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키나와' 분단과 복귀
    국제연대 운동과 한반도 ①
        2014년 04월 25일 11:1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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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일본 오키나와 문제를 둘러싼 국제적 흐름과 운동에 대해 살펴본다. 오키나와의 문제는 오래된 현재의 이야기이고, 우리와 무관한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과 한반도, 아시아 인민들과 연관된 문제이기도 하다. 이후 필자의 글이 이어지기 때문에 다소 긴 분량이지만 나누지 않고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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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하나의‘분단국가’ 일본

    “아시아에는 세 개의 분단국가가 존재한다. 북위 38도선으로 분단된 한반도의 남북과 17도선으로 분단된 베트남,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북위 27도선에 의한 일본과 오키나와의 분단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인이 38도선이나 17도선은 알지만 27도선은 모르고 있다.”

    이것은 오키나와 현대사 연구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아라사키 모리테루(新崎盛暉)가 자신의 고교시절인 1950년대 중반에 품었던 생각이었다.

    “일본도 분단국가였다고?” 적어도 당시의 오키나와 주민들은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볼 수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과 초기 냉전이 낳은 분단국가로 우리는 한반도, 독일, 중국, 베트남을 떠올리는데, 실은 패전 이후 일본도 두 지역으로 나뉘어 그 각각에 다른 통치기구가 존재했던 ‘분단국가’였다.

    미군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섬을 점령한 그 순간부터 주둔을 개시하여 오키나와에 아시아의 군사거점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은 연합국의 점령상태에서 독립하여 주권을 회복했지만, 오키나와는 일본에서 분리되어 미군의 배타적 지배하에 놓임으로써 분단국가가 확정되었다. 또한 이와 동시에 체결된 미일안보조약으로 미군에게는 일본 전토의 항구적 군사기지화가 가능해졌다.

    하지만, 특히 오키나와를 일본에서 분리시킴으로써 일본에 설령 반미정권이 출현하더라도 철수하지 않아도 되는 군사기지 혹은 기본적 인권과 전쟁포기(평화주의)를 담은 일본국헌법의 보호가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를 오키나와에 확보한 것이다. ‘군사 보호령’으로서의 일본과 ‘군사 식민지’로서의 오키나와. 미국의 이른바 ‘두 개의 일본’ 정책(“Two-Japan” Policy)이다.

    따라서 일본과 오키나와의 분단은 전후 세계전략을 위해 미국이 양자에 차별적인 지배 형태를 적용한 것에서 기인했다는 점에서, 미소 냉전질서 하에 격렬한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거듭했던 다른 분단국가들과는 그 기원을 달리했다.

    더욱이 천황 스스로가 맥아더에게 일본의 주권 회복을 위해 오키나와를 무기한으로 미국에 제공하겠다는 제안을 한 것에서 극명히 알 수 있듯이, 일본과 오키나와의 분단은 미국과 일본의 철저한 공조 하에 이루어진 영토분할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분단의 아픔은 오키나와에 일방적인 것이었다.

    본토는 분단을 ‘이용’해서 미일안보체제의 부담을 대체로 오키나와로 떠밀면서 고도경제성장을 이루었다. 그것은 ‘분단’ 시기에 자행된 미군기지의 오키나와 집중 상황이 극명하게 말해준다. 즉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두에 일본 본토의 미군기지가 약 1/4로 축소된 반면, 미군 통치 하에 있던 오키나와 미군기지는 약 2배로 증가했다. 69년부터 74년까지 본토의 기지는 약 1/3이 더 줄어 주일미군기지의 약 74%가 오키나와에 집중된 것이다.

    그로 인해 분단선으로서의 북위 27도선은 다른 경계선에 비해 세계적인 주목거리가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일본인들조차도 강화조약 체결로 회복된 국가주권을 구가하느라, 혹은 미군기지를 본토에서 (실은 오키나와로) 철수시킨 기쁨에 들뜬 나머지, 오키나와의 희생과 고통을 돌아보지 않게 되고 일본이 분단국가라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맥아더에게 보낸 천황의 제안에 장기 조차(a long-term lease)라는 표현이 보이듯이, 대개의 경우 오키나와를 미국의 조차지 정도로 여기지 않았을까. 아라사키의 위의 회고에서는 무심한 본토 사람들에 대한 불만이나 서운함 혹은 절망감까지도 느껴진다.

