼 겨냥하고 있던 사람들은 바로 독일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 보내진 40여 통의 편지들 가운데서 몇몇은 “나는 몰랐다”, “어쩔 수 없었다”와 같은 여전한 변명과 기만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에 해설을 쓴 서경식의 지적처럼 종전이 후 얼마 안 된 시기에는 나치 지도자들을 ‘광기’에 사로잡힌 ‘악마’로 지목하여 설명하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연구가 심화되어 갈수록 그러한 단순한 논리는 무효화되고, 독일 국민을 비롯하여 다른 유럽 국가의 국민까지 포함한 일반인의 적극적인 동조가 있었기 때문에 ‘홀로코스트’가 실현되었다는 ‘불편한 진실’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레비는 “당시의 거의 모든 독일인들의 진정한 죄는 말할 용기가 없었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진실을 확산시키지 않았다는 것이야말로 독일 민족이 저지른 가장 중대한 집단 범죄의 하나이며 히틀러의 테러로 인해 독일 민족이 다다른 비겁함을 가장 명백하게 증명해주는 것이다. 관습 속으로 들어와 버린 비겁함, 너무나 깊어서 남편이 아내에게, 부모가 자식에게도 입을 열지 못하게 만드는 비겁함이다. 이 비겁함이 없었더라면 그토록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고 유럽과 세상은 오늘날 달라져 있을 것이다. (14쪽)

    이 책의 제목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레비가 단테의 <신곡> ‘지옥’ 편에서 뽑아왔다. “가라앉은 자”란 수용소의 전멸 체제에 휩쓸려버린 사람들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레비는 그들이야말로 “완전한 증인”이라고 말한다. 살아남은 자들, 곧 구조된 자들은 그들 대신 증언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레비는 인생의 마지막 대목에서 홀로코스트의 가르침이 역사의 일반적인 잔혹한 사건들 가운데 하나로 그렇게 잊힐 것이라고 점점 확신하게 되었다.

    레비의 마지막 유언과 같은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아우슈비츠란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 사건은 과연 종결된 것인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것으로부터 얼마나 안전한지에 대한 물음은 오늘날의 한국 독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고민을 안겨줄 것이다.

    필자소개
    레디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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