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이날'이 없는 나라
    [기고] 아이들이 싫어하는 말…"이게 다 널 위해서야"
        2014년 05월 02일 12:0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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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날이 없는 나라가 있다. 빈곤이 극심하여 어린이를 위한 사회적 자원이 부족한 경우도 있지만 따로 하루의 어린이날이 아니라 어린이 주간을 두는 싱가폴이나 그리스 같은 경우가 있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어린이날을 만들었고 가장 상업적으로 잘 활용하는 나라로 볼 수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중간고사 잘 보면 어린이날에 에버랜드 데려가고, 보통이면 서울랜드 가고, 못 보면 그냥 동네 행사 간다’는 말로 초등학생들 시험공부를 독려하는 부모들이 적지 않았다.

    어느 어린이날 에버랜드 앞의 모습

    어느 어린이날 에버랜드 앞의 모습

    근래에 중간/기말고사를 정해 놓고 치르지 않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지만 전 사회적인 애도와 추모 분위기 속에 소풍, 체험학습, 체육대회, 문화 행사들이 모두 취소되었다.

    관련된 직업을 가진 분들도 생계가 난망해졌고 아이들의 삶의 질도 대폭 악화되었다. 길고 긴 1학기에 그나마 숨통을 틔울 수 있는 계기가 다 사라지거나 미뤄졌다.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부끄럽다면서 아이들이 그렇게나 고대했던 행사를 취소한다는 게 어떤 면에서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도 거의 10년 가까이 어린이날 폐지를 주장해 온 사람으로서 행사 취소 사태가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각종 매체와 인터넷에 올라온 글을 보면 대한민국 성인들이 아동/청소년들에게 ‘미안하다, 부끄럽다’는 표현을 하루에 최소 10번은 쓰는 것 같다. 그렇게 미안하고 부끄러우면 시절이 그래서 그냥 한 번 내뱉는 말로 지나지 말고 적어도 두 가지는 확실하게 바꿔 나가는데 힘을 보태면 좋겠다.

    하나는 시한폭탄 해체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와 권능에 대한 것이다.

    언론에서 쏟아져 나오는 보도를 종합해 보면 그 배(세월호)는 좀 더 일찍 가라앉았거나 조만간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한 마디로 언제 터질 지 알 수 없는 시한폭탄이었고, 인천-제주를 오가는 승객들 중에서 누군가 언젠가는 횡액을 당하도록 되어 있는 러시안룰렛이었다.

    이 점에 동의한다면 이 사건은 재난이나 참사라기보다는 학살에 가깝다. 배의 상태를 잘 아는 선원들은 아예 회사를 그만두기도 했다.

    그러나 4월 17일 이후에도 연안 여객선의 안전 상태가 개선된 것 없이 관행대로 운행하더라는 보도를 보면 해운 관련된 기업/종사자/공무원들은 안전 불감증이라는 말조차 모르는 게 아닌가 싶다. 사고의 원인들이 하나하나 밝혀지는데 어떻게 시한폭탄을 그대로 두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시한폭탄이 워낙 많기 때문에 하나하나 해체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은 아닐까?

    조직에 문제가 있는데 혼자 나서서 내부고발자처럼 튀어봐야 관행과 이윤 추구와 무관심 또는 고립이라는 괴물의 먹이가 된다. 집단 속에서 조용히 있다가 혹시나 사고가 나면 같이 묻어가는 것이 현명하고 현실적인 선택일 수밖에 없다.

    해운만 문제인가 항공이나 KTX같은 대량 운송 수단의 위험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노동조합을 정부와 기업은 탄압하며 언론을 통제한다. 버스에서 대리운전까지 다 심상치 않다.

    핵발전소도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터지면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함께 난리를 겪게 되어서 그런 것인지지, 잠재적인 파괴력에 걸 맞는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사람이 꼭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야 하는 건 아니다. 한국의 업종과 업계 중에 비용 절감이나 관행이라는 이유로 인간을 언제든 대체 가능한 부속품으로 여기지 않는 곳이 없다.

    인간의 존엄과 건강과 생활을 부숴버리는 폭탄은 일상 어디나 지천에 깔려 있다. 한반도 전역에 겹겹이 깔린 시한폭탄을 내 업종과 작업장에서부터 해체하지 않으면 ‘부끄럽고 미안할 일’은 계속 일어나게 되어 있다. 내게 가장 가까운 폭탄을 동료와 함께 해체하지 않은 채 표현하는 당장의 미안함과 부끄러움은 그저 립 서비스에 불과하다.

