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유일한 질문
한국 사회 시스템은 그 자체로 '살인적' 시스템
    2014년 04월 27일 03:3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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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세월”호 참사로 느낀 것은, “말”의 어떤 본질적 한계입니다. 참사 소식을 접한 뒤에 한참 동안 아무 글도 쓸 수 없었습니다. 차가운 물 속에서 마지막 순간들을 보내게 된 아이들의 고통을 생각하거나, 삶의 의미를 잃은 그 부모들의 심정을 생각하면…그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순간에 “말”은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유족들을 부둥켜안고 같이 울고 싶은 심정입니다. 물론 전국이 다같이 그들과 함께 울어도 그들이 느낄 평생의 슬픔을 전혀 덜어드릴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정말 이럴 때야말로 “말”로 먹고 사는 저 자신의 한계부터 자각하게 됩니다.

그래도, 그래도, 이와 같은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더 번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말”, 즉 논리적 사고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사실 이번 일은 거의 “전형”에 가깝습니다. 한국형 자본주의 토양에서 부득이하게 일어나게 돼 있는 “사회적 대량 타살”의 전형이란 말입니다.

한국형 자본주의는 여태까지도 계속해서 사람들을 죽여 왔습니다. 주로 가난한 사람들 말입니다. 우리와 많은 면에서 쌍둥이라고 할 일본을 제외한 다른 산업화된 국가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고독사”(주로 가난한 노인 분들의 아사)도 그렇고 세계 최고(?)에 가까운 자살율도 그렇고 OECD 국가 중 최악의 산재사망 통계도 그렇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일 년에 약 2천 명의 노동자들은 목숨을 잃습니다. 안전 장비 등에 약간이라도 투자했다면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사고사들이 대부분인데 이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주류사회”는 무관심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참사나, 여태까지의 직장에서의 죽음의 행렬이나, 그 구조적 원인은 똑같습니다. 인명이고 뭐고 하등의 관심을 보여주지 않고 사람을 죽이면서까지 무한대로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들이 이 나라의 실질적인 주인이라는 건 주된 이유입니다. 그들을 견제할, 즉 기업에 중립적이라도 할 수 있는 “공공성이 있는 국가”는 대한민국에 없습니다.

박노자 427

세월호 희생자 분향소(위)와 산재사망율 방송화면

대한민국은, 정확히 이야기하면 청해진해운과 같은 살인기업의 “해결사” 격이 됩니다. 그 불법에 눈 감아 주고 그 “번영”을 보장해주는 “해결사” 말입니다.

기업의 행동대는 언제 그 기업의 희생자들에 대한 관심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늑장 대응과 부실하기 짝이 없는 구조노력은 아주 “논리적”이기만 합니다. “국가”를 사칭하는 악덕기업의 구사대가 그 기업의 피해자들까지 왜 도와야 하는가요?

기업하기 좋은 나라 대한민국은, 가난뱅이에게는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이야기하는 “위험사회”(Risikogesellschaft) 그 자체입니다. 돈이 없을수록, “위치”가 낮을수록 당신 생명의 가치는 제로에 가까워집니다.

안산 노동자, 서민 자녀들은 언제 사고가 날지 모를 고물 배를 타고 학교 여행을 다녀야 하지만, 강남에 위치한 학교라면? 제주도에 가도 비행기를 타겠죠? 상당 부분은 아예 제주도가 아닌 괌이나 하와이로 가겠지만 말입니다. 사고뭉치인 국적기를 타지 않고 조금 더 편안하고 안전한 해외항공을 타고서 말입니다.

“세월”호로부터 탈출한 선원들을 보면 거의 선장을 위시한 간부들인데 하급 선원들은 대개 승객들과 함께 그 운명을 같이 했습니다. <천안함> 침몰 때도 장교들은 구출되고 거의 병사들만 죽지 않았습니까? 이건 대한민국에서는 우연이 아닌 필연입니다.

지구상의 그 어느 산업화된 사회보다도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한국에서는 돈이 없고 위치가 낮은 사람은 돈벌이의 “수단”에 불과합니다. 계속해서 과적 운항하고, “비용절감”하기 위해 화물 결박도 제대로 안하는 고물배를 타야 하는 서민들도 기업으로서는 돈벌이의 “재료”에 불과하고, 계약직인 선장이나 선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선장이 보인 행동을 합리화하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살신성인했다 하더라도 과연 살인 자본과 살인 정권이 합작해서 만들어낸 “대세”를 어디까지 바꿀 수 있었을까요?

가장 치명적인 것은 그나마 생명을 구할 확률이 있었던 첫날에 수중 구조작업을 3번밖에, 16명만이 했던 것인데, 과연 강남에 있는 학교의 아이들을 태운 배이었다면 이 정도 직무태만을 했을까 싶습니다. 선장이 아무리 영웅적으로 행동해도, 구조하기 위해 필수적인 자원들을 독점하는 정부가 가난한 사람을 인간 취급하지 않는 곳에서는 그 한계가 뻔하기만 합니다.

아이들을 죽인 건 한국형 자본주의의 시스템입니다. 안전운항에 대한 감독권을 바로 이해 당사자인 해운기업들의 이익조합인 해운조합/한국선급이 가지고 있고, 퇴직 이후에 바로 그런 이익단체로 아마쿠다리 (天下り)식으로 내려 앉을 해양수산부 직원들이 관리대상인 기업에게 “봉사”해주고 있고, 해양경찰청이 안전 검사하는 척만 하고, 기업의 가장 큰 해결사인 정부는 수입 선박의 수명 제한을 20년에서 30년으로 풀어주고, 아무리 적정량 이상 2-3배의 화물을 계속 실어 과적운항을 해도 그 누구도 막을 기관도 없고…

행성들이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돌듯이, 한국적 시스템에서는 정부의 모든 기관들은 오로지 기업의 사적 이윤 추구를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서민들의 목숨을 대가로 하는 그 이윤에 그들도 한 몫을 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시스템은 그 자체로서는 살인적입니다. 구조적으로 살인적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어느 자본주의 시스템이나 다 그렇지만, 한국만큼 그 살인성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자본의 시스템은. 정말 찾기가 힘듭니다.

이 시스템의 관리자들은 저들의 돈벌이 수단인 대한민국 인구의 대부분에 대한 저들의 소감을 아예 감추려 하지도 않습니다. “국민 정서 미개” 따위의 망언들은 우연이라기보다는 저들의 착취 대상자들에 대한 저들의 기본 관념이라고 보시면 정확합니다.

황제 라면, 기념 촬영, “불행한 일만이 아니었다”는 따위의 망언들… 결국 저는 한 가지 질문만 하고 싶습니다. 저들이 이 시스템을 어떤 목적으로 운영하고 어떻게 운영하는지, 그리고 저들이 우리에 대해서 가지는 생각이 어떤 건지 뻔히 다 알면서도 왜 계속 참고 있나요?

왜 한 번 크게 들고 일어날 수 없을까요? 왜 1987년 여름과 가을 같은 파업 대투쟁과 백만 명 단위의 도심 집회를 통해서 저들에게 타격을 가하고, 저 시스템의 부분적 수정이라도 쟁취해볼 수 없을까요?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있을수록 죽어가는 사람의 수만 커져갈 것입니다. 결국 우리 무기력도 사회적 타살의 하나의 원인이 됩니다.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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