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를 향해
    [책소개] 『국가를 되찾자』(힐러리 웨인라이트/ 이매진)
        2014년 04월 20일 11:1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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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동 가능한 민주적 권력의 새로운 원천을 찾아

    민영화에 맞선 철도노조 파업은 사실상 실패했고, 수서발 KTX는 시동을 걸었다. ‘민영화’를 ‘반대’나 ‘비추’의 의미로 사용하는 패러디 웹사이트가 등장했고, 의료 민영화의 공포는 어느 연예인의 5억짜리 뇌수술이라는 비현실적인 가십으로 엄습했다.

    진주의료원 사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고, 민자 도로와 터널 건설은 강행되고 있으며, 교육권 침해 논란에도 삼성고등학교는 설립 인가를 받았다. 지방선거를 앞둔 풀뿌리 정치의 장은 기초선거 무공천을 둘러싼 논란으로 가득 메워졌을 뿐, 대의 민주주의 안에서 공공성을 지켜내려는 민중의 의지와 분노는 아직도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영국의 사회학자이자 정치 활동가인 힐러리 웨인라이트가 대중 민주주의의 실천 사례를 찾아 세계 곳곳을 탐방한 뒤 쓴 《국가를 되찾자》는 그런 우리에게 대중 민주주의가 실제 정치 현실 속에서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 모색할 길을 제시한다.

    웨인라이트는 브라질의 포르투알레그리, 영국의 루튼, 뉴캐슬, 이스트맨체스터, 노르웨이의 트론헤임, 이탈리아의 그로타마레, 스페인의 세비야까지 여러 지역을 찾아가 민중이 시장 경제에 맞서 공공성을 자기 손으로 지켜낸 실험을 기록했다.

    낡은 제도가 실패할 때 민중이 창조하고 재발명한 ‘참여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다고 말하는 웨인라이트는 다양한 실험 속에서 대중 민주주의의 작동 원칙을 배우고 함께 건설하자고 제안한다.

    국가를 되찾자

    “참여는 중독성이 있다” ― 대중 민주주의의 역사와 실험들

    웨인라이트는 먼저 ‘참여’를 둘러싼 현실의 맥락을 살핀다. 완전 고용, 보편적 공공 서비스, 소득 불평등 감소 등의 사회민주주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민간 투자, 민간 위탁, 경쟁 부추기기 등 신자유주의적 수단을 택한 영국 신노동당의 시도를 예로 들며, 공무원과 민간 기업 사이의 계약으로는 공공적 재화와 공공 서비스의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다음으로 대의 민주주의가 거쳐온 과정을 살핀다. 토머스 페인이 정부의 건설은 인간 속에 잠재한 ‘감각의 덩어리’를 앞으로 끌어내는 형태여야만 한다며 강조한 대의 민주주의는 1950년대에 오로지 수동적인 유권자들의 표로 당선된 정치 엘리트들의 영역으로 축소됐다.

    1970년대 페미니스트 운동, 노동조합주의, 반인종주의 운동, 동성애자와 장애인 권리를 둘러싼 운동들은 자치를 위한 민중의 잠재적 역량을 보여줬고, 전면적인 참여 민주주의가 가져다줄 사회적 이익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런 창조적 대안들은 전통적인 보수 엘리트뿐 아니라 사민주의 정당한테도 경계의 대상이 됐다.

    웨인라이트는 이어 지식에 관한 이해 방식을 분석한다. 하이에크에 기반한 신자유주의의 가정은 지속되지도 부호화되지도 않는 특수한 지식, 암묵적 지식이 경제적 성공에서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이해 속에서 국가의 개입은 재앙을 낳을 뿐이며, 자유 시장이 시행착오의 진화적 과정을 통해 다듬어지려면 국가의 구실은 ‘간섭하지 않는 것’에 머물러야 한다.

    한편 전통적인 사민주의 사고의 배후에 있는 사회공학 모델은 정책의 집행을 공학적 문제로 여기며, 지식은 중앙 집중화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됐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에서 드러나는 다른 형태의 지식은 공공 정책에 적절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웨인라이트는 신자유주의와 사회공학의 가정 둘 다를 거스르는 ‘실천적 지식’과 ‘지식의 사회적이고 공유 가능한 성격’을 인식해야 진정한 제3의 길을 창출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지식에 관한 이런 이해가 민주주의의 목표와 결합될 때 나타날 전략과 제도를 발전시킨 실천적 실험을 연구하기 위해 웨인라이트가 처음 찾은 곳은 참여예산제 하면 떠오르는 브라질의 포르투알레그리다.

