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기자본주의의 3대 법칙
    자본에겐 국경이 없고 노동에겐 국경 존재
        2014년 04월 18일 03:52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저는 지금 고향, 레닌그라드(1991년 이후로는 샹트페테르부르크로 불린다)에 있습니다. 온 지 하루밖에 안되었는데, 체류 초기부터 적고 싶은 인상들을 받았습니다.

    자본주의화된 레닌그라드, 정말 모순적인 곳입니다. 일면으로는 최근 정부가 시설투자를 대대적으로 하여 공항을 완전히 새로이 만들어놓았습니다.

    2개의 청사를 하나로 통합시키고 싱가폴 공항이나 인천공항 등 아세아 최고의 공항 정도로 아주 넓고 화려하게 해놓은 셈입니다 (아무래도 아세아 신흥자본국가들이 구주나 미주보다 시설투자를 더 잘하여 공항의 “표준”이 이젠 아세아에 있다고 봐야 할 듯합니다). 토건자본주의이자 국가관료 주도 자본주의다운, 그런 쇄신입니다.

     

    샹트페테르부르크

    샹트페테르부르크의 도심 야경

    그러나 또 일면으로는, 서민들의 삶은 그저 그대로이고, 오히려 가속화된 인플레의 무게 밑에서 더 어려워지는 듯합니다. 슬럼화돼 가는 서민아파트촌에서는 여전히 수돗물이 끊기는 건 예사고, 여전히 도로 아스팔트가 엉망이고…여전히 연금생활자들은 대개 한 달 1만루블 (약 30만원)로, 고기 소비를 극도로 자제하면서 근근히, 간신히 사셔야 하고 그렇습니다.

    국가가 주도하는 자본의 회전은 아무리 빨라도, 그 회전에 이제 도움이 되지 않을 “주변분자”들의 곤궁함은 그저 여전할 따름입니다. 뭐, 그저 “보통 자본주의”일 뿐이죠.

    러시아에서 하루 보내고 나서 제가 느낀 걸 종합해보면, 러시아 신흥자본주의를 포함한 일체 후기자본주의 세계의 어느 곳에도 적용될 만한 3가지 큰 법칙으로 정리할 수 있을 듯 합니다:

    1. 자본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북조선에서도 이집트 재벌이 이동통신시장에서 군림하고 있는데, 레닌그라드는 당연히 국제자본의 메카죠. 길 가다보면 한국제 자동차 (러시아 현지 생산된 현대자동차 등을 포함하여) 전용 기술센터 홍보 포스터들이 보이고, 식량점에 들르기만 하면 바로 보이는 식품들은 상당부분 해외식량업 재벌들의 러시아 현재 법인들의 공장에서 생산된 것입니다.

    단순한 수입품들도 많습니다. 러시아 담배시장은 약 70% 이상은 외국 자본이 차지하고 있어, 역시 외국재벌들의 현지기업이 생산한 것 말고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해외투자신탁들이 러시아 대기업에 대규모 투자를 한 것까지 생각하면, 사실 “현지 자본”과 “해외 자본”의 경계선 자체도 희미합니다.

    중간 규모 이상의 자본은 후기자본주의 세계에서는 거의 필수적으로 국제적입니다. 그 국제성의 연쇄란 가끔 정말 정신을 현란케 할 정도입니다.

    예컨대 제 어머니의 휴대전화가 븜펠컴이라는 회사의 상표인 “비라인”에 가입돼 있는데, 그 븜펠컴 주식의 거의 40% 정도를 노르웨이의 통신재벌 텔레놀이 가지고 있는가 하면, 븜펠컴이 라오스나 부룬디,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지의 이동통신을 좌우하는 회사들 (밀리콤 라오, 오라스컴 텔레컴 등등)의 주식을 보유합니다.

    결국 핵심부 자본이 중진국 (러시아) 자본을 콘트롤하고, 중진국 자본이 주변부시장을 콘트롤하는 연쇄랄까, 이런 게 후기자본주의입니다.

    2. 핵심부와 준주변부/주변부 사이의 기술 시차는 거의 없습니다.

    자본이 순식간에 국경을 넘을 수 있는 글로벌리즘 시대인지라, 새 기술은 폭풍처럼 지구를 마구 휩쓸죠. 러시아는 기술 생산하는 핵심부와 아주 사이가 멀다 해도, 준주변부 국가인 러시아의 젊은이들은 돈만 있으면 최신 모델의 아이폰을 가지고 다니죠. 오히려 러시아가 후발주자인 만큼 빨리 배우고 핵심부를 앞지르기도 하죠.

