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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고] 영화 <두 개의 문>을 보고 나서
        2012년 06월 22일 06:3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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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를 보고 나서 오랜 만에, 2009년 1월 20일 아침, 칼라TV 화면을 통해 용산 참사가 발행했다는 것을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려 보았다. 불길이 너무 거센 남일당 옥상 한 구석에서 철거민이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불길에 휩싸이는 장면은 충격일 수밖에 없었고, 하루 이상을 넋이 나간 채 보냈다.

    당시 주요 공중파 뉴스에서 이 장면이 반복적으로 방영되었고, 촛불시위에 대한 과격한 진압 직후 사람들의 분노가 금새 용산 참사로 쏠릴 것만 같았다. 국민들의 공분은 거셌고, 제대로 해결되지 않고는 사망자들의 장례를 치를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 보였다.

    ‘누구도 그런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던, 하루 아침에 사람들이 불에 타서 죽은 사건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는 것이지, 현실에서 접할 수 있는 사건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 사건의 결말이 지금과 같은 것으로 나타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영화 <두 개의 문>의 포스터

    당시 참사로 불에 타 죽거나 가까스로 건물 밖으로 뛰어내려 살아남았던 사람들은 대법원의 최종판결로 ‘살인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반면 당시 용산 참사의 진압 책임자들은 이후 어떠한 정치적 사법적 책임도 지지 않았다. 이들 용산 참사의 피해자들이 법적으로 ‘살인자’ 누명을 벗을 수 있는 길은 현재의 대한민국에는 없다.

    <두 개의 문>은 그렇게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 지 3년의 시간, 당시보다 더 큰 고통과 절망의 시간을 감내해야 했던 유가족과 생존자들의 시간을 되살려 냈다.

    우리가 이 사건을 접했던 그 영상이 일련의 구조의 결과라는 점을 고통스럽게 직시하는 방법이 필요했다. 1월 20일, 사람들이 접했던 ‘사람이 불에 태워지는’ 장면은 우연히 찍힌, 외국의 전쟁 장면 같은 것이 아니다.

    그 장면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기는 너무나 쉬우나, 그 장면의 책임을 묻는 과정은 분노하는 이들의 손에서 벗어나, 철저히 ‘권력의 통제와 자의’에만 놓여 있는 것이었다.

    영화는 ‘권력의 통제와 자의’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이는 증언 장면을 재구성하여 그 장면이 만들어지게 된 일련의 과정을 되묻는다.

    그리고 그 과정은 놀랄 만큼 자로 잰 듯 하고, 너무나 차가우며, 경찰/철거민 누구에게도 감정이입을 하기가 어려운 화면 배치들로 이루어진다.

    ‘아무런 방비 없이 사람이 불에 태워질 수밖에 없던’ 그 장면은 농성에 올라간 지 하루 만에 경찰 특공대에게 진압 명령이 떨어지고, 내부 구조나 상황도 전달받지 못하고 별반 장비도 갖추지 못한 채 올라가서 ‘무리’하게 ‘진압’하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참사였다.

    우리는 경찰 특공대가 그렇게 무리하게 올라가고 진압하려면 어떤 비극이 일어날지 미리 알고 있지만, 당시 경찰 특공대는 상부의 명령에, 내부의 위험함을 접하고도 무언가에 쫓겨 올라간다.

    우리가 그저 ‘쫓겨 올라갔다’고도 경찰을 비난할 수도 없이 무력해지고 마는 것은 영화 속에서 이 사건-서사를 구성하는 것이 경찰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화면 자료가 된 경찰 채증 장면, 그리고 망루 너머에서 망루를 계속 촬영했던 칼라 TV와 사자후TV의 장면들은 망루 내부의 철거민 시선에서 찍은 장면들이 아니다.

    우리는 망루 안에 사람이 있고 진압에 계속 저항하고 있음은 알고 있지만, 영화 속 화면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3층으로, 4층으로 그리고 마지막 망루로 올라간다.

    그리고 1차 화재가 끝나고 진압이 마무리 된 것처럼 느꼈을 때 소방관들은 ‘특공대가 역시 유능하다’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화재라는 결말을 모르고 계속 경찰 입장에서 채증 영상들을 본 사람들은 아마 1차 화재가 진압될 무렵 비슷한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특공대 영상을 보면서도 비슷하지 않은가.)

    물론 그런 결과는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장면이 2차 화재-용산 참사라는 최종 비극-의 전 장면이란 점을 알고 있는 우리에게 그 소방관들이 감정이라고는 없는, 진압 성공에만 몰두한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경찰의 업무 메뉴얼(도심 소요 발생-진압)으로만 보면 이는 ‘극심한 소요 및 혼란, 어려운 상황’에서도 성공적으로 ‘진압’을 할 수 있었던 장면들이다.

    영화가 우리의 기억을 필요로 하는 부분은 이 부분이다. 비극을 기억하는 관객들은 그 서사에 대해 감정이입을 하지 않도록, 경찰들의 흔들림, 머뭇거림, 그들이 느꼈을 공포감, 괴로움을 ‘관조’할 수 있도록 요구받는다. 감독들의 여성주의적 시선과 감수성이 빛나고 관객들에게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는 부분은 이 부분이다.

    그렇게 거리두기를 해서야 어떠한 어려움에도 굽히지 않고 성공해야겠다는 상부/경찰 지도 라인의 욕심이 빚어낸 비극적 결말(1월 20일 새벽에 인터넷을 통해 볼 수밖에 없었던 영상)을 영화 마지막에 선사 받고도 견뎌낼 수 있다.

    그리고 언뜻 보기에 무심해 보이는 영상들 속에, 경찰들이 달려가는 장면 너머에 사람이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낼 수 있다. 용산 참사라는 과정에 공범이 되지 않기 위한 윤리적 기억을 <두 개의 문>은 관객의 감각 속에 새기라고 주문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야만 비극을 견디면서도 무뎌지지 않을 수 있고, 기억의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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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적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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