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널A' 박종진 앵커의
    무책임한 책임 전가를 보며
    [기고] 책임지지 않을 자들의 무책임한 말들
        2014년 04월 18일 09:4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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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위논문 청구 때문에 학교에 몇 가지 서류를 제출하고 돌아왔다. TV를 켜니 <채널A>의 박종진이라는 인간이 열불을 내며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전직 SSU 대장이었다는 패널에게 ‘SSU는 목숨 걸어야 하는 거 아니냐’며 호통을 치고 있었다. 대원들이 위험도 고려해서 구조 작전을 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패널이 했던 모양이다.

    박종진은 ‘딸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하겠냐’며 있는 대로 소리를 쳤다. 본인은 자신의 딸이 갇혔다면 밧줄을 몸에 묶고 직접 들어가겠다며 큰소리를 쳤다. 물 만난 물고기 같았다. 책임이 비어버린 자리에 분노만 남았다. 그리고 그 분노에 편승해서 책임지지 않을 말들을 내뱉는 자들 또한 늘어간다.

    박종진

    학교에 오가면서 버스에 탔다. 내 몸을 실은 버스를 운전하는 운전사를 믿지 않는다면 나는 버스를 이용할 수 없다. 하지만 위험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위험을 안고 살아간다. 위험을 극복하는 건 온전히 내 능력만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버스운전사의 도움으로 이동할 수 있는 나는 버스 근처를 지나는 모든 운전사들을 믿을 수 있어야 하며, 자연의 도움도 얻어야 무사히 목적지로 갈 수 있다. 그러한 믿음을 키울 수 있도록 같은 규격과 규정이 적용되는 기술을 공유하는 고도로 근대적인 사회에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위험의 빈도를 낮추려고 해도 위험의 강도가 커져서 한 번 사고가 나면 참사가 되곤 한다. 위험을 완전히 피할 수 없기에 위험을 함께 수습하는 일이 늘 필요하다.

    침몰해가는 배에서 제일 먼저 빠져나간 선장을 용서할 수 없다. 또한 수습 책임이 가장 클 테지만 현장에 방문해서 사과도 없이 본인 주위 책임자들을 가리키며 “약속이 안 지켜지면 관계자 다 물러나야” 같은 의미 없는 말만 하고 돌아간 대통령도 도무지 용서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책임을 최소화하려고만 애쓰며 사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사태를 없는 것처럼 무화하려고만 했다. 그 지독한 무책임 앞에 무력하다 느꼈다.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일선에서 갖은 고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대통령이란 작자가 현장에 도착해서 실종자 가족들의 화를 달래려고 한 짓은 일선에 전화를 넣는 것이었다.

    현장 책임자는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들어가라”는 지시를 일선에 전달했다. 수화기 너머로 무언가 답을 듣더니 현장 책임자는 짜증스럽게 다시 지시했다. “그래도 다시 얘기하라고.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들어가라고.” 현장에 방문해서 사태를 수습하는 책임자가 할 일이 결코 아니었다.

    일선 구조자들을 책망하고 닥달을 하는 것이 수습의 전부란 말인가. SSU 대원들이라면 군인이라는 신분에 종속된 노동자다. 노동권을 얻지 못한 노동을 하는 이들이다. 이 참사뿐만 아니라 수습 과정에서 발생할 위험도 모두 가장 낮은 사람들에게 전가된 것이다.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고 지켜보는 사람들로부터.

    이 참사는 처음부터 그랬다. 위험을 최소화하고 책임질 사람들은 ‘말’만 남겨두고, 모든 위험을 말단에서 짊어졌다. 안내방송을 듣고 방에 남아있던 학생들과 아르바이트 승무원이 그 책임을 온전히 떠안았다.

    이 끔찍한 무책임이 불러일으킨 참사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불신과 분노만 남았다. 정부와 언론의 발표를 아무도 믿지 않으려고 한다. 생존자들이 살아 있다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은 불신과 분노를 만나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을 만들어냈다. 정의감에 옮겨 담은 소식들은 실종자 가족들에게 전해졌고, 참사를 무화하려는 수습 책임자들은 일선 구조자들에게 “위험을 무릅쓰라”고 자꾸만 닥달한다.

    박종진이란 인간은 이토록 거대한 분노에 편승해서 ‘SSU는 목숨 걸어야 하는 거 아니냐’며 호통을 치고 있었다. ‘딸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하겠냐’며 있는 대로 소리를 치던 그는 신이 나 보였다. 슬픔이나 무력함 따위는 도무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마치 본인이 실종자 가족이 된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실종자 가족이 될 수 없다. 실종자 가족의 슬픔을 등 뒤에 업고 그는 신이 나 보였다. 그는 실종자 가족들이 ‘하늘이 무너질 것 같지 않겠냐’며 전직 SSU 대장을 질타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진 듯한 절망감을 느끼는 가족들이 아닌 자로서 사태를 해결하는 데 한 치라도 도움이 되려면 ‘SSU는 목숨 걸어야 하는 거 아니냐’ 같은 말을 서슴없이 해서는 안 된다. 또 한 번 무책임하게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된다.

    일선의 구조자들이 목숨을 건다면 해결될 것인데 그렇지 않아 문제라는 말만큼 무책임한 말이 또 어디에 있을까? 책임 전가일 뿐이다. 이 참사를 무력하게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분노에 편승한 참으로 악랄한 책임 전가다.

    그런 말로 사태는 해결될 리가 없지만 그는 아무 책임도 지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고생하는 사람들만 더욱 고생할 것이다.

    필자소개
    "대학원에서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한국의 '국민개병' 담론이 탄생한 과정에 관한 학위논문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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