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긴축찬성 세력의 승리, 미래는 불확실
    [기고] 그리스 2차 총선 결과의 의미와 전망, 시사점
        2012년 06월 22일 05:3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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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에 새 정부가 등장했다. 중도우파 신민주당(ND)이 주도하는 긴축찬성 연립정부다. 그러나 공동으로 정부를 구성하는 3당 사회당(PASOK)이 긴축정책의 주범이요, 2011년 사회당 정부가 붕괴한 후 임시 거국내각을 주도한 신민주당이 긴축정책의 공범임을 감안할 때, 이번 연정은 말이 새 정부지 얼굴만 조금 바뀐 구체제의 지속이라 할 수 있다. 1974년 민주화 이후 그리스 정치 체제는 신민주당과 사회당이 번갈아가며 정부를 구성하는 사실상의 양당 과두 지배 체제였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5월 1차 총선에서 긴축반대 좌파를 대표하며 단숨에 2당으로 부상한 급진좌파연합(SYRIZA, ‘시리자’)이 2차 총선에서 10% 가량 득표율이 상승하며 제1야당의 지위를 확고히 굳힌 것이다. 시리자의 집권을 바랐던 이들에게는 매우 실망스러운 결과이겠지만, 시리자의 선전은 40년간 지속된 양당 지배 체제에 균열이 발생하고 있다는 분명한 반증일 것이다. 2009년 총선과 이번 총선을 비교하면, 시리자가 약 22% 득표율이 상승한 데 반해 신민당과 사회당은 각각 4%, 32% 가량 득표율이 하락했다.

    트로이카와 긴축찬성 진영의 역공

    하지만 정세는 그리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우선 긴축반대 좌파가 이번 총선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단순히 긴축에 대한 찬반만 놓고 본다면, 5월 총선에서 긴축반대를 선언한 정당들이 60% 가량 득표한 데 비해 6월 총선에서 긴축반대 세력의 득표율은 45%가 조금 넘는 수준이다. 시리자가 집권할 경우 당장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이탈)가 발생할 것처럼 그리스 민중의 공포를 자극한 신민주당·사회당과 유럽연합(EU)·유럽중앙은행(ECB)·국제통화기금(IMF) ‘트로이카’의 공조가 주효한 것으로 보인다.

    신민주당 대표 사마라스와 시리자 대표 치프라스

    이들의 논리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현재 그리스는 트로이카의 구제금융이 중단되는 순간 디폴트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만일 그리스 새 정부가 긴축정책을 철회하고 구제금융 지원 조건의 전면 재협상을 시도한다면, 트로이카는 이를 완강히 거부할 것이다. 그러면 그리스 정부는 조만간 만기도래하는 채무의 지불유예를 선언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 순간 구제금융은 중단될 것이다. 그리스 정부는 극심한 재정난에 처해 자국 중앙은행의 화폐발권력을 회복할 수밖에 없을 텐데, 이는 곧 화폐동맹으로서 유로존을 이탈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가 유로존을 이탈할 경우 뱅크런이 발생하고 통화(드라크마) 가치가 50% 가량 절하되고 교역이 급감하고 하이퍼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그리스 경제는 완전히 붕괴할 것이다.

    신민주당·사회당과 트로이카는 이러한 시나리오를 토대로 이번 총선을 유로존 잔류 여부와 긴축정책 수용 여부에 대한 사실상의 국민투표로 몰아갔다. 트로이카는 그리스가 유로존에 잔류한다면 환영받겠지만 그리스가 유로존을 이탈할 경우를 대비해 적극적인 예방 조치를 고려하고 있다는 식으로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신민주당 대표 안토니스 사마라스는 구제금융안을 거부하는 어떤 행위도 그리스를 헤어날 길이 없는 악몽으로 빠뜨릴 것이라고 선동했다. 실제로 5월 총선 이후 그리스 은행들에서 뱅크런이 가속화했는데, 긴축찬성 측에서는 뱅크런이 ‘시리자의 인민주의적 정책의 잠재적 비용을 증명하여 유권자들이 표심을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환영하기도 했다.