    예컨대 미국(그리고 한국)에서는 아직도 들어오는 방문객들은 입국신고서를 손으로, 기내에서 작성하여 그다음에 입국심사관에게 제출하지만, 러시아에서는 다 전산화시켜 입국 심사관이 입국 심사시에 필요한 데이타를 출력하여 각자에게 그 입국신고서를 그냥 손에다가 주고 보내는 것입니다. 펜으로 쓸 건, 인제 아무것도 없죠.

    바로 이런 “추월”이 가능해진 것은 후기자본주의입니다. 사실, 바로 그런 논리의 연장선상에서는 북조선은 – 국가의 집중투자만 있으면 – 중국시장을 겨냥하는 지역적인 최신 IT상품의 개발 중심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죠.

    3. 자본에게 없는 국경은, 노동에게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기술이 거의 자유로이 국경을 넘나드는 세상에서는 자본은 과연 무엇으로 초과이윤을 빼내죠? 바로 국경이 보장하는 노동력의 “기동성 억제”와 임금에 대한 지리적 차별로 인해서 이윤이 창출되어집니다.

    자본의 이동이야 아무 문제가 없지만, 자본가급이 아닌 이상 “사람”의 이동은 여전히 극도로 억제돼 있는 것은 후기자본주의 특징입니다. “투자자”, 즉 자본가라면,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합법적으로 “바로바로” 영주권 획득이 가능합니다. 일정액 이상 현지에서 투자만 하면 말입니다.

    한데, 자본으로서 필수적으로 필요한 일부의 전문가군 (IT 이외에는 예를 들어서 간호원처럼, 고숙련이 아니더라도 현지에서 모집이 어려운 숙련노동자군) 이외에는 노동은 여전히 국경에 묶여져 있습니다.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은, 그 노동의 질이나 양보다는 그 노동자의 “지리적 위치”를 우선적으로 반영합니다.

    예를 들어, 계속 막히는 교통 흐름 속에서, 포장이 안 좋은 도로를 달리는 레닌그라드의 버스운전사는 노르웨이 버스 운전사보다 훨씬 더 많은 기술을 발휘해야 하고, 훨씬 더 신경 많이 써야 하고 훨씬 더 피곤해지지만, 그가 받는 임금 (약 100만원 상당액)은 노르웨이 운전기사 임금의 4분의 1이 될까 말까 합니다. 임금격차가 이 정도 현저하기에 서방재벌들의 러시아로의 확산은 그들의 초과이윤의 원천이 될수 있습니다.

    지리적 위치 이외에는 임금은 노동자 각자의 국적 등 옮기기 어려운 “신분”에 직결돼 있습니다. 러시아 노동시장에서는 구쏘련 구성 공화국의 출신들은 (주로 중앙아세아인) 통상 현지인 (러시아인)에 비해 그 임금은 60-70% 정도밖에 안됩니다.

    이런 지리적/신분적 격차를 언젠가 철폐시키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건 바로 “만국 노동자의 단결”인데,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러시아 노동자의 상당부분은 중앙아세아 출신의 이민노동자들을 “노동단가를 떨어뜨리는 경쟁자”로 볼 뿐입니다.

    여기에다 정부가 교묘히 은근슬쩍 지원해주는 우파 조직들의 인종적 선전까지 먹혀 들어, 몇개월 전의 모스크바의 “인종 폭동”처럼 러시아 노동자들이 이민노동자들에게 포그롬 (집단학대) 해버리는 비극까지 생깁니다.

    한 마디로 자본이야 노르웨이 자본(텔레놀)과 러시아 자본(븜펠컴), 그리고 라오스/방글라데시 자본까지 다 서로 가까이 연결돼 있지만, 노동자들은 지리적 위치/국적 등 신분의 벽으로 서로 격리돼 있어 분리통치 정책에 의해서 그 임금의 위계질서 속에서 서로를 경쟁자라고 백안시합니다. 자본의 글로벌 단결과 노동자들의 격리, 노동자에 대한 지배자들의 이간질. 러시아에서 극명히 보이는 후기자본주의의 실체입니다.

    자본은 그 이해관계로 세계적으로 얽히고설켜도 노동자 사이의 차별이 초과이윤을 낳기도 하고 노동자들 사이의 단결을 방해하기도 하는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묘법은? 결국 “계급”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하는 부분은, 이미 “민족자본”이 존재하지 않는 이 시대에 그 어떤 어용 민족주의적 선전선동도, 그 어떤 “우리 위대한 민족 과거/문화” 타령도 (제국주의에 희생되는 주변부 일부 약소국은 예외일지 모르지만) 결국 각국 노동자 사이의 “이간질”하는 역할부터 한다는 것이고, 그 만큼 반동성이 심합니다.

    지금 어쩌면 전쟁으로 갈지도 모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노동자들도, 그 모두들의 유일한 조국이 바로 미래의 소비에트 공화국이라는 점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필자소개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