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문적 소양',
    그 소비 행태에 대한 불편함
    문학과 예술 그리고 삶을 보고 읽고 느껴라
    By 서윤
        2014년 04월 15일 11:0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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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학적 소양’이란 말이 무슨 노래가사처럼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요즘입니다. 전공자와 비전공자 사이의 장벽은 달갑지 않으나, 이 말이 유행어처럼 쓰이는 데 속이 평안할 사람들은 별로 없을 거란 생각입니다. 내게도 마찬가지로 이런 현상이 편안히 다가오진 않습니다. 다소 격한 표현을 쓰자면, 이 현상이 ‘우습기 짝이 없기’까지도 합니다.

    인문’학’적 소양과 인문적 소양

    그 첫 번째 이유는 일단, ‘인문학적 소양’이란 말 자체가 적절치 않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보다 ‘인문적 소양’이란 말이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말장난 같고, 별 것 아닌 양 넘어가도 무슨 커다란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닐 테지만, ‘학’이란 글자가 붙으면 그것은 일련의 학문체계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는 점에서 나는 ‘인문학적 소양’이란 말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학문을 위한 소양은 정도의 문제이긴 하지만, 한편 그를 위한 소양이란 것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배우고 익히며 그것으로 또 다른 지식을 생산하는 데 적합한 성정을 지니고 있음은 우리 모두가 경험적으로 아는 사실입니다. 똑같은 근면함과 성실함이라도 학문을 위한 것과 경제적 생산 활동을 위한 근면함과 성실함에는 교집합도 있으나 차집합 또한 분명히 존재하니까요.

    학문을 한다는 것, 공부를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학문을 위한 근면성실이 타분야를 위한 근면성실에 대해 갖는 차집합의 원소가 많은 사람들에게 적합한 일일 것입니다.

    인문학적 소양이란 것이 정도의 차이라 해도 개인의 성정에 따라 차등적인 반면, 인문적 소양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에도 물론 차등적인 점이 있다고 우리는 인정할 수도 있으나, 중요한 것은 인문적 소양은 학문을 위한 소양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인문이란 말을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사람과 사람이 쓰는 말글입니다. 물론 문(文)자는 글을 뜻하지만, 말글은 좀 거칠게 버무려 쓰겠습니다.

    인간다움의 특징, 인간의 삶과 사고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 인문학이라면, 인문적 소양이 지칭하는 것은 인간다움, 인간의 삶과 사고를 이해할 수 있는 역량competency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지적 역량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정서적 역량, 그리고 그것을 아우르는 직관적 역량이기도 합니다. 타인의 말글을 이해할 수 있는 독해력, 그의 의도를 헤아려볼 수 있는 직관력, 상대의 말글에 호응해줄 수 있는 공감과 소통 능력 등이 모두 여기에 포함되기 때문이죠.

    인문2

    인문적 소양은 스스로에 대한 인식과 성찰에서 비롯

    한편으로 이러한 역량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헤아려볼 줄 아는 역량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말글로 썰어내는 것은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스스로 분명하게 인식할 줄 안다는 것이며, 다른 이들의 생각과 느낌보다 당연히 직접적이고 실체적으로 다가오는 자신의 것을 먼저 표현할 줄 아는 것이 첫걸음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두 번째 이유와도 직결되는 지점인데요. 그 이야기는 잠시 뒤에 하기로 하고, 좀 더 여기서 밀고 나가자면, 실제로 요즘 ‘인문학적 소양’을 라면 가락 후룩거리듯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인문학적 소양이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능력’이라면 그것은 곧 ‘중요한 문제의식을 갖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 종합적인 인식-생각과 느낌, 그리고 그것을 가져오는 외부적 요건들을 아우르는-은 말할 필요도 없는 필연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이런 역량의 차이는 사람에 따라 존재할 테지만, 본질적으로 자신을 되돌아보는 데서 소양의 차이란 있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인문학적 소양, 내 식대로 말해 인문적 소양에 대한 열망이 유행처럼 번져가는 현실에 ‘우습기 짝이 없다’며 조롱을 퍼붓는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중시되어 온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그러니까 종업원 수 3백 이상을 넘는 중견기업 이상 정도의 조직, 더 정확히 일반화하자면 ‘사람과 사람 관계가 일정정도 이상의 복잡성을 지닌 조직’에서, 인문적 소양은 늘 중시되어 왔습니다. 아첨이나 비굴함 따위로 출세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물론이란 이름을 붙이기에도 천박한 한국사회의 물질에 대한 물신적 숭배는 차치하고서라도, 규모 있는 조직에서 결국 오랜 기간 사원들의 지지와 존경을 받는 이들의 공통점은 대개 인문적 소양을 갖춘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작은 제국을 이루고 있는 재벌 기업들에 내장된 억압적이고 인성말살을 지상과제로 삼는 구조적 병폐 속에서도 그런 사례는 상당히 많습니다. 결국 일은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조적인 문제들을 의도적으로 간과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상 지금 ‘인문적 소양’을 마치 인간의 조건이라도 되는 양 부르짖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간혹 그들이 “저 사람들 혹시 척박한 환경을 잘 견딜 만한 인물을 찾는 것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 때도 있습니다.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살피며 인식하고 정돈하여 차분하게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것 역시 인문적 소양의 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인문적 소양은 결국 자아 확립의 역량