    한편 긴축반대 진영에는 민족주의·인종주의적 입장에서 유로존 이탈을 주장하는 그리스독립당(ANEL)이나 황금새벽당(XA)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사태는 한층 복잡하고 심각하다. 이들은 외국인혐오증을 유포하거나 네오나치즘을 공공연히 표방하는데, 이번 총선에서 각각 7% 내외의 지지율을 얻어 무시할 수 없는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다. 극우 정당의 발호는 재정위기에 처한 유럽의 전역에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이들은 자국민 우대 정책, 반 이민 정책, 반 무슬림 정서를 기반으로 국수주의에 호소하고 있다.

    시리자의 한계와 과제

    그렇다면 시리자는 이러한 보수주의적 반격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5월 총선 전 시리자는 ‘트로이카의 구제금융 조건, 즉 긴축정책 반대’를 주요 슬로건으로 제시했지만, 총선 이후에는 ‘긴축정책의 일부 수정 및 향후 재협상’으로 입장을 수정했다. 또 초미의 관심사였던 유로존 탈퇴와 관련해서도 시리자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라고 언급하며 한 발 물러나는 자세를 취했다.

    이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면, 시리자가 긴축에 대한 분노와 유로존 탈퇴에 대한 공포라는 양면적 정서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 민중들의 다수가 현재의 구제금융-긴축정책을 반대하는 동시에 유로존 잔류를 희망하는 상황에서 시리자가 대중의 정서를 정확히 파악했다고 볼 수 있다.

    반대로 시리자의 유동적 입장과 온건화를 시리자의 내외적 한계가 드러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내적인 측면에서 볼 때 다양한 좌파 정당·정파들의 선거연합체인 시리자는 구체적인 강령을 기초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러한 ‘개방적’ 성격은 공산당같이 완고한 이미지를 지니는 좌파에 비해 시리자를 유연한 좌파로 인식하게 하는 요인이 되어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는 데에 장점으로 작용한 측면도 있지만, 역으로 다양한 세력 간에 반복되는 갈등에 취약하게 하는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외적인 측면에서 볼 때 시리자가 유로존 잔류를 전제로 ‘약한 긴축’(austerity light)으로 입장을 선회함으로써 긴축반대 전선이 이완될 가능성이 크다. 시리자 내외의 좌파 세력들은 시리자 지도부가 선거 시기에 트로이카와의 갈등을 축소하는 데 매몰되었고, 또 지역과 현장 수준이 아니라 매스컴을 주요한 활동 무대로 설정했다는 점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 치프라스는 이번 총선 직후 ‘책임있는 야당으로서 활동하겠다’거나 ‘당분간 투쟁을 동원하는 것보다 긴축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최하층을 보호하는 데 집중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시리자는 제1야당으로서 원내에서 긴축정책의 부분적 완화와 정책적 보완에 주력할 가능성이 크다. 대신 대중투쟁을 지지·지원하면서 대중적 교육과 조직화를 수행하는 역할은 상대화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우려는 시리자 지도부가 경제위기의 원인을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 아니라 금융기관이나 ‘카지노 자본’의 탐욕으로 이해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시리자의 이러한 이해는 트로이카나 자본과의 적대적인 대립 없이도 정부 교체와 구제금융 프로그램 재협상을 통해 그리스 민중의 고통을 해소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트로이카의 독재에 도전하고 신자유주의적 유럽 통합에 대한 대안을 현실화하는 과정은 격렬한 계급투쟁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다. 시리자가 경제위기의 구조적 원인에 대한 교육과 선전을 통해 장기적인 투쟁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지지기반이 급속히 축소될 수도 있다.