    한데 본토 사람들의 이와 같은 정치적 무관심이나 무시는 통일에의 의지에 있어서도 오키나와 사람들과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온도 차를 낳았다. 아니, 그것은 분단된 양자가 서로 다가가 하나가 되는 통일 운동(reunification)도 아니었고, 일탈 상태에 있는 오키나와가 일본의 일원이었던 ‘본래’ 상태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을 의미하는 ‘복귀’ 운동(reversion)으로 명명되었다.

    이 온도 차는 72년에 미군의 통치권이 반환되고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복귀’한 후에도 여전히 오키나와를 이등국민으로 취급하며 오키나와는 일본을 위해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차별의식으로 이어진다. 오키나와를 둘러싼 모든 문제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토복귀 운동의개시

    오키나와에서 ‘조국’ 복귀 운동이 처음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를 앞둔 1950년대 초이다. 그 이전까지 오키나와의 민심은 오키나와 독립도 시야에 넣은 미국 신탁통치안과 일본 복귀안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일본에 대한 불신과 미국에 대한 신뢰가 작용했다.

    그런데 일본에 대한 불신이야 ‘류큐 처분’ 이래의 일본통치시대에 겪었던 오랜 차별과 그 귀결로서 본토 사수라는 미명하에 섬 전체가 커다란 희생을 치렀던 오키나와 전투의 경험에 입각해 있었지만, 미국에 대한 신뢰는 전혀 근거가 없는 막연한 것이었다.

    물론 패전 초기에 미군은 일본의 비군사화와 민주화를 기조로 하는 점령정책을 실시했고, 대일본제국의 정치범이라는 수감 상태에서 해방되었던 일본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좌파세력조차도 미군을 ‘해방군’으로 간주했을 정도였으니, ‘자유민주주의’ 국가 미국의 경제적 지원과 미군의 군사 보호 아래 전후 복구를 달성한 후 자치를 거쳐 이윽고 독립으로의 길을 걷고자 하는 경향이 존재했던 것은 당시로서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냉전체제가 본격화하여 오키나와의 군사기지화가 급속히 추진되면서 오키나와 주민들의 인권과 복지가 급속히 제한되고 본토와의 격차가 급속히 벌어지자, 이 소망적 사고도 급속히 무너지게 된다.

    특히 1949년 10월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하자, 미군은 오키나와의 무기한 확보를 언명하며 식량가격 폭등 등에 반발하던 오키나와 의회를 해산시켜 버린다. 이것은 주석을 행정의 장으로 하는 류큐 정부를 두고 입법기관인 입법원을 두어 일정한 자치를 인정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도, 미군이 주석을 임명하고 최종 의사결정은 미군이 행사하는 미군통치시대를 예견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러한 폭압적 지배는 출격기지로서 섬 전체에 임전태세가 취해졌던 한국전쟁기에 더욱더 극심해졌다. 오키나와 전투의 악몽에 다시금 휩싸인 주민들이 미군에 의한 신탁통치는 오키나와를 군사기지로 이용하려는 명분일 뿐이라는 확신을 갖고, 헌법의 보호 아래 순조로운 전후 부흥을 이루고 있던 일본으로의 복귀를 희망하는 쪽으로 기울게 된 것 또한 당시로서는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오키나와의 분리 통치가 확실시된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를 앞둔 1951년 4월에 결성된 최초의 복귀운동 조직인 일본복귀촉진기성회가 복귀 서명운동을 실시했을 때는 이미 해당자의 72%가 복귀에 찬성을 표명했다. 이 명부는 강화회의 의장 앞으로 보내졌지만 이들의 일본 복귀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952년에 미군의 오키나와 통치가 확정된 것이다. 이로써 미국의 현행법으로부터도 일본의 현행법으로부터도 보호를 받지 못하는 오키나와 주민들의 고투의 역사가 시작된다.