    이렇게 볼 때 인문적 소양이란 결국 외부로부터의 압력과 침해에도 쉽사리 중심을 빼앗기지 않는 개인의 주체성, 그리고 통일적인 자아 확립을 위한 역량 내지는 그 역량에 가장 직접적으로 관련이 되는 힘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설령 나의 의심이 (어느 정도이든지간에) 진실에 가깝다 하더라도, 인문적 소양은 결국 개별 주체의 삶의 맥락에 뿌리를 두었음은 자명하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나는 이것이 강신주가 말하는 ‘강한 주체’의 형성에 직결되는 일이라고도 봅니다.

    강신주는 사회 전체의 변화는 그것을 구성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면서, 또한 그 변화의 완만함으로 인해 오늘을 견뎌야 하는 주체는 강인해야 한다는 두 가지 면에서 ‘강한 주체’를 말합니다. 나는 이중 후자의 입장만을 택하여 말하고 있음을 여기서 밝혀둡니다.

    본 주제로 돌아와서, 외부 요소에 중심을 빼앗기지 않는 주체적이고 통일적인 자아 확립의 필요성이 예전부터 있어왔다는 사실만으로 오늘의 유행을 조롱한다면, 아마 그것은 자기현시욕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지적)계급의식을 드러내는 일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인문적 소양을 몸에 걸치는 명품 대하듯 하는 오늘의 유행만큼이나, 어쩌면 더욱, 건강하지 못한 정신입니다.

    인문적 소양의 생산자들과 소비자들

    보다 구체적으로 내가 조롱하는 것은 인문적 소양을 ‘소비’하는 행태에 있습니다. 이것은 소양을 기르기 위한 소비자들의 구매 패턴보다는 그들의 그러한 욕망을 유도하거나 부추기는 지적․물질적 유산계급의 허영과 그 허영에 상응하는 생산자들의 행태를 표적으로 삼습니다.

    이들은 마치 인문적 소양이 서양철학사를 통달하거나, 혹은 심리학 내지는 정신분석학, 사회학, 문화인류학 따위의 학문적 성취들을 섭취하여 채 소화도 되지 못한 말들을 뱉을 줄 아는 능력이라도 되는 양, ‘인문적 소양’이란 말에 대한 성찰 없는 낱말들을 진열하곤 합니다.

    이와 동시에 그 같은 그들의 허영과 상응하는 행태들을 모방하고 내면화하여 앵무새처럼 용어들을 종알거리는 작태 역시 내가 겨누는 또 다른 표적입니다. 단언컨대, 인문적 소양은 학문적 성취를 섭취하는 데서 온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인문적 소양은 고민으로부터 옵니다. 고민이란 반성적 사유로부터 출발합니다. 때로 반성적 사유는 새로운 지식으로부터 단초를 얻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언제나 성립하는 필연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반성적 사유란 반성이 가능한 성정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성정을 기르지 못한 이가 한갓 텍스트 녹음기에 불과한 꼴을 갖춘다 해서 인문적 소양이 길러지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반성적 사유는 자기 자신의 실존적 체험에 대한 의심과 되돌아봄이기 때문입니다. 인문학 분과의 여러 학문적 성취는, 스스로 고민하는 과정 속에서 질문을 만들고 그에 응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이상은 되지 못합니다.

