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노하는 나를 믿자
    [기고] "정직한 분노가 새로운 우리를 만들어 낼 것"
        2014년 05월 12일 10:1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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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디앙 독자 임미리씨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기고글을 보내왔다. 임미리씨는 세월호 사건이 터지자마자 시청광장, 광화문, 청와대 등에서 1인시위를 진행하며, 세월초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정권의 무능과 부패를 규탄하는 행동을 진행해왔다. 그이의 격한 마음과 분노의 행동을 촉구하는 마음이 담긴 글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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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왜 망설이는가? ‘이것이 나라인가’ 하는 탄식에서 나온 분노는 정확히 정부와 대통령을 겨냥하고 있는데 왜 박근혜더러 물러나라고 외치지 않는가? 왜 대통령이 책임져야 한다면서 대통령 퇴진을 외치지 않는가? 왜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면서 그 책임자에게 처벌을 맡기려 하는가?

    더 이상 유족을 핑계 삼지 말자. 분노하되 행동을 주저하는 사이 유족들이 거리로 나왔다. 유족을 위해 주저하고 후퇴했다 말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유족을 욕 보이는 행위다.

    선거 민주주의의 퇴색을 염려하지 말자. 선거 이전에 국가의 문제고 민주주의 이전에 생명의 문제다. 대안이 없다고 망설이지 말자. 대통령 퇴진 구호는 준비된 다른 대통령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 구실을 못한 국가에 대해 최종결정권자에게 그 책임을 묻는 것이다.

    정치적 선동은 자제해야 한다며 지방선거에서 심판하자고 하지 말자. 선동하지 말라고 협박한 현 정권의 선동을 되풀이하지 말자. 참사의 책임을 묻는 대신 분노만 이용하려는 정당과 후보는 지방선거에서 거꾸로 심판 당할 것이다.

    청소년 촛불

    5월 9일 자발적으로 안산에 모임 고등학생들의 촛불시위 모습

    기존의 권위와 결사들이 날선 분노를 경계하고 조급한 구호와 행동을 자제해야 한다며 어른 행세를 하는 사이 정부와 대통령을 향한 개인들의 분노가 여과 없이 터져 나오고 있다. 1인 시위와 실명 현수막, 청와대 게시판 등을 통해 개인의 이름으로 분노와 항의가 표출되고 있고, 개인의 자격으로 집회를 소집하고 있다.

    분노한 개인들이 정당과 다른 정치결사의 매개 없이 국가권력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우리를 믿지 않고 나를 믿으며 기존의 권위가 아니라 자신의 분노에 기댄 개인들이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행동에 나서고 있다.

    개인과 국가권력이 직접 대면하는 것은 분노가 원초적이기 때문이고 국가가 민낯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집단학살에 가까운 참사는 반자본의 계급적 분노도, 반제반미의 민족적 분노도, 반독재를 외치는 민주주의적 분노도 아닌, 생명과 관련한 원초적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반면 국가는 가용 자원과 인력을 조기 투입하지 않은 무책임, 해경도 통제하지 못하고 실종자 수조차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무능력에도 불구하고, 유족과 국민의 슬픔과 분노에는 무감각한 채 대통령 지키기에만 혈안이 돼 있다.

    분노한 개인들이 박근혜 퇴진을 외치고 있다. 날선 분노를 자제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가장 정직한 외침이기 때문이다. 외치면 물러날 것이라 기대해서가 아니라, 총체적 무책임, 무능력, 무감각에 항의하는 가장 적절한 구호이기 때문이다.

    우리라는 허상보다 나의 정직한 분노를 믿기 때문에, 기존의 영향력과 집단에 기댄 권위와 결사에는 더 이상 기대할 게 없기 때문에, 용기 내어 외치는 것이다. 권위와 결사의 힘으로 분노한 개인들을 기만하고 압박하려 들지 말라. 깃발을 내리라, 침묵하라 강제하지 말라. 단상 위에 서서 단상 아래 군중을 통제하려 들지 말라. 분노한 개인들이 박근혜 퇴진에 이어 외칠 것이다. 망설이고 주저한 당신들도 이제 그만 내려오라고.

    가까운 2008년 광우병 파동의 촛불 시위과 비교해보자. 집단지성의 출현이라 열광했던 2008년의 촛불시위는 국민 건강과 관련한 원초적 분노에서 시작됐던 만큼 초기 요구도 쇠고기 수입 반대에 머물렀다. 100일 이상 집회가 계속되면서 대운하와 민영화 반대로, 정권 퇴진의 요구로까지 확대됐으나 그러한 고양 과정을 이끈 것은 쟁쟁한 운동가들이 참여한 광우병 국민대책회의였다.

