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럼과 연민의 위대한 힘
"진보는 인간적이어야 한다"
아베 피에르의 <이웃의 가난은 나의 수치입니다>
    2014년 04월 21일 03:0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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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끄럼과 연민

우리는 그동안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온갖 폭력과 무지 그리고 욕망에 대해 경계하고 비판해왔다. 그 경계와 비판의 구체적 형식이 학문과 종교의 길이었고, 그것의 상상적 구현의 형식이 예술의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세계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확산하는 방향보다는 그것을 유린하고 그 유린된 상황을 견디게끔 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온 것이 그동안의 숨길 수 없는 인류 역사였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상식에 기반을 둔 합리적인 세상을 정초하려는 많은 이들은 이 같은 세계에 대해 한없는 절망과 부끄럼을 가지게 되고, 나아가 그러한 폭력에 짓눌려 신음하고 있는 많은 생명들에 대한 가없는 연민과 사랑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이 같은 ‘부끄럼’과 ‘연민’의 형식이야말로 위대한 영혼들이 한결같이 견지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태도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위대한 영혼이 가지는 ‘부끄럼’과 속물적 의식이 반영된 ‘쪽팔림’(비속어 사용을 양해 바란다)을 구별해야 한다.

가령 ‘쪽팔림’이란, 자신의 행위가 남(타자)의 시선에 어떻게 인식될까를 두려워하고 경계하고 계산하는 의식에서 생겨나는 어떤 정서적 결과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내적 성찰보다는 외적 규율이나 타인의 기억 양식을 중시하는 것을 그 형성 원리로 한다.

그러니 쪽팔림에 대한 강한 두려움을 가지는 사람들에게는 창피와 수치심은 있을지언정 ‘부끄럼’은 없게 된다.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부끄럼’은 타인의 시선보다는 자기 자신의 눈을 의식하는 정서요, 자기 스스로 설정해놓은 삶의 기율이나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스스로의 반성적 행위이다. 거기서 남이 어떻게 여길까 하는 것은 부차적이 될 수밖에 없다.

요컨대 ‘쪽팔림’이 타자의 시선을 의식하는 철저히 계산된 정서라면, ‘부끄럼’은 ‘또 하나의 나’를 의식하는 반성적 정서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연민’과 ‘시혜’ 또한 섬세하게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연민’이 대상 자체에 대한 회복 의지와 관련된다면, ‘시혜’는 주체 중심의 영웅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결국 ‘부끄럼’과 ‘연민’은 이처럼 위대한 영혼을 이끌어가는 두 개의 수레바퀴라 할 것이다.

이웃의 가난

지난 2007년 타계한 아베 피에르 신부는 살아 있는 동안 행동하는 프랑스의 양심으로 유명한 사제였다. 그는 엠마우스(Emaus) 공동체를 설립하여 세계의 가난과 폭력을 부끄러워하고 나아가 그것을 자신의 생의 중요한 과제로 돌리는 연민을 실천한 ‘살아 있는 성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의 일대기를 시간 순으로 구성한 <이웃의 가난은 나의 수치입니다>(우물이 있는 집)는 치열하고도 정직한 자기 응시와 자기 입법으로서의 ‘부끄럼’의 사회학을 가장 섬세하고 아름답게 보여준, 그래서 자기 확인이나 자기 성찰이 얼마나 성실한 내적 변증을 이루면서 한 인간의 삶에 개입해 들어오는가, 그리고 그 개입이 삶을 얼마나 순결하게 만드는가, 마지막으로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 연민의 힘으로 실천이 되게 하는가에 대한 선명한 실증을 우리에게 보여준 실례로 기억될 것이다.