    그리스 총선 이후의 전망

    그리스 새 정부는 조만간 트로이카에 구제금융 지원 조건 재협상을 신청할 계획이다. 이미 자력으로 채무를 상환하기 어려운 ‘사실상의 디폴트’ 상태에 빠진데다가 올해 경기가 당초 예상보다 더욱 악화하여 예정대로 채무를 상환하거나 재정적자 감축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스 정부는 향후 지급될 구제금융에 대한 금리 인하와 상환 기간 연장, 유럽투자은행(EIB)을 통한 추가 지원 등의 요구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단 트로이카는 성실한 긴축 프로그램의 이행을 확약한 신민주당 연정의 재협상 요청에 응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의 디폴트가 발생할 경우 유로존 이탈이 가시화되면서 관련 손실 증대로 인한 직접적인 피해는 물론 역내 위기국의 동반 이탈 등 광범위한 충격을 야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독일 메르켈 총리나 라가르드 IMF 총재 등 트로이카의 주요 인사들은 구제금융국의 ‘도덕적 해이’를 빌미로 재협상 요구안에 일정한 선을 그으면서 그리스를 최후의 순간까지 압박하고 있다. 현재 이들은 구제금융의 상환 기간 연장 등은 협상 대상이 될 수 있으나, 긴축정책 완화는 불가하다는 완강한 입장을 비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번 여름 중 일부 조건이 개선된 새 양해각서가 체결될 가능성이 크지만, 트로이카의 강력한 압력으로 그 내용은 현재의 긴축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결국 유로존 잔류와 구제금융 지원을 대가로 그리스 민중들은 다시 한 번 처절한 고통을 수반하는 구조개혁에 내몰리게 될 것이다.

    총선 시기 시리자 지지자들의 집회

    하지만 이러한 구제금융이 현재 그리스의 위기를 구제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리스의 재정위기는 ‘재정동맹 없는 화폐동맹’과 ‘유럽의 내부적 불균형’이라는 구조적 요인과 함께, 미국발 금융위기의 충격이 국가채무 누증으로 전환된 정세적 요인이 중첩되어 나타난 결과다. 그러나 트로이카와 그리스 정부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유럽 통합이 낳은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는 원인요법보다는 구제금융-긴축재정이라는 대증요법에 치중하며 위기를 확산시켜왔다.

    더욱이 구제금융-긴축정책은 ‘이익을 사유화하되 손실을 사회화하는’ 계급 편향적 정책으로서, 민중의 저항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즉 정치적·사회적 실행가능성이 낮다. 또 구조조정·노동신축화와 같은 ‘내부적 평가절하’를 단행하더라도 그리스의 산업구조를 고려할 때 수출경쟁력 확보를 통한 경기회복은 지극히 한계적이다. 즉 경제적 실행가능성도 낮다. 따라서 구제금융 지원 조건을 일부 완화하더라도 그리스는 머지않은 장래에 또다시 비슷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유럽 위기의 심화·확산

    그런데 위기는 그리스에 국한되지 않는다. 스페인의 전면적인 구제금융 신청 예상, 유럽 은행들의 자본확충 시한(6월 30일) 만료 및 신용등급 조정 예상 등으로 유럽은 ‘시계 제로’ 상황에 처해 있다.

    6월 18-19일 개최된 주요20개국정상회의(G20)에서도 유럽 재정위기 공조 방안을 논의했지만, ‘말의 성찬’에 그치며 구체적인 해법을 도출하는 데 실패했다. 위급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유럽은 6월 21-22일 유로존 재무장관회의, 24일 주요4개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 정상회의, 28-29일 EU 정상회의에서 해법을 논의할 예정이다.