    인터넷 카페가 중심이 된 촛불시위는 초기에 참여 정당과 단체들에게 깃발을 내리라 요구했지만 시위 규모가 확대되면서 늘어나는 참가자들을 스스로 조직하지도 못했고, 지휘권도 대책회의에 넘겨줬다.

    4월 혁명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생활고에 항의하는 도시빈민의 원초적 분노에서 시작돼 중고등학생을 거쳐 대학생, 지식인의 정치적 요구로 발전했다.

    이번에는 다르다. 분노는 원초적이되 의식은 처음부터 고양돼 있고 개인의 실천에서 출발했으되 서로를 조직하고 있다. 의식을 정치적으로 고양시키고 조직화를 대신해줄 정치결사체가 불필요하다. 기존의 결사들은 이미 고양된 의식과 능력을 가진 개인들의 분노를 대리해줄 실력도 의욕도 없어 보인다. 더욱이 종북 프레임에 갇혀 위축되고 정치적 선동이라는 선동에 굴복당해 움츠리는 그들은 국민의 신뢰를 잃은 지도 이미 오래다.

    지금의 정권은 실종자들의 전원 몰살이라는 참사에도 불구하고 납득할 만한 사죄와 책임 규명 대신 여론을 호도하며 국민을 억압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상중의 유족을 길 위에서 밤새우게 한 것도 모자라 노골적인 자극으로 유족들의 자제를 허물려 하고 있다. 억눌러 둔 울분을 폭발시켜 이성을 상실한 폭도로 몰아붙이려 하고 있다. 무책임, 무능력, 무감각을 반성하기보다는 정당한 주장을 정치적 선동이라며 선동하고 있고, 선동은 ‘좌시’할 수 없다며 협박하고 있다.

    현재의 분노는 유족을 대리한 것이 아니다. 상중의 유족을 폭도로 만들어 그들을 고립시키려는 후안무치에 분노하는 것이며, 나의 입과 발을 묶어 노예로 만들려는 구시대적 야만에 분노하는 것이다. 더 이상 선동과 협박을 좌시해서는 안 된다.

    이들은 지난 1년 반 동안 갖은 선동과 협박으로 국민들을 위축시켰다. 지금 좌시한다면 앞으로 더 큰 선동과 협박으로 참사의 책임을 무마하려 들 것이다. 유족을 폭도로 만들어 고립시키지 않고 남은 3년 반을 노예로 살지 않기 위해서는 위축감을 떨쳐내야 한다. 선동의 자유를 되찾아 거꾸로 나쁜 정권을 협박해야 한다.

    권위를 믿지 말고, 대안 없는 우리를 탓하지 말고, 분노하는 나를 믿자. 정직한 분노가 낡은 권위를 해체하고 새로운 우리를 만들어 가리라는 것을 믿자. 이성이 가리키는 곳이 아니라 심장이 고동치는 쪽으로 가자. 역사는 늘 그래왔다. 분노가 앞장서 달리면 이성이 뒤따라왔다. 그때 분노와 이성의 간격이 개량의 크기다.

    그러나 앞장서 달리는 분노가 없으면 뒤따르는 이성도 없다. 그리고 지금의 분노는 충분히 이성적이기까지 하다. 창자가 끊어지는 슬픔과 분노에도 침착하게 자제하는 유족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주저하지 말자. 나의 분노를 기만하지 말고 분노가 가리키는 대로 달려가, 박근혜더러 이제 그만 물러나라 외치자.

    이것은 혁명이 아니다. 선거 민주주의의 부정도 아니고, 지방선거 거부가 필수도 아니다. 국가적 재난의 책임을 국가수반에게 묻는 것이며, 책임져야 할 자에게 다시 책임을 맡길 수 없기에 퇴진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혁명이다. 모든 구태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고 부정이다. 내려와야 할 것은 대통령뿐만이 아니다. 언론 구실, 지식인 구실, 야당 구실 못한 언론, 지식인, 야당을 포함해 분노를 조직하고 이끌기는커녕 눈치 보며 위축된 모든 권위와 결사들도 내려와야 한다. 지식과 명망의 권위를 버리고, 집단과 조직의 권세를 버리고, 완장 떼고 고개 숙인 채 분노한 개인들의 뒤를 따라야 한다.

    분노하고 항의할 자유를 되찾아 주저 말고 박근혜 퇴진을 외치자. 국민의 생명을 버린 정권은 반드시 무너진다는 선례를 만들자. 동시에 나의 나태와 비겁과 교만에도 책임을 묻자. 그것이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심정에 대한 답이다.

    필자소개
    <경기동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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