    브라질 노동자당인 PT는 교육을 민중이 억압을 극복하고 변혁을 창출하는 도구로 본 파울루 프레이리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공동체의 지식을 활용하고 이 지식을 공동체와 공유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웨인라이트는 포르투알레그리 참여예산제의 진행 과정과 성취를 기록하고, PT가 선거에서 패배한 뒤 다시 들러서 비국가적 공공 영역이 출현한 현실 그리고 뒤이어 드러난 취약성을 검토한다.

    영국에서는 ‘지역 공동체 주도 재생’이라는 취지로 도입된 NDC 프로그램을 둘러싼 사례들을 검토한다.

    루튼의 마쉬 농장 부지에서 무료 레이브 파티로 출발해 젊은 활동가들의 무대가 된 엑소더스 사업단과 다른 여러 그룹들이 조직화되고 지속적인 자치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그려진다.

    이스트맨체스터에서는 NDC 발표에 대응해 주민들이 어떻게 공공 서비스의 운영에 관련된 권력을 틀어쥐고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냈는지 살펴본다.

    뉴캐슬에서는 영국의 공공 서비스 부문 산별 노동조합인 UNISON과 지역 주민들이 포괄적인 민영화 계획에 반대해 참여 민주주의의 아이디어를 촉진한 사례를 들여다본다.

    웨인라이트는 2007년에 루튼과 이스트맨체스터를 다시 찾아 민중들이 공간과 자원을 충분히 활용하고, 공공 서비스를 발전시키며, 계속 함께할 수 있게 이웃들을 북돋운 결과를 확인한다. 그리고 공공 서비스 개혁에 관련한 지역 차원의 시도가, 완전히 모순되는 흐름을 보이는 전국적 과정이라는 난관에 부딪쳐 있는 광경 또한 지적한다.

    끝으로 웨인라이트는 유럽의 급진적 지자체들을 살펴본다. 노르웨이의 트론헤임에서 노동조합들이 기발하고 성공적인 방식으로 선거를 승리로 이끈 뒤 ‘지자체 실험 모델’을 통해 민영화에 맞선 사례, 이탈리아의 그로타마레에서 주민들이 참여적인 방식으로 도시 계획에 개입한 사례, 포르투알레그리의 참여예산제를 들여와 새로운 정치를 형성한 스페인 세비야의 사례를 검토한다.

    웨인라이트는 각 도시가 가진 역사적인 특징과 현실 정치의 맥락, 그리고 그 안에서 참여 민주주의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형성되는 과정을 꼼꼼하게 들여다본다. 단일한 제도적 해답은 존재하지 않지만, 민중들은 자신의 역사에 적절한 제도를 실험하면서도 공통의 원칙을 발전시키고 있다.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 향해, 전략적 실용주의로 국가를 되찾자

    《국가를 되찾자》에서 웨인라이트가 보고한 실험들의 배후에 공통적으로 놓여 있는 조건은 전통적 정치 제도의 위기다.

    PT가 집권할 무렵 포르투알레그리가 직면한 재정적 파산, 뉴캐슬의 재정 위기와 해이해진 경영, 루튼과 이스트맨체스터의 극단적인 방치 상황, 공공 서비스 책임을 민간 기업에 넘겨버린 트론헤임, 역사적 유산들이 쇠락하며 개발의 위협에 노출된 그로타마레 등. 한편 이런 취약하고 낡은 제도 뒤에는 정치와 제도를 향한 폭넓은 불만, 대안을 마련할 수 있다는 믿음과 급진적 변화를 위한 의지를 지닌 사람들의 집합 또는 집단들의 집합이 존재했다.

    한국에서도 사회운동은 귀환한 권위주의 정권과 자본의 압력 아래에서 저항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운동의 기획들이 전체적이고 전략적인 조망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하고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웨인라이트가 제안하는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의 전망과 ‘전략적 실용주의’는 공공성에 관련된 투쟁과 지역 차원의 정치 실천을 가다듬고 새로운 민주주의를 기획하는 데 유효한 실마리가 돼준다.

    실패한 신자유주의의 논리가 공적인 것을 하나씩 시장의 손에 건네주려 하는 민영화의 위협이 턱밑까지 차오른 지금 여기 한국에서, 국가를 민중에게 열어젖혀온 세계 곳곳의 끊임없는 시도들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 조직하고, 공공의 몫을 다시 요구하며, 마침내 ‘국가를 되찾을’ 방안을 모색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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