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결한 분노’를
    누가 욕되게 하는가?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 잔인한 2014년 봄
        2014년 05월 02일 08:0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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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이 먹먹하다. 눈물바다가 흐른다. 어처구니가 없다. 울화통이 터진다. 분노가 솟구친다. 미처 활짝 펴보지 못한 생목숨들이 온갖 이해관계로 뒤엉킨 어른들의 우왕좌왕 속에서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고 말았다. 아니다. 아직 이러한 무책임한 단정을 내려서는 안 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쩌면 우리의 애들은 바닷속에서 구원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코 우리는 실낱같은 희망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 어른들의 그 알량한 무책임한 판단을 의심 없이 믿은 채 침몰한 배 안에 갇혀 있는 우리의 애들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침몰한 이후 구조의 노력을 다 기울였고, 언론의 역할도 어느 정도 다 하였고, 대통령의 사과 발언도 있었으며, 침몰과 직간접 관련한 기관과 사람들에 대한 문책과 비판 및 법적 처벌이 뒤따르고, 국민들의 조문과 사회 각계의 모금 등이 이뤄지는 속에서, 혹시라도, 조금이라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구조 행위를 어물쩍 늦추거나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면서 중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에게 간절한 것은 바닷속 깊은 곳에 있는 애들을 향한 구조의 치열한 몸부림이다. 비록 늦었지만, 정말 늦었지만, 살아 있는 자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정성과 노력을 쏟아야 한다.

    고1

    최첨단 장비를 동원하고, 그것의 쓰임에 한계가 있다면, 오랫동안 축적한 바다와 구조 활동에 관한 지혜를 모두 결집시켜 최적의 방법을 총동원하여 침몰선 구석구석을 눈으로 샅샅이 보고, 귀로 찬찬히 듣고, 손으로 세밀히 더듬거리고, 온몸의 촉수를 바짝 세우면서 어디선가 생존해 있을 우리의 애들을 단 한 명이라도 살려내야 한다. 그래서 ‘기적’으로 불리워도 좋다. 아니, ‘기적’이 우리들 눈 앞에 펼쳐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아무리 이성적 판단을 통해 보름 넘게 바닷속 침몰선 안에서 생존할 가능성이 없다고 할지라도 아직은, 정말, 아직은 이런 말을 할 때가 아니지 않는가. 우리가 정녕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할 것은 바닷속 애들을 향한 절망과 체념의 언어이며, 그들을 위해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성급히 단정을 짓는 무기력한 언어이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방책을 강구한다는 기만의 수사학으로 포장된 온갖 제도적 언어들이다.

    지상에 살아남은 어른들이 이미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애들과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채 실종자로 남아 있는 애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나약하지 않고 성숙한 어른으로서 남아 있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구조 활동을 멈춰서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이 어처구니 없는 생목숨을 앗아간 침몰과 관련한 사건의 진상을 투명히 규명해야 한다. 우리는 또렷이 기억한다. 유족들은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다음과 같이 힘주어 말하였다.

    “이 사고로 매일 울고 안타까워하는 국민 여러분. 제 자식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무능한 저희 유가족에게 더 이상 미안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히려 업무성과와 밥그릇 싸움으로 집단이기주의로 똘똘 뭉친 권력층과 선박관계자들 그리고 그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했으면서 아이를 찾으려고 허둥대는 학부모들에게 어떠한 지원이나 대안을 제시하지 않은 정부 및 관계기관에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유족들과 국민들은 분노한다. 유족들이 분명히 적시하고 있듯, 이번 침몰 사건과 관계된 타락할 대로 타락한 음험한 권력들, 그리고 사건 발생 무렵 가장 중요한 초기 구조 활동을 펼치지 못한 정부와 관계 기관의 혼돈, 이후 실질적 구조 활동을 체계적으로 민첩하게 전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회 지도층들의 어처구니 없는 행태와 수준 이하의 언어 망발이야말로 이 사건과 관련하여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이다.

    유족들은 마냥 슬픔과 허탈 속에 있지 않다.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대국민 사과를 한 것은 사과도 아니라고 신랄한 비판을 하는가 하면, 대통령이 보낸 조화를 분향소 밖으로 치우지 않았는가.

