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몬드라곤과 밀리샤
    위험사회와 민주주의의 위기
    [프로파일러의 범죄이야기] "안전과 민주주의는 정비례"
        2014년 05월 16일 09:46 오전

    Print Friendly

    엊그제 내가 강의하는 고대 세종캠퍼스 범죄사회학 시간에, 농담반 진담반으로 안전에 대한 얘기를 했다.

    마침 더운 날이라 강의실 앞문을 약간 열었는데, 앞문이 꽉 닫히지도 않고 살짝 열어놓으려고 하면 아예 서서히 활짝 열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현상은 귀신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건물이 약간이라도 기운 것을 의미한다고, 자기 목숨은 자기가 알아서 지켜야 한다고, 좀 위험해 보이는 건물이 보이면 멀리서 볼펜으로 기울기를 측정해보라고, 등등.

    처음에는 수업 전 농담으로 시작한 얘기가 결국에는 세월호 참사 얘기로 이어지면 안전과 위험사회에 대한 디스토피아 얘기로 끝을 맺었다.

    특히 요즘 같은 사회상을 보면서,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가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난해한 전문적인 지식들에 의해 분할된 현대 사회의 다양한 영역은 상호독립적인 것 같지만 실제는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상호의존하고 있다.

    사회학자 뒤르껭이 유기적인 연대라고 했을 정도로 잘 조합된 이 분업시스템을, 우리는 근대사회 혹은 자본주의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으로 인정하고 있다.

    주지하듯이 ‘근대’로의 이행, 혹은 ‘자본주의’ 사회는 고도로 분업화된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고도로 전문화된 구성요소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상당한 수준으로 의존하는 특징을 가지며, 그 자체로 (상품) 교환의 장이기도 하다.

    좀 더 분업화된 사회는 더 높은 수준의 (상품) 교환을 의미하면서 가치를 극대화시키고, 더 높은 상호 유기성을 나타낸다. 높은 신뢰는 더 높은 이윤을 보장한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잘 모를수록 더 높은 수준의 상품 교환이 이루어지고 이는 더 높은 수준의 이윤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렇게 잘 기능하는 조합체로서의 장에는 반드시 요소들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조정자 혹은 통합자 그러나 지배자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그들 구성요소들의 핵심에는 국가기구가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물론 본래적 의미에서 근대 사회는 시민을 포함한 계급들 사이의 격렬한 투쟁의 장이자 그 결과물이다. 그리고 국가기구는 그 장의 일부이기도 한 주요한 구성요소이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국가는 상품 교환이라는 유기적 분업체계를 유지시키는 핵심적인 뼈대이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심화될수록(경쟁의 확대에 따라 좀 더 높은 수준의 이윤을 추구할수록) 혹은 좀 더 다른 자본주의 이행 경로를 따른 경우, 요소와 요소, 더 깊게는 국가기구와 그 외의 요소 사이의 관계가 상호의존관계만이 아닌 수직적인 종속관계의 형태를 띠게 된다.

    구체적으로 이런 현상은 특히 자본주의가 극도로 심화되고 그 과정에 구조적인 위기가 반복되는 경우에 빈번하게 나타나고, 이런 위기를 극복하는데 또 다른 종속관계를 이용하게 되면서 결국에는 되돌아올 수 없는 불균형 체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불균형 체제는 기존의 시스템에서 특정한 역할을 했던, 즉 국가와 시민 사이에서 중간 매개체 혹은 완충제 역할을 했던 특정한 요소가 급격히 사라지게 되고, 그 대안으로서 또 다른 국가기구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어 극도의 불평등이 발생한다. 이는 발전국가의 경우에도 더욱 특징적으로 나타나는데 자본주의 이행 그 자체가 국가 주도형 사회시스템으로 이루어진 전일적 국가체제에서는 국가 이외의 존재는 대부분 부차적인 역할 외에는 없다.

    보통 상호의존이란 호혜적 교환이고,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기도 하지만 견제하기도 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시장에서의 상품 교환과 유사하다. 나의 상품과 타인의 상품이 교환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등가의 가치체계를 전제로 한다. 즉 일정정도의 세력 균형을 필요로 한다.

    반면 종속관계는 일방적인 관계이자 독점적인 관계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교환체제가 극단적인 독점체제로 바뀌면서 균형추가 무너지고 그것은 시장관계의 붕괴이자 신뢰관계의 붕괴이다.

    또한 애초부터 국가가 압도적으로 시장을 만들고 주도하는 발전국가 시스템의 경우 국가는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최고의 선이라는 점을 전제한다. 이때의 국가는 시혜자이자 통치자이며 무결점의 조정자인 것이다. 국가에 대한 도전은 용납되지 않으며 견제와 균형을 시도하는 행위 그 자체로 사라져야 할 절대 악이 되는 것이다.