    모 주간지에 실린 10대들의 좌담을 보니 사건 이후 부모들이 공부하라는 말을 적게 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아동/청소년들이 건강하게 어른들 곁에 살아 있는 것만으로 효도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인가? 이걸로 끝이면 오히려 정말 미성년자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 1위가 ‘공부나 해’이고 2위가 ‘이게 다 널 위해서야’다. 이런 말을 좀 덜 하거나 하지 않는 정도로 그쳐서는 곤란하다. 10대들이 자유와 권능을 통해 지금과 다른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준비를 실제로 해나갈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예를 몇 가지 들어 보자. 입시 제도를 혁신하는 것도 좋지만 고용 정책과 연계되지 않으면 교육과 입시를 아무리 바꿔도 소용없다. 그러나 수학 교육 과정만 손을 봐도 학생들이 느끼는 부담은 줄 것이다.

    수학 한 과목에 수 조원의 사교육비가 연간 투입되지만 결국 고등학생의 절반 이상은 수학을 포기한다. 초중등 수학 교과 과정 자체가 보통의 학생은 따라갈 수 없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관행이고 이공계 대학교수들의 만행이다. 대부분의 학생이 학교 수업과 간단한 과제만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교과 과정을 설계하면 일단 많은 학생들이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릴 조건이 된다.

    학생들이 공부하지 않고 놀러 다니면 게임폐인이나 되고 화장이나 하면서 어른들의 어두운 세계로 들어올까 걱정이고, 그러다 국가경쟁력이라는 게 약해질까 우려를 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10대들에게 미분적분만큼 또는 그 이상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과 권능의 경험이다.

    예를 들어 사건의 지속적인 조사와 재발 방지와 책임자 처벌 등을 위해 청문회에서 국정조사가 불가피할 텐데 청소년 대표 국정조사단을 조직하고 선발하여 청해진해운, 해경, 언딘, 관제센터, 경찰, 해양수산부에서 청와대까지 성역 없이 조사하도록 특별법을 만들면 좋겠다.

    어차피 수학여행이나 수련회, 체육대회, 체험학습이 죄다 취소되거나 보류되면서 수업을 하고 있으니 학교와 지역과 전국 단위에서 3~4일 또는 그 이상의 기간 동안 특별활동을 할 수 있다.

    청소년들은 성인에 비해 판단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 보았듯 성인들 중에 특히 높은 자리에 있다는 사람들 중에 제대로 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10대들의 판단력을 높이 살 증거가 많았다.

    정치는 더러운 것이니 깨끗한 사람이 가까이 해선 안 된다는 인식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지켜보았듯 깨끗하고 투명한 정치를 위해 모든 사람이 비판 정신과 시민 의식을 가지지 않으면 별스럽지 않게 끝날 수도 있던 일이 순식간에 역대급 대참사가 된다.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차세대들에게 가장 큰 선물을 한다면 청소년 대표 조사단을 법제화 하여 이후 교육 등 청소년 관련 정책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공적으로 드러낼 창구를 만드는 것이다. 어른들과 대등하게 말하고 결정하는 권능의 경험을 통해 다음 세대는 현 기성세대와 질적으로 다른 세대가 될 수 있다.

    가능할까? 적어도 가능여부를 묻지 말자. 허황되고 황망하기로 세월호 침몰과 그 이후 연달아 일어났던 그 모든 일들만큼 허황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상상력과 양심에 재갈을 물리는 사회는 스스로 망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예들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된다면 그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말과 마음만으로 끝내지 말고 어떻게 현실에서 실체화할 것인지 이제라도 한 마디씩 보탰으면 한다.

    나는 일단 이 나라가 어린이날 없는 나라였으면 좋겠다. 현재와 같은 기만적이고 상업적인 알량한 어린이날 대신에 한 달에 한 번 <어린이/청소년 자유의 날>을 만들거나 <계절별 자유놀이 주간>을 만들어 학원과 인강과 학습지를 년 4주간 중단시켰으면 한다.

    물론 그 이전에 아동/청소년 의회를 구성해서 대표들이 결정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면 좋겠다고 본다. 중요한 건 아동/청소년들이 성장하면서 자유와 권능의 경험을 누리도록 시스템을 바꾸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인간의 존엄성을 침몰시키는 일상의 시한폭탄을 해체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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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2011년 안산 단원중학교 2학년과 영어 수업을 함께 했다. 그 학생들 중 104명이 옆 학교에 진학하여 2014년 4월 16일 세월호를 탔다. 이미 세상을 떠난 아이들과 한참 더 세상을 살아갈 아이들과 아직 세상에 오지 않은 아이들 모두를 위해 이런저런 놀이운동을 하다가 현재는 이리저리 떠돌면서 1인 시위 겸 1인 거리축제를 하고 있다. UN 어린이 헌장 31조에 어린이는 쉴 권리와 놀 권리를 가진다고 되어 있다. 아동/청소년의 쉬고 놀 권리를 ‘성장권’이라한다. 그렇다. “놀이의 힘으로 아이가 자란다.” (트위터: 놀이의 힘 @wwwplaykoreanet) 

    필자소개
    놀이운동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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