    최근 유럽에서는 ▲유럽금융안정화기금(EFSF) 및 유럽안정화메커니즘(ESM)과 같은 위기관리기구의 역할 강화 ▲‘유일한 방화벽’으로서 ECB의 적극적인 금융 안정 기능 수행 ▲재정규율 강화를 요체로 하는 신재정협약을 보완하기 위한 성장협약의 체결 ▲유로본드 발행 ▲유럽채무상환협약 체결 ▲‘재정동맹 없는 화폐동맹’의 결함을 해결하기 위한 과도적 대책으로서 금융동맹(banking union) 결성 등의 대안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방안들은 EU의 제도적 결함과 회원국간 정치적·경제적 이질성으로 인해 실현될 가능성이 크지 않다. 단적으로, 유럽의 의사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독일은 ECB의 독립성을 이유로 위기에 처한 각국 정부와 은행을 ECB가 직접 지원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또 유로본드 도입이나 유럽채무상환협약 체결도 자국의 재정적 부담을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과 같은 무역흑자국이 항구적인 흑자를 유지하면서 재정이전이나 구제금융 없는 화폐동맹, 독립적인 중앙은행을 동시에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을 독일이 처한 ‘트릴레마’(삼자택일)라고 칭하기도 하는데, 독일은 자국의 경쟁력 유지를 통해 수출 주도 성장을 지속하려는 태도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거론되는 방안들은 대부분 실행가능성이 없거나 단기간 내 합의되기 어려워, 유럽의 위기 대응은 ‘그럭저럭 버티면서 시간을 버는’(muddling through) 수준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일부 개선 조치가 도입되더라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동반되지 않는 한 실효성이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의 재정위기 극복 가능성이 크지 않고 또 위기가 스페인과 이탈리아로 확산됨에 따라 머지않은 장래에 일부 국가가 유로존을 탈퇴하는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자본주의의 위기와 대안

    유럽은 은행위기와 재정위기를 거쳐 정치위기와 제도위기의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2007-09년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진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유럽의 위기가 심화·확산됨에 따라 세계경제가 다시 한 번 대대적인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고조되는 위기 속에서 한국의 사회운동은 그리스의 계급투쟁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찾을 것인가.

    우선 그리스 민중들의 투쟁에 대한 국제적 연대가 필요하다. 정부와 자본가들은 마치 그리스 민중들의 투쟁이 세계 경제의 불안을 증폭하는 것처럼 선전하지만, 오늘날 그리스의 위기는 실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낳은 파괴적 결과다.

    그리스는 유럽 통합의 모순과 경제위기의 폐해가 가장 극심히 드러나는 지역으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맞선 투쟁의 최전선에 해당한다. 한국의 사회운동은 그리스 민중들의 계급투쟁에 지지와 연대의 뜻을 표함으로써 국제적인 반신자유주의 물결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경제위기에 대비하여 사회운동 전반의 정치적 조직적 태세를 정비해야 한다. 무역의존도와 금융개방도가 높은 한국은 세계 경제위기에 대단히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미 경기침체의 조짐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눈덩이처럼 불어난 가계부채도 금융위기의 뇌관이 되기에 충분하다.

    정부는 한국 경제의 활로를 수출-재벌 중심의 세계화에서 찾으며 자유무역협정 전략과 노동신축화 법제화를 계속해서 추진하고 있다. 또한 중기 재정건전화 기조 하에 최근 사회보장·복지의 추가적인 조정을 예고하고 있다. 이것은 노동자에게 저임금·장시간·고강도 노동의 악순환을 의미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노동자계급의 보편적 이해를 대변해야 할 민주노총의 조직적 토대를 강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다. 6월 말부터 8월 말까지 예정된 민주노총 총파업이 결정적인 계기일 것이다. 진보정당 운동도 퇴행을 중단하고 급진적 이념과 노선을 재수립해야 한다.

    또한 미국이 경제위기에 대응하여 추진 중인 아시아태평양자유무역지대(FTAAP) 구상은 한미일 정치·군사동맹의 강화를 동반하는 바, 평화운동을 적극 전개해야 한다. 또 그리스와 유사하게 한국에서도 특히 경제위기 하에서 이주자에 대한 극단적 폭력과 외국인혐오증이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점을 감안하여 민족주의·인종주의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필자소개
    사회진보연대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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