    국가는 누구에게 봉사하는가

    그러나 발전국가의 완전무결성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신화이다. 이는 하늘을 향해 스스로 거대한 기둥을 쌓는 애벌레들과 같다. 그 가장 꼭대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발전국가, 특히 우리나라 같은 경우, 국가와 자본이 마치 자웅동체처럼 움직인다. 자본이 요구대로 국가는 법, 규정, 판례, 관례 등을 통해 보호한다.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의 시민은 마치 하나의 대상에 불과하다.

    이번 세월호 참사와 같은 경우에도, 자칭 예수를 꿈꾸는 사이비 교주는, 교세의 확장을 위해 혹세무민과 강탈을 통해 초기 자본을 형성한 후, 헐값으로 기업 사냥을 하면서, 정관계에 갖은 뇌물과 ‘장학생’ 등을 동원, 자신의 기업에 유리한 방향으로 상품 시장을 확보, 독점하여 결국 지금과 같은 거대 기업과 막강한 교세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 부귀영화를 자손만대로 영속시키기 위해 세습시킨다.

    여기에 사이비교주의 이름만 다른 사람의 바꾼다면 우리나라 대형교회 중 본인들은 아니라고 할 경우가 얼마나 될까? 또 교회가 아닌 특정 기업을 그 외형으로 한다면 우리나라 재벌들 중 본인은 아니라고 할 경우가 얼마나 될까?

    며칠전 경향신문을 보니 박노자 교수가 세월호 참사와 관련, 보다 안전한 미래는 민주주의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가 말하듯 “가장 안전한 사회는 가장 민주적인 사회이고, 민주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의 안전이 소홀해지는 것”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약한 민주주의에서, 국가는 국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을 위해 봉사하고, 지배 관료와 자본가들에게 노동자든 시민이든 동등한 민주시민이라는 인식이 없다. 단지 통치의 대상일 뿐이다.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불평등/불균형은 소외로 귀결되고 이 소외는 극단적인 착취로 이어진다. 끝내는 목숨까지 자본의 이익을 위해서는 대상일 뿐이다.

    안전이라는 서비스는 국가가 당연히 제공해야할 의무이다. 그러나 자본의 이익 앞에서는 자본과 국가는 한 통속이 된다. 그러니 안전은 국가가 지켜주는 것이 아니니 알아서 스스로 지켜야 하는 것이 된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다른 방법도 있다고 한다. 즉 돈을 주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단한 착각이다. 독점적인 상품시장에서 어쩔 수 없이 구입한 상품은 A/S도 반품도 안 되는 강매된 불량품일 뿐이다. 그러면서 또 한 번 착취를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과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의 생명을 위해서도 민주주의 그것도 실질적 민주주의의 확대는 반드시 필요하다. 국가와 자본의 불평등/불균형에 맞서는 것이 필요하다. 즉 국가/시장에 대한 견제와 균형이 필요하다.

    그런데 주지하듯이 정치/경제로서의 민주주의는 기득권을 가진 소수에 의해 제도적으로 차단되어 있고 이는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누구도 민주주의의 확대가 그 핵심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것을 실현할 수단이 무엇인지는 선뜻 제시하지 못한다. 민주주의 자체를 형애화해서 다툼의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그래서 작금의 상황은, 이념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목적으로 싸워야 하는데 민주주의의 확대를 요구하기 위해 제시하는 방법 자체에 너무나도 큰 한계에 봉착하고 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대의기구에의 참여를 얘기하고, 어떤 이들은 시민단체와 거버넌스를 이야기 한다.

    그러나 정치를 하기 위해 호랑이굴로 들어간 시민단체 명망가들이 지금 그 정치가가 되어있고 국가기구에의 참여를 통해 바꾸어 보겠다고 들어간 거버번스도 역시 체제내화되고 있다.

    그런데 이에 반해 서구의 ‘해적당’과 같은 경우는 조직의 구조나 명문화된 논리성은 빈약하지만 강한 신뢰를 받고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대안을 찾되 ‘다른 방식’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21세기의 자본>을 저술한, ‘토마 피케티’는, 부의 축적과 소득 분배에 대한 방대한 역사 자료를 분석해, 자본주의는 ‘자본의 수익률이 경제성장을 능가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고 이것이 결국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으며, 그 결과 나타난 세습자본주의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일으키고 있음을 실증했다.

    따라서 이 연구는, 본질적으로 자본의 수익률을 노동의 생산성(경제성장을 자본의 축적과 노동생산성의 함수라고 전제하면, 자본의 축적이 자본 수익률의 전제이므로 결국 경제성장은 노동생산성의 함수)이 따라가지 못하므로 결국 극단적인 불균형은 필연이고 따라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래서 피케티는 누진세 등과 같이 자본에게 세금을 물리자는 결론에 도달하지만 문제는 누가 그것을 할 것인가에는 ‘정치’에 공을 넘긴다. 즉, 민주주의 이념과 제도가 자본주의를 공공이익에 복무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며, 자본주의가 스스로 혹은 저절로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오산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누가? 어떻게?

