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애국주의' 비판
"악의 '평범성'이 악의 원천"
    2014년 05월 14일 12:5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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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가 국내에서 출범된 1997-8년부터 한국 지식계에서 유행해진 이야기 중의 하나는 바로 “민족주의 비판”이었습니다. 그 비판에 있어서는 물론 처음부터 뚜렷하게 좌우파가 나누어졌습니다.

우파적인 민족주의 비판이란 간단합니다. 국제자본이나 그들이 큰 투자를 하고 있는 국내 대자본에 방해 되는 모든 것들을 다 지우라는 게 그 “비판”의 요지입니다.

아직도 강북 등의 원주민들이 감히 국제 표준어인 영어 대신 쓰고 있는 한국어 따위를 폐지하여 영어를 공용화하라! 외국 투자자들이 행차하시는데, 이상하게 생긴 한글 표지판 따위가 국위를 낮추잖아요. 외국기업에 대한 모든 부정적 감정들이 다 “배타성”일 뿐이니 이걸 감히 입밖에 내지 말라!

아무리 외국계 자본의 손에 넘어간 은행들에서는 영세기업 대출 대신 단물이 더 많이 나오는 “소비자 금융” 등을 선호하여 영세업자들로 하여금 사채업자들에게 먹혀 들어가게 해도, 이거야말로 선진화잖아요. 그리고 이 후진적인 땅에 자본주의를 이식시켜 준 총독부의 여러 분들께 큰 절을 올리라! 식민주의에 대한 상처도 시장 논리의 차원에서 무의미하잖아요.

복거일, 공병호, 이영훈이 주도하는 이와 같은 우파적 민족주의 비판은 결국 뉴라이트의 사상적 기초를 세운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임지현과 김철 등이 주도해온 좌파적이거나 조금 더 온건한 색깔의 “민족주의 비판”은 보다 복잡한 구조를 가졌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 가상 독자층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자유기업센터”는 주로 그야말로 기업 종사자들이나 보수적 언론인 등을 겨냥한다면, 학계의 인문학 전공자들이 펼치는 “민족주의 비판”은 무엇보다-상당수가 운동권에 몸 담은 적이 있었던-학계 종사자나 교사, 학생 등을 겨냥했습니다.

그 만큼 그 논리도 조금 더 “소프트”했어야 했고, 지식인들이 좋아하는 요소, 즉 예컨대 개인의 자유라든가 인권에 대한 고려, 다양성에 대한 존중 등을 담아주어야 했습니다. 민족주의를 비판한 표면적인 이유로, “기업에 방해 된다”는 것이 아니고 예컨대 “다양성을 죽인다”라든가 “다수를 위한답시고 개인의 인권을 무시하게 만든다”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런 말을 하면 제 정신이 들어있는 인간인 이상 감히 반대할 사람은 누가 있겠습니까? 박정희식 관제 국가주의나 “프락치”라고 해서 같은 또래의 젊은이를 고문해서 죽일 정도로 인권 의식이 전무한 일부 운동권 단체들의 폐단이 하도 자명하기에 이와 같은 “민족주의 비판”은 거의 곧바로 “상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민족주의 비판이라는 것은 전혀 새로울 게 아닙니다. 예컨대 정신적인 반국가적 아나키스트라고 할 톨스토이도, 톨스토이가 살다 죽은 나라에 유학한 박헌영도 국내에서 잘 알려진 민족주의 비판자들이었습니다.

단, 그들에게는 민족주의 비판은 그 자체로서 목적이라기보다는 보다 큰 운동, 보다 큰 싸움의 수단, 하나의 디딤돌이었습니다.

톨스토이는 민족주의 못지 않게 국가와 자본주의, 나아가서 산업문명 자체를 비판했으며, 병역거부와 국가사법기관에 대한 보이콧, 그리고 자율적 농업공동체 건설을 위해 분투했습니다. 지금 봐도-굳이 톨스토이주의자가 되지 않더라도-매우 혁명적 의제죠.