    이후 미군은 본격적인 군사기지 구축 및 확대를 추진하여 1953년에 토지수용령을 공포하고 55년에 토지 강제 수용을 개시하며 주민들의 생활 터전을 빼앗아 갔다.

    이러한 인권의 사각지대에서는 유아강간살인부터 부녀자 폭행이나 살인, 민간인 사살사건 등 미군의 흉악 범죄가 끊이지 않았으며, 미군 차량에 의해 민간인이 압사하는 일본판 ‘효순이 미선이 사건’도 빈발했으나, 가해자들에 대한 처벌도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욱이 베트남 전쟁에 대비하여 오키나와에는 나이키나 IRBM, 메이스B 등의 미사일뿐만 아니라, 핵탄두 미사일을 탑재할 수 있는 선더치프, B52 등의 폭격기도 배치되었는데, 민간인 거주지에 제트기가 추락하거나 탄약고 등이 낙하하여 인명피해를 내는 사고도 끊이지 않았으며, 미사일 발사연습 등으로 농작물 피해가 나기도 했다.

    당시 오키나와는 핵무기 저장고로도 기능했는데, 오키나와의 통치권이 일본으로 반환되는 1972년까지 약 1,000발의 핵폭탄이 가데나 기지에 상비되어 타이완 해협 위기, 쿠바 위기, 베트남 전쟁 당시에 그 사용이 검토되었다. 원자력잠수함도 기항하면서 방사성 물질인 코발트60이 방출되는 사고를 일으키기도 했으며, 비밀리에 비축해 둔 독가스가 누출되는 사고도 발생했다. 최근 밝혀진 바에 의하면, 고엽제나 생화학무기 산포 실험이 행해지기도 했다.

    이렇게 폭력과 강압에 의해 생활의 터전을 잃고 군사기지가 배태하는 온갖 폐해와 부조리를 운명처럼 짊어지게 된 오키나와 주민들은 이윽고 섬 전체의 저항으로 맞선다.

    당시에는 신문이나 잡지, 라디오 등의 미디어도 검열 대상이었고, 본토 도항의 자유도 통제당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도 미군의 인가를 받아야 했다(62년에 노조 허가 수속 철폐). 그것도 기지 관계 노동자들은 노동3법 적용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주민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겨진 선택지는 타협이나 회유 혹은 복종이나 체념이 아니라 항상 저항이었다. 그들은 서명운동, 진정, 청원, 집회, 농성, 단식, (총)파업 같은 비폭력 투쟁에서 포격연습 실력 저지, 폭동 등의 폭력 투쟁까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저항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 운동들은 이윽고 본토 복귀 운동으로 수렴되어 갔다.

    그 과정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는 것이 55년의 토지 강제 수용으로 농경지를 빼앗긴 이에지마(伊江島) 섬사람들의 저항운동이다. 이들은 청원도 해 보고 농성도 해 보고, 빼앗긴 땅으로 들어가 경작을 강행하는 불복종 운동도 해 보다가 체포되어 유죄판결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들에겐 좌절도 사치였다.

    그들은 섬 전체를 돌며 미군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노래를 하면서 구걸 행진을 전개하여, 이윽고 1956년의 섬 전체 투쟁(Island-wide Struggle)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되었다. 당시 그들은 저항운동의 일환으로 일본국민에게도 탄원서를 보냈다.

    “우리들의 고통을, 미군의 무례함을 도대체 어디에 호소해야 할까요. 오키나와에서는 군정부(미군 당국), 류큐 정부, 입법원, 토지연합회 등에 우리의 힘과 지혜를 모두 짜내서 호소했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습니다. 조국의 여러분, 지금의 우리들은 오로지 조국의 여러분 이외에 의지할 길을 모릅니다. 부디 우리들에게 협력과 이 무서운 토지문제의 해결책을 가르쳐 주세요.”

    이에지마 사람들은 미군 통치하에 억압과 착취의 대상이 되어 고통받고 있는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유력한 구원자로서 일본사람들의 동포애에 호소하고 있다. 이렇게 오키나와 주민들이 일본 내셔널리즘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단순한 조국 지향이나 동화 욕구라기보다, 오키나와의 땅을 지키려는 투쟁이 일본의 국토를 지키는 투쟁임을 일본인들에게 상기시킴으로써 오키나와의 저항운동에 무관심한 일본인들을 자극하여 그들의 관심과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함이기도 했다.