2. 극고(極高)의 사회적 실천

아베 피에르 신부는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어린이 구하기’, ‘입양’이라는 두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만큼 우리 집에서는 불쌍한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했고, 아버지는 그들을 위해 많은 시간과 힘을 쓰셨다.”(17쪽)라고 고백함으로써, 자신의 생애가 어떤 연민과 사랑의 행위에 의해 지탱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한 예감과 예지는 그의 생애를 ”경배 속에 깃들인 행위의 강렬함과 보편성“(27쪽) 쪽으로 고양시키게 되는데, 이 책은 결국 그러한 예지의 강렬성과 보편성이 어떻게 구체적 개인의 삶에 일어나고 관철되고 구현되는가에 대한 섬세한 보고서가 되는 셈이다.

피에르 신부는 “이성(이것은 내가 몹시 싫어하는 것이며, 나를 긴장시킨다)은 빛을 가져온다.”(55쪽)고 함으로써 이를테면 신앙과 이성의 균형 감각 속에서 자신의 생을 정향(定向)한다. 그 가운데 그는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목격하게 되고 그러한 경험을 통해 인류의 인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어서 그는 1954년 폐차 속에서 얼어 죽은 한 아이의 시신을 발견하고 방송국으로 달려가 사람들에게 헐벗고 굶주린 이웃들을 도울 것을 호소하여 프랑스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래서 그의 생애는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사회 활동 사이에서 망설이다”(67쪽)가 “우리는 모두 이 땅에서 나그네들이다. 유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81쪽)는 자각을 거쳐 “나의 삶은 구주에게 바쳐졌으며, 또한 불쌍한 사람들에게 바쳐졌다.”(89쪽)고 하는 고백으로 이어지는 형상을 가진다.

피에르 신부는 무엇보다 1949년에 설립한 세계적인 빈민 구호 공동체인 ‘엠마우스’ 운동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는 하원 의원 시절 좌와 우를 뛰어넘는 새로운 차원을 지향한다는 의미로 “나는 극우도 극좌도 높은 곳을 향한 극고파(極高派)”(133쪽)라고 말해 깊은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그는 우파가 오직 반(反)개혁을 위해 몰두하고, 좌파가 혁명을 앞당기기 위해 선행을 장려한다면 이들 모두 우리의 현실적 고통들 앞에서 무력한 것이라고 역설하는데, 선이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그의 확신은 이념과 국경, 종교를 넘어 오직 마음의 정의만이 중요하다는 신념의 표현이라 할 것이다.

피에르 신부

생전의 피에르 신부 모습

1912년 프랑스 리옹에서 태어나 모든 유산을 거부한 채 38년 서품을 받고 레지스탕스, 하원 의원으로도 활동한 그는, 특히 엠마우스를 통해 단순한 구제 사업이 아닌 삶의 의지를 북돋우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역설하고 실천하였다.

그래서 그는 “진리에 대한 열정, 우애에 대한 열정을 오늘의 삶으로 옮겨 놓을 때, 비로소 성공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125쪽)는 깨달음을 통해 “인간에게 위엄을 부여하는 것은 일 자체가 아니다. 일의 목적에 의해, 인간이 위엄을 부여받는 것이다.”(169쪽)는 주장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우리에게 아름답고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 결과 그에게는 살아 있는 이에게 잘 쓰지 않는 ‘성(saint)’이라는 별칭이 따라 붙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과정 곧 어린 시절부터 현재 시점까지의 생애를 기록한 자서전 형식으로서 그의 90평생의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뜻 깊게 담고 있다. 하지만 그의 삶은 어떻게 보면 심하게 모순적이기도 한데, 이 모순의 역동성이 그의 영혼을 위대하게 움직인 근원적 힘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명상과 기도의 영적 세계와 레지스탕스 단원으로서의 정치적 삶의 모순과 균형이 바로 그것인데, 이는 정치와 종교가 이웃 사랑의 관념과 실천이 한 몸으로 결합된 흔치 않은 근대적 사례라 할 것이다. 또한 산과 사막을 좋아하고, 레지스탕스 일원이면서 양심적 병역 거부를 열렬하게 옹호하기도 하는 등 다채로운 일생을 그는 역동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놀라운 균형 감각으로 이 같은 모순의 역동성을 통일해 가는데, 그것은 가난한 이웃들의 한가운데 그가 언제나 서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삶은 빈곤과 소외를 겨냥하여 그것을 치유해온 흔적으로 충일하다 할 것이다.