윤봉길의 폭탄 투척을 “소영웅주의”, 그리고 “대중에 대한 배제”라고 비판한 박헌영은 혁명의 첫 단계로서는 “진보적 민주주의”, 즉 주요 생산수단의 공유화와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을 지향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가 생각한 “진보적 민주주의”의 문턱에도 오지 못했는데, 그것은 그로서는 불과 “제1단계”이었고 그 다음은 사회주의로의 이동이었죠. 보시다시피 그들의 민족주의 비판은 보다 큰 혁명적 의제의 일부분일 뿐이었습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한국은 어땠는가요? 잘 알려져 있다시피 국내의 민족주의 비판은 혁명적 의제와는 처음부터 무관했으며, 그 어떤 실천적 운동과 결부된다기보다는 대개는 학계의 흐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비판자들은 대개 중상층에 속하는 전임직 교원들이었으며, 이미 더이상 사회에 그다지 요구할 게 없는 그들로서 다소 불편할 수 있는 사회의 각종 운동들에 대해서 그들이 가면 갈수록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가면 갈수록 사회 “밑”의 움직임들에 대한 거부감의 차원에서는 “민족주의 비판” 진영의 좌우파가 거의 서로 합의점을 찾은 듯한 인상을 보다 강하게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거시적으로 볼 때 양쪽으로서 지금 한국에서 공고화된 신자유주의형 기업국가 체제가 편하고 좋은 만큼, 그들 사이의 감수성 차이(?)보다 계급적 이해관계의 동질성은 더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좀 “얌전”해야 하는 “학계 인사”들이 “밑의 것” 움직임들에 대한 비판과 경멸을 드러내는 것이, 1980년대를 아직도 완전히 망각하지 못한 한국사회로서는 다소 힘드니까 “사회”의 먹이사슬에서 그들보다 약간 더 낮은 서열적 위치에 처한 “글의 전사”들은 먼저 움직이는 셈입니다.

하나의 사례로서 이번 세월호 사태 속에서 아이를 죽게 만든 정부와 기업 대신에 아이 잃은 어머니, 아버지들을 더 강하게 비난한 “일본 비평가” 최석영(崔碩栄)을 들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체류하면서 일본 관련 대중적인 글들을 <인물과 사상> 등 국내 여러 매체에 기고하는 최석영은 몇년 전에 <김치 애국주의> (인물과 사상사, 2010)라는 저서를 내놓았습니다.

그 저서를 읽었을 때에도 저는 솔직히,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반일 감정 비판서인데, 그 반일 감정이 유지되어지는 맥락-예컨대 한국 군부정권과 일본 정권의 야합, 유착으로 강제 징용 피해자나 위안부 피해자 등이 보상 받을 권리마저 빼앗겼다는 사실이나 자칭 “단일민족”인 일본의 주류가 오랫동안 재일조선인들을 차별해온 사실-에 대한 설명이 결여된 채 오로지 “일본을 싫어하는 한국인들의 우매함”만을 때리는 것은 읽기가 거북스러울 정도로 이상했습니다.

김치 애국주의

한국 민족주의에 구린내 나는 구석이야 아주 아주 많죠. 예컨대 동남아시아인들을 인종 차별하는 것부터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과연 일본 민족주의는 한국 민족주의보다 우월한 부분이 하나라도 있나요? 그러나 최석영에게는 일본 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은 아주 전무 했습니다.

그 책이 나온 뒤에 <인물과 사상> 월간지에서 나오는 최석영의 일본 관련 연재물을 계속 읽었는데, 가면 갈수록 그의 입장에서 “한국 민족주의 비판”보다 어쩌면 일본 민족주의에 대한 긍정적 이해(?)가 더 돋보였습니다.

최근 (금년 4월호)에 나온 재특회(재일조선인을 괴롭히는 일본 파시스트 단체)에 대한 그의 글을 읽었을 때에, 솔직히 Völkischer Beobachter지와 같은 파쇼 신문의 유대인론을 읽은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재일 조선인들이 통명을 이용하여 사기 친다, 세금 덜 낸다, 북한으로 돈 보내 일본 부를 축낸다. 고로 재특회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게 아니다”라면 “재독 유대인들이 50%나 무역업 등 장사에 종사해 생산하지 않고 오로지 투기만 일삼는다. 납세와 병역의무를 피하려 안간힘 쓴다. 친쏘파가 너무 많다”와 같은 독일 파쇼들의 유대인론도 긍정적으로 재고해야 하는 건가요?

<인물과 사상>지를 절독하고 싶은 만큼 최석영의 글은 기초적 상식을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의 전사”의 활약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진행됐습니다. 최근 며칠간 그가 내보낸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에 대한 트위트들(https://twitter.com/Che_SYoung)을 한 번 봐주시기 바랍니다:

“大統領との面談を求めてます。全員が本当の遺族かどうかも警察が確かめない状況です。もし、身分証を求めて、万が一本当の遺族だったらまた大騒ぎするので”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전원이 진정한 유족인지 경찰이 확인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만약 신분증을 요구해서 만일 진짜 유족이면 또 큰 소동을 일으키니까). 이건 5월11일 트위트입니다.

말하자면, “가짜가 많다. 국가는 조사나 해야 한다. 그러나 저런 것들이 소동이나 일으킬 수 있으니 문제다” 이런 것입니다. 정말 “밑의 것”들을 우월적 시선으로 내려다보면서 이들 위에 군림하는 신자유주의 사회 승리자다운 태도입니다.