    즉 오키나와의 본토 복귀에의 갈망은, 일본국헌법에 의해 인권이 보호되고 본토와 오키나와 사이의 경제적 격차가 해소되어 본토와 동등한 수준으로 ‘복귀’하려는 의지를 떼어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오키나와의 핍박은 일본의 핍박이고 우리는 본래 ‘하나’이므로 함께 억압에 맞서야 한다는 주민들의 호소에 보수정권이나 우파 세력들은 거의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군은 저항하는 주민들을 ‘빨갱이’로 매도하고 “복귀운동은 국제공산주의 운동을 이롭게 한다”고 하여 이 운동에 대해 노골적인 탄압을 강화했으며, 당시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도 공산주의의 위협이 계속되는 한 오키나와를 무기한 보유해야 한다고 누차 선언했다.

    그런 와중에 60년대 오키나와 저항운동의 모체가 된 ‘오키나와 현 조국 복귀 협의회’(이하 ‘복귀협’)가 결성된 것이다. 1960년 4월 28일의 일이다.

    제3세계 해방운동의 격랑 속으로: 일본판 민족해방(NL) vs 민중민주(PD)

    그런데 왜 복귀협은 토지강제수용이 개시된 1950년대 중반도 아니고 베트남 전쟁이 개시되는 1960년대 중반도 아니고 1960년에 결성된 것일까?

    오키나와1

    복귀협 결성대회 모습

    그것은 아무래도 1959년부터 본토에서 격렬하게 전개된 안보반대투쟁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50년대 말에 미일 양국은 안보조약의 개정에 착수하는데, 그 골자는 주일미군의 존재 근거가 일본의 안보에서 극동의 안보 유지로 확대된 것과 미일의 공동방위가 규정된 군사동맹조약이었기 때문에, 일본이 미국의 전쟁에 말려들 가능성이 증대된다고 하여 여론의 거센 반발에 부딪친다.

    마침 안보조약에 기초한 미군 주둔은 위헌이라는 법원 판결(伊達判決)도 나오고, 사회당, 공산당, 총평(総評), 시민단체 등이 공동투쟁조직을 결성하여 50년대 중반부터 고조된 반미감정이 안보반대투쟁으로 수렴되어 60년에 전후 최대의 저항운동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복귀운동의 중심단체였던 오키나와 교직원회를 중심으로 한 28개의 단체가 합류한 통일전선조직으로서의 ‘복귀협’도 결성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당시 세계사에 새로운 격랑으로 등장한 제3세계 해방운동이라는 국제적인 동향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특히 민족독립의 움직임이 세계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50년대 중반 이후로, 1954년에 프랑스의 패배로 끝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단락되는 동시에 알제리 독립전쟁이 발발했다. 56년에는 제2차 중동전쟁이 있었고, 59년에는 쿠바 혁명이 시작되었다.

    그러한 움직임은 아프리카 17개국이 독립을 달성하는 1960년이라는 ‘아프리카의 해’로 집약되었다. 이렇게 아시아와 아프리카(이른바 A·A)는 미소 중심의 냉전적 세계질서의 지형을 교란시키는 거대한 축이 되어 마침내 비동맹중립주의를 표방하는 ‘제3세계’로 명명되었던 것이다.

    안보반대투쟁은 이러한 국제적인 거대한 움직임에 연동되어 있었으며, 그러한 흐름 속에 바로 이웃나라인 남한에서도 4.19혁명이 일어났다. 대학생으로 안보투쟁에 참가했던 미래의 오키나와 연구자 아라사키는 안보투쟁을 이끌던 대학생들이 “바로 지금 한국 학생들이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우리 일본 학생들도 (무너뜨리자)”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비로소 한국이 가까이 다가온 것처럼 느낀다.

    필자는 ‘복귀협’의 결성이 50년대 후반의 섬 전체 투쟁으로 얻어진 자신감이, 미일관계의 새로운 전환기에 일어난 본토의 저항운동뿐만 아니라 민족해방운동의 분출이라는 국제적인 격동기와 조우하면서 맺어진 결실이라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자 한다.