극빈의 사람들을 모아 설립한 엠마우스 공동체는 50개국 가까운 곳에서 활동을 하였는데, 그의 빈민 운동은 극빈층에게 단순히 살 곳을 마련해주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일에 적응하면서 자신을 발견케 하는 방법을 취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이채롭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의 삶을 발견하고 성찰하는 영혼의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일정하게 신비주의적 성향을 지녔던 유년 시절로부터, 수도원 생활, 레지스탕스, 하원 의원, 엠마우스 공동체 등의 삶을 이어가는 동안 피에르 신부는 빈곤과 소외를 표적으로 삼아 투쟁을 해나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모두 80년 동안 씌어졌다고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자서전에는 자기 미화나 과장이 일정 부분 개입하기 마련이다. 그 점에서 이 책 역시 하나의 기획된 상품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피에르 신부의 <이웃의 가난은 나의 수치입니다>는 자기 삶 굽이굽이마다 다가온 신의 음성과 자신의 고뇌 그리고 그것이 삶의 다채로운 형식으로 구체화되기까지의 과정이 비교적 진솔하고도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위대한 영혼의 성장기이자 편력기로 읽을 만한 진정성을 깊이 내포하고 있다. 이 점 다시 강조해도 좋을 듯하다.

남을 돕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주는 사람으로서의 피에르 신부의 상(像)은 그래서 엠마우스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형상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그를 그냥 신부라고 부르지 않고 아베 드 생 피에르(abbe de saint-pierre) 곧 성 피에르 신부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삶이 가장 평범하고 숨겨지기를 원했으나, 그의 진정성의 힘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발견케 하기에 족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어려운 사람을 돕는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 말고도 많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실천을 구체적으로 가능케 했던 ‘정신’이었다. 다른 말로 그것은 ‘영혼’의 힘이었다. 그 영혼의 일관성과 위대한 힘을 가능케 했던 가장 구체적인 정신은 바로 ‘부끄럼’과 ‘연민’이었던 것이다.

3. 우리 시대의 진보는 긍휼과 연민

따라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진보는 ‘부끄럼’과 ‘연민’ 다시 말해서 반성과 실천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 반성과 긍휼의 순간에 신은 임재하신다. 그래서 피에르 신부는 그의 저서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진보는 인간적이어야 한다.”(208쪽)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관성과 속도전으로 충일한 근대적 시간의 더께들을 관통하여 우리가 잊고 지내고 있는 고전적 기율과 정신을 복원하려 하는 이 시대에, 이 같은 반성과 실천의 궤적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작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중앙 중심의 미디어적 주류 권력과 힘겹게 대결하면서 이른바 “전지구적 사고, 지역적 실천”(Think Globally, Act Locally)을 성취하려 우리에게 깊은 전범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그 반성과 실천의 이면에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가난한 이들과의 깊은 연대감인데, 이때 연대감은 정서적 우월감에 바탕을 둔 시혜적 관념이 아니라 수평적 사랑의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형식일 것이다. 또한 연대감은 첨예한 시대적 이슈에 눈 감지 않고 그 문제의 당사자들의 시점에서 사물을 대하는 능력과 태도를 말하는 것일 터이다.

그러한 실천과 연대의 도정에 섰던 신부 피에르는 우리에게 이처럼 아름다운 부끄럼과 연민의 힘을 보여준 살아 있는 성자였던 셈이다. 그 성자의 흔적들이 우리 사회에도 거듭거듭 이어져 사람들의 영혼에 깃들이기를 바라는 마음 적지 않다.

필자소개
한양대 교수, 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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