아니면 이런 게 어떨까요: “朝鮮民族をよく「恨(ハン)」の民族というけど、これは自分を「被害者」「悲劇の主人公」に位置づけして、相手に同情を求め、甘えている本能的な「自己防衛術」だと私は思う。ある意味マゾヒズムと甘えの融合。問題は、これが韓国では通用するが海外では通用しないということ” (조선민족은 흔히 한의 민족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자신을 피해자, 비극의 주인공으로 놓고 상대에게 동정을 구하고 어리광부리는 본능적인 자기방위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의미에서 마조히즘과 어리광의 융합. 문제는 이것이 한국에서는 통용되지만 해외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

이게 말하자면 이런 태도입니다: “어찌 자기네들이 뭘 당했다 싶은 저 열등한 조선인들이 나만큼 국제기준이라도 알겠는가” 여기에서 “민족주의 비판”은 거의 19세기 제국주의자들의 “열등한 인종들”에 대한 경멸과 상통합니다.

아니면: “大統領官邸へ行進中の沈没事故の遺族らが警察に阻止され、道路を占拠。一帯は渋滞、大混雑。無許可の「デモ」で公道の無断占拠にもかかわらず、警察は何もできない。彼らが「遺族」という免罪符を持っているからだ。韓国で「被害者」はある意味特権だ” (대통령 관저로 행진중인 침몰 사고 유족들이 경찰에 저지당해 도로를 점거. 일대는 정체, 대혼잡. 무허가 데모로 공공도로의 무단점거임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들이 ‘유족’이라는 면죄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피해자는 어떤 의미에서 특권이다).

감히 거리에서 “행동”이나 하고 국가에 대드는 “밑의 것”들은, 최석영의 눈에는 불량배 이상은 안됩니다. 아이를 잃은 그들의 슬픔이 뭔지 이해조차 못하는 최석영을 봤을 때, 그가 과연 그들과 그들의 아이들을 “인간”으로 의식하는지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진보지를 자칭하는 <인물과 사상>지에서 이런 자들이 글을 써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곳은 바로 우리들의 선진화된 대한민국입니다.

신자유주의는 물론 아직도 물론 파시즘은 아닙니다. 지금 이상으로 위기에 봉착하면 파시즘으로 갈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말입니다.

민족주의 비판을 업으로 삼아 해오신 인문학계의 분들도 굳이 일부러, 알면서 신자유주의적 지배층들에게 봉사한다기보다는 아마도 학계라는 시스템 속에 안주하여 주로 신자유주의적 환경이 만들어낸 의식-그 어떤 집단행동에 대해서도 거부감 갖고 원자화된 개개인을 당연시하는, 그런 의식-에 그저 무비판적으로 의거하면서 책과 논문을 생산할 뿐인 듯합니다.

그들 중에서는 비교적 대중적 글을 써대며 비교적 매우 노골적으로 일본 극우들을 옹호하는 최석영도, “파시스트”라기보다는 그저 일본/한국형 신자유주의 사회로서 매우 평범한 지식소매상 정도일 뿐입니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가 아이흐만에 대해 이야기했듯이, 이와 같은 경우에는 그 평범함은 바로 악의 원천이 되고 맙니다.

최석영 류처럼 “선진국” 주류에 편입하려는 준주변부 국가 출신의 “민족주의 비판자”들이 보이는 “밑의 것”들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 그들의 인간적 존엄성을 짓밟으려는 태도, 그들의 그 어떤 움직임도 “소동”으로밖에 볼 줄 모르는 자만심 등은, 차후 얼마든지 한국/일본 형 파시즘의 자양분이 될 수 있습니다.

가령, 미-일-한 삼각 동맹의 중국/북한/러시아와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돼 조총련 활동가들이 예비구속 당한다면? 최석영 류의 “지식인”들에게는 파쇼화돼가는 일본 사회의 그런 움직임들은 그저 당연할 뿐일 것입니다.

아우슈비츠의 시대가 다시 돌아온다면, 최석영 류의 “지식인”들은 그 어떤 새로운 유대인들-조총련계 재일조선인이든 누구든-이 학살 당하는 판에 그 학살의 당위성을 매우 쉽게 옹호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에게 “밑”과 “밖”의 가난뱅이들은 오로지 자신들 영달의 재료일 뿐입니다.

저로서는 그런 자들이 “민족주의” 이상으로 무섭습니다. 물론 일본 등 저들이 선망하는 “선진국”들의 민족주의와는 저들이 매우 쉽게 유착하기도 합니다.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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