    본래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국제연대는 저항운동의 필연적인 귀결이자 지향점이기도 했다. 오키나와에 가해지는 억압적 현실을 오키나와 내부에서 바꾸지 못하고, 일본에 호소해도 무관심과 비협조로 한계에 부딪칠 때, 그들은 일본의 오키나와 지원 단체와의 협력 속에서 국제적인 연대운동에 호소하여 돌파구를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미 토지 강제 수용 문제가 불거진 1954년에 미국에서 미군의 비인권적 토지 강제 수용에 관한 속보를 접한 국제인권연맹 의장은 일본 자유인권협회에 서한을 보내 철저한 진상조사를 의뢰한다. 이에 따라 독자적인 조사를 행한 자유인권협회의 조사 결과가 55년 1월에 발표되고 그것이 언론에 다루어지면서 본토의 여론도 주목하게 되었다.

    자유인권협회는 같은 달에 인도에서 개최된 아시아법률가회의에도 일본 대표를 파견하여 오키나와문제를 알리게 했으며, 오키나와 인권문제의 현지조사위 조직 결의를 이끌어냈다.

    이에 이어 4월에 “아시아의 연대와 평화”를 내걸고 인도, 중국, 일본, 소련, 베트남, 북한 등의 14개국 민간 대표 약 200명이 참가한 가운데 뉴델리에서 개최된 아시아 각국회의에서는 만장일치로 ‘오키나와의 즉각적인 일본 반환 요구’가 결의되었다. 일본대표 중에는 이후에 복귀협의 회장이 되는 가미야마 세료(神山政良)가 참가했다.

    아울러 뉴델리 회의는 첫 북일간 국교정상화 제안이었던 ‘남일 성명’(1955년 2월) 이후 양국 간 최초의 접촉이 실현된 장이었는데, 그것은 동시에 북한이 오키나와 문제에 처음으로 관련을 맺은 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후에도 1956년 5월에는 국제자유노련 조사단이 오키나와를 방문했으며, 57년 9월에는 도쿄 복귀 기성회가 오키나와의 조기 반환에 대해 A·A그룹에 요청했고, 12월에 일본 대표를 포함한 44개국 대표의 참가 속에 카이로에서 개최된 제1회 A·A인민연대회의(OSPAA)에서는 오키나와의 일본 반환이 결의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이 미일 당국을 긴장시켜 그 대책에 부심하게 만들고 국제사회의 비판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58년에는 시민자유연맹(ACLU) 같은 미국의 인권단체도 미군의 오키나와에 대한 군사적 간섭을 비난하며 “안전보장을 제외하고 오키나와에 완전한 자치를 부여하라!”고 선언했다.

    이렇게 세계적인 반식민지 민족해방과 연대운동의 고양은 오키나와 문제에 새로운 돌파구가 되었는데, 그것은 당초부터 오키나와 독립운동이 아니라,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통일(복귀)운동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오키나와에서는 히노마루가 일본제국주의를 연상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제국주의 복귀운동의 상징이 되었었고, 복귀협도 히노마루를 자유롭게 게양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대해 미군 측도 히노마루 게양을 금지하고 파손하기도 했으니(61년부터 공휴일 한정 공공건물 게양 허가), 히노마루에 대한 탄압이 가해질 때마다 그 저항성은 더해 갔다.

    더욱이 서두의 아라사키의 증언처럼, 오키나와가 미군에 의해 일본에서 분리되어 배타적인 군사지배 아래 놓인 상태를 조국의 분단으로 느끼고 본토와의 경계를 의미했던 27도선의 아픔을 의식하면서 한반도 분단의 상징인 38도선이나 베트남 민족을 둘로 가르는 17도선의 아픔에 공감을 보내며 자신들을 억압받는 아시아와 동일시했다.

    1963년부터 매년 미군의 오키나와 통치가 확정된 날인 4월 28일에 북위 27도선의 해상에서 일본과 오키나와의 주민들이 만나서 통일(반환)을 호소하며 거행했던 해상집회는 그것을 상징하는 행사였다.