    이에 대해 청와대 대변인은 “유감스럽고 안타깝다”라고 말하는데, 청와대와 정부는 유족들이 왜 이러한 비판과 행위를 보이는지 뼈를 깎는 자기성찰을 해야 한다.

    만약 자기성찰을 하기 어렵다면, 이번 사건의 희생자와 유족을 애도하면서 김선우 시인이 쓴 시구 중 “생명을 보듬을 진심도 능력도 없는 자들이/사방에서 자동인형처럼 말한다./가만히 있으라, 시키는 대로 해라, 지시를 기다려라.”(<이 봄의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 부분을 곰곰 음미해주었으면 한다.

    청와대와 정부는 마치 자동인형처럼 “가만히 있으라, 시키는 대로 해라, 지시를 기다려라”고, 앵무새처럼 되뇌일 뿐 뭣 하나 진심으로 생명의 가치를 보듬어 안으려는 진정성이 없는 데 대한 유족과 국민들의 분노를 뼈저리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야 어른들은 고백한다.

    아까운 생명들이 가라앉는 동안
    왜 좀 더 신속하게 손을 쓰지 못했을까
    세계의 순위를 세던 경제 성장. IT 강국
    성급한 선진국 타령, 초대형 여객선이라는 말들이
    참담하고 부끄러울 뿐이다.
    — 문정희의 <울음바다> 부분

    고3

    아마도 바닷속 애들은 속울음으로 내뱉을 것이다.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IT 강국 대한민국이 침몰하는 배 안에 있는 우리들을 왜, 좀 더 일찍 구해주지 못했을까요?

    먼 바다도 아니고 가까운 우리 바다에서 가라앉은 배 안에 있는 우리들을 왜, 좀 더 일찍 구해주지 못했을까요?

    출항하기 전 처음으로 타보는 초대형 여객선 앞에서 설레이고 으시대는 마음으로 부풀었을 우리들이 왜, 이 모든 것들이 거짓투성이라는 사실에 진저리를 쳐야 할까요?

    왜, 좀 더 일찍 어른들은 대한민국의 이런 후진적이고 퇴행적이면서 기만의 수사학으로 위장된 실상을 가르쳐주지 않았을까요?

    왜, 좀 더 일찍 대한민국의 이러한 위선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키워주지 않고, 우리들 스스로 귀중한 생명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지 않았을까요?

    그렇다. 살아남은 우리에게 이 같은 그들의 속울음은 정신 없이 앞만 보고 살아온 우리 모두의 삶을 향한 조종(弔鐘)이다. 또한 그들의 속울음은 ‘순결한 분노’다. “순결한 분노는 사회적 명상이다”(백무산의 <순결한 분노>).

    마냥 체념하고 절망적 슬픔에 결코 사로잡혀서 안 된다. 주검으로 돌아온 애들과 바닷속 애들이 우리에게 타전하는 저 침묵의 그 무엇은 그들의 ‘순결한 분노’를 결코 욕되게 해서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순결한 분노’는 또한 살아남은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2014년의 봄은 참으로 잔인하다. 그리고 살아남은 우리 모두가 더 이상 이번 사건의 희생자와 유족들의 저 ‘순결한 분노’를 욕되게 하지 않는 애도의 시간을 함께 해야 하리라. 아, 먹먹한 바닷속의 공포와 사투를 벌였을 애들의 손아귀에 꽉 쥐어졌을 핸드폰의 문자들이 눈 앞에 어른어른하다.

    쏟아져 들어 오는 깜깜한 물을 밀어냈을
    가녀린 손가락들
    나는 괜찮다고 바깥 세상을 안심시켜 주던
    가족들 목소리가 여운으로 남은
    핸드폰을 다급히 품고
    물 속에서 마지막으로 불러 보았을
    공기방울 글씨

    엄마,
    아빠,
    사랑해!

    아, 이 공기, 숨 쉬기도 미안한 사월.
    — 함민복의 <숨쉬기도 미안한 사월> 부분

    필자소개
    문학평론가, 광운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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