    피케티의 연구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공공부채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즉 유럽, 일본 등 주요 선진국들의 공공부채는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반면 사적 자본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적 자본이 증가했다는 건 결국 불평등/불균형이 심화되었다는 문제이고, 그리고 더 나아가면 공적 자본이 가난해졌다는 문제이다.

    이는 사적 자본이 반복되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빌미로 사적 자본을 잠식한 것이다. 바로 공공재 생산에서의 ‘민영화’의 문제인 것이다. 결국 자본주의와 공적 자본은 양립하게 힘들다는 결론도 가능할 것이다.

    몬드라곤대학교

    몬드라곤공동체가 세운 몬드라곤대학교의 모습

    국가 바깥도 상상하고 실천하자

    협동조합의 대명사인, 몬드라곤은 다른 방식의 생산과 소비를 의미한다. 그 핵심은 국가와 시장의 독점적 일방적 구조를 깨뜨리는데 있다. 이 과정에서 그에 합당한 균형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균형은 국가/시장에 대한 적절한 감시와 견제인 것이다. 현재 이런 독점적이고 일방적인 관계, 그런 국가사회시스템에서는 이런 견제와 균형이 불가능하거나 붕괴되어있다.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의 생산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의 공적 자본을 만들어 가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즉 새로운 방식의 생산과 소비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국가와 시장에 모든 것을 의존하는 시스템은 그만큼 위험도가 높아지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와 시장, 자본주의는, 국가는 무조건 선이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복종하라고 했다. 또한 시장도 마찬가지 배반하면 실업과 배고픔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을 경고한다.

    그런데 막상 인런 무조건적인 믿음에 대한 대가는 무한대의 착취와 소외뿐이다. 안정적인 직업도 안락한 집도 안전한 교통도 맘 편하게 먹을 먹거리도 단지 그들에게는 자본의 이득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것이 바로 ‘위험사회’가 우리에게 주는 핵심적인 교훈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시민을 위한 공적 자본이 필요한 것이고 그것의 생산을 위한, 민간의 공적 생산체계가 필요한 것이다. 안전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건물, 어떤 운송수단, 특정한 공간, 특정한 집단 등에 대한 안전도/위험도 정보는 국가/자본이 실제적으로 제공해주지 않는다. 그를 통해 이득을 얻고 있는데 왜 제공해 주겠는가?

    ‘국가개조’론이 또다른 ‘국가강화’론으로 귀결될 수도

    이런 것들을 국가가 제공해주리라는 믿음을 버리고 스스로 지켜야 한다. 너무 무정부주의에 가깝지 않느냐고? 천만에 이것은 자치, 자율의 이념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국친 개념’에 빠져있었고 수동적인 타율성에 길들여져 있었다.

    그렇지만 실제 위기에 직면하면 기존의 틀은 무의미해진다. 이것이 바로 militia의 개념이다. 밀리샤는 그 쓰임에 따라 시민군에서부터 민병, 게릴라, 사병집단까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영예로운 전통의 ‘의병’이라는 개념이 있다.

    핵심은 국가/시장의 독점적인 구조로부터의 독립과 자율성 추구이다.

    작금의 세월호 참사를 극복하기 위해, 현직 대통령은 ‘국가개조’라는 말을 쓰는 듯하다. 그런데 그 국가개조라는 말 속에 또 다른 새마을운동이 숨어 있는 것 같다. 즉 국가를 믿고 따라와라. 그런데 국가의 실패를, 또 다른 국가기구로 대체하려는 해결책은, 아랫돌을 빼서 윗돌을 쌓으려는 무지와 같다. 또 그 국가기구에 최고의 전문가들을 고용해서 준비한다고 한다.

    그것은 넌센스이다. 이것은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전문가들이 없어서 못했는가? 사람이 있어도 그들에게 권한을 주지 싫어서 기존 체제를 유l지하고자 하는 것 아닌가?

    국난 극복의 영웅이 되고자 하지만 사실 그 국난을 일으킨 주범은 가까이는 기득권 세력 그 자신이고, 좀 더 멀게는 박정희 체제로 대표되는 바로 발전국가 시스템 그 자체에 있는 것이다.

    필자소개
    배상훈
    2000년대 중후반 경찰청 범죄심리수사관(프로파일러)과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계 행동과학팀(프로파일링 부서) 재직했다. 현재는 서울디지털대학 경찰학과 교수이며, 국립중앙경찰학교 (수사) 프로파일링 과목 담당 외래교수이다. 화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는 진보정치를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임상병리사와 사회복지사를 거쳐 프로파일러의 삶을 살아온 독특한 경력을 갖고 있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