    오키나와 2-3

    복귀협 결성에 호응하여 도쿄에서 거행된 오키나와 반환 호소 시위(왼쪽 1960년 4월 28일) 서울에서 거행된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통일촉진 궐기대회(오른쪽 1961년 5월 13일)

    그런데 이러한 오키나와의 복귀운동에 초기부터 가장 뜨겁게 응답하고 연대한것은, 저항내셔널리즘을 내세운 일본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진보세력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아시아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미국에 종속되어 있는 식민지 상태로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계급투쟁보다 민족독립을 우선해야 한다는 민족통일전선노선을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과 오키나와가 통일되어 미제로부터 독립된 민족국가를 형성하지 못하면, 민족의 해방은 불가능하고 국내의 진보와 혁명도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해방도 달성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A·A와의 연대운동은 이후에도 전개되어, 63년의 제3회 A·A인민연대회의(탄자니아), 65년의 제4회 A·A인민연대회의(가나), 66년의 제1회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OSPAAAL) 연대회의(쿠바)에서 “일본과 불가분의 영토”인 오키나와의 일본 반환을 요구하는 결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 운동을 A·A 지역 탈식민지화의 일환으로 파악하는 것은, 오키나와에서는 충분한 설득력을 가졌지만, 그것이 일본이 되면, 결코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 일본은 과거의 일본제국주의와 충분한 단절을 이루지 못한 채, 이제는 경제대국으로 탈바꿈하여 그 독점자본이 아시아에 군림하는 착취 국가가 되었다는 이미지를 떨쳐 버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히노마루도 일본에서는 패전 이전으로의 회귀(=제국주의적) 열망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이러한 저항 내셔널리즘의 위험성에 자각적이었던 일부 좌파 세력들은, 일본은 확실히 미국에 종속되어 있지만 다른 아시아 국가들처럼 식민지는 아니며, 미제국주의 지배하에 있는 오키나와를 일본에 복귀시키는 것은 일본의 독점 지배를 받는 것에 불구한 부르주아 민족주의적 논리라고 비판했다.

    따라서 오키나와의 해방을 위해서는 오키나와를 포함한 일본 전체가 계급투쟁을 통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켜, 오키나와도 일본도 진정한 해방을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일본은 지정학적 중요성을 가지는 지역으로 미국의 원조와 지원을 바탕으로 정치적 독립과 자본 축적에 성공하여 이미 50년대 후반부터 아시아 지역에서 일정한 경제적 패권을 행사하며 미국과 경제적 지배권 일부를 분점하기 시작했으며, 군사적으로도 미일동맹에 의존하며 그 요청에 따르면서도 거기에 자신들의 군사적 패권 추구 욕망을 철저하게 겹쳐갔다.

    그런 점에서도 당시 일본은 미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어야할 신식민지라기 보다는 그 하위파트너로서의 아류제국주의(Sub-Imperialism)의 길을 이미 걷고 있었다는 것은 명확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미군 지배하에 있는 오키나와의 현실에 대한 실천적 대안을 제대로 제시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소수의 의견에 그치고 만다.

    그런데 민족통일전선노선에 기초한 오키나와 복귀론은 의외의 상황 전개로 위기에 처하게 된다. 박근혜 정권의 이른바 ‘통일대박론’의 경우처럼, 당시 사토 에사쿠(佐藤栄作)를 수상으로 하는 보수정권은 갑자기 “오키나와의 반환은 국민적 열망”이라는 등의 내셔널리즘의 언어를 쓰면서 오키나와 복귀운동의 과제를 ‘횡령’해서는 멋대로 왜곡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1965년에 사토 수상이 오키나와를 방문해서 “오키나와의 조국 복귀가 실현되지 않는 한, 일본에 전후는 끝나지 않았다”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어, 1969년 11월 사토와 닉슨의 공동성명에 의한 오키나와의 1972년 반환 합의로 이어져서, “핵 제거 및 본토와 동일 수준”이라는 기만적 구호와 함께 1972년 5월 15일 오키나와 통치권이 반환되는 것으로 일단의 막을 내리는 ‘반환 사기극’이었다.

    오키나와4

    복귀 당일, 폭우 속에서 거행된 ‘5.15 현민대회’ 모습

    본래 이 ‘사기극’이 요청되었던 것은, 60년에 개정된 안보조약의 고정 기한이 끝나는 70년(이후 어느 일방이 조약의 종료를 통지하지 않으면 자동 연장)에는 안보조약 폐지운동이 격렬히 일어날 것이 불을 보는 뻔한 상황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오키나와 반환이라는 미룰 수 없는 지상과제에 집중시켜 미일의 역할분담 조정으로 미일안보체제의 재편을 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의 실패로 더 이상 오키나와에 대한 배타적 지배 능력을 상실한 미국은 이로써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에 경제적 군사적 역할을 분담시키면서 미군기지의 안정적 운용을 지속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의 통치권이 미치게 된 오키나와에는 자위대가 배치되었고, 군용지에 대한 보상은 일본이 대납했고, 미군에 의해 불법적으로 정리해고된 기지 노동자 2400명에 대한 책임도 떠맡았다.

    이때도 한국과 타이완 해협의 안전은 이 사기극을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었다. 운동 세력들은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전면 반환과 자위대 배치 반대, 안보조약과 기지 철폐를 외쳤고 일본 내에서도 반대운동이 거셌지만, 60년 안보반대투쟁과 같은 열기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오키나와는 일본에 반환되어 ‘하나’가 된 후에도 B52는 계속 오키나와의 하늘을 날았고, 민간인은 여전히 미군의 흉악 범죄에 노출되어 폭행당하거나 사살되거나 교살되었다.

    이송되었다는 독가스는 또 누출 사고를 일으켰고, 전투기는 추락했고, 사람들은 변함없이 미군 차량에 치어서 죽었다. 일단 철거되었던 핵은 언제든지 가져와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밀약도 체결되었다. 미군기지는 그대로였던 것이다. 이번엔 자위대라는 보조병력까지 거느리고서 말이다.

    오키나와의 국제연대 운동 시즌2

    일본정부와 미국은 반환 후에도 오키나와를 군사기지로 묶어두는 정책을 전환하지 않고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틀을 고수한다. 이 체제가 지정학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일본에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양 정권만은 아니었다.

    최근의 여론조사에서도 80%가 넘는 일본인들이 미일안보동맹을 수용하는 입장이다. 이것은 내각부가 여론조사를 실시한 78년의 65.6% 이래로 점차 증가하여 최고에 달한 수치이다(관련 글 링크). 즉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인들은 미일안보체제를 신뢰하고 강하게 의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90%의 오키나와 사람들이 이 안보체제에 반대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러니 오키나와 사람들이 일본의 마이너리티로 존재하는 한 이 틀을 거부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미국과 일본이 오키나와에 대해 규정한 강고한 틀을 거부하고 뛰어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그 하나가 바로 오키나와 시민운동이 벌인 국경을 넘는 연대 운동이었다.

    <참고한 자료>

    아라사끼 모리떼루, 백영서 외 역, 『오끼나와, 구조적 차별과 저항의 현장』, 창비, 2013.

    아라사키 모리테루, 정영신 외역, 『오키나와 현대사』, 논형, 2008.

    小熊英二, 『〈日本人〉の境界: 沖縄・アイヌ・台湾・朝鮮 植民地支配から復帰運動まで』, 新曜社, 1998.

    John W. Dower and Gavan McCormack, 『転換期の日本へ―「パックス・アメリカーナ」か「バックス・アジア」か』, NHK出版, 2014.

    アジア諸国会議日本準備委員会編, 『14億人の声: アジア諸国会議およびアジア・アフリカ会議記録 1955年4月』, おりぞん社, 1955.

    김어진, 「제국주의 이론을 통해 본 한국 자본주의의 지위와 성격에 관한 연구: 한국 자본주의의 아류제국주의적 성격을 중심으로」, 경상대학교 대학원 정치경제학과 박사학위논문, 2012.

    필자소개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진보신당 당원, [나는 사회주의자다: 동아시아 사회주의의 기원, 고토쿠 슈스이]의 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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