    스스로 하는 반성의 과정이 빈약한 채로 섣불리 지식을 섭취할 때 자아의 중심은 텍스트로 대체되고 주체는 텍스트 녹음기 이상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문학, 예술, 삶을 읽어라

    인문적 소양을 위해 섭취할 만한 것이 있다면 나는 차라리 지식보다는 문학이 한결 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복하는 말이지만, 인문적 소양은 지적 역량이면서 정서적 역량이기도 하고, 또한 그 모두를 포함한 직관적 역량이기 때문입니다. 인문적 소양이 개별 주체의 통일성 있는 자아 확립과 지속적인 성찰적 역량을 지시한다면, 그것은 분명 삶에 대한 직관을 수반할 것입니다.

    인간의 삶이 논리로 환원될 수 없음이 자명하다는 점에서, 지식보다는 삶에 대한 통찰이 다양하고 풍부하게, 그리고 은은한 형태로 자리해 있는 문학이 오히려 그 같은 직관적 감각을 일깨우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이런 견지에서, 이론보다는 소설이 삶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는 촘스키의 견해에 나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개인의 체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개인에 비해 세상이 광대무변하다 해도 사회라는 곳은 일정한 정식과 기율을 배태하기에, 개인의 직접체험만으로도 그를 정돈하여 의식화하는 작업을 통해 어느 정도의 보편적 도식을 추출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얼마나 빈번히 일어나든 간에, 여전히 개인의 체험은 늘 가변적일 수밖에 없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비좁은 영역에만 머무를 뿐입니다. 상상적 허구, 그러나 삶에 대한 다양한 통찰이 저변에 도사린 문학을 섭취하는 일은 그러므로, 개인적 체험영역의 빈약함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일반화된 도식-정립된 지식과 학문체계를 익히는 일은 그처럼 복잡미묘한 삶의 양상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고 느끼면서 고민하는 와중에 접할 때에야 비로소 주체적이고 통일적 자아의 형성에 기여하리라 봅니다.

    비단 문학뿐만은 물론 아니겠습니다. 생에 대한 통찰의 담지자가 어디 문학뿐이겠습니까? 그것은 만화일 수도, 영화일 수도, 그림일 수도, 연극일 수도 있습니다. 매우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때로는 조형물이나 짤막한 광고 영상에서 대오각성과 같은 깨침을 얻기도 합니다. 요컨대, 예술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예술이 고도의 지적인 성찰을 통한 작업물이라는 사실은 새삼 논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따라서 앞서 문학에 대해 쓴 “삶에 대한 다양하고 풍부한 통찰”이란 표현은 꼭 체험의 영역을 확장하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비록 이 글에서는 지식의 섭취와 예술의 섭취를 나누어 말하고 있기에 체험영역의 확장에 주된 의미를 두고 있으나, 작품에 내포된 통찰은 서사 속에서의 삶을 통한 특정한 삶의 양식에 대한 통찰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엔 삶 일반에 대한 통찰을 담지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또 한 번, 인문적 소양 함양을 위한 지식섭취의 필연성은 약화될 것입니다.

    인문학 분과에서 있어온 빛나는 학문적 성취들은 마땅히 평가받아야 하며 존경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난해하고 정교한 지식체계들을 섭렵한다 해서 인문적 소양이 길러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글에서의 구분법에 따르면, 그것은 인문적 소양뿐만 아니라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는 데도 그리 커다란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제아무리 그것이 학문적 소양이라 할지라도 ‘인문’을 주제로 삼는 한 그것은 사람의 사유와 그 삶의 다변성에 방점이 찍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를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논리와 체계에만 매몰된 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닌 현학적 텍스트에 불과할 것입니다.

    사적인 이야기를 끌어오기는 조금 민망합니다만, 언젠가 나는 신형철의 비평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그의 책을 가리켜 ‘문학에 대한 절절한 사랑고백’이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표현을 여기에 응용하자면, 인문학적 소양이란 결국 사람살이에 대한 비평적 소양, 다시 말해 삶에 대한 사랑을 가장 치열하게 고백하는 학문적 소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로부터 인문적 소양을 말하자면, 반복적인 말이 되겠지만 삶과 세상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이 그 기저에 놓인 성정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인문적 소양이란 삶과 세상을 사랑하는 태도로부터 나오는 기질적 바탕이라고 하겠습니다.

    대상에 대한 사랑과 관심도 없는 반성적 사유는, 반성을 통한 전진이 아닌 반성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은 아니겠는지요. 도식화시켜 생각해보면 이것은 그 층위만이 다를 뿐, 반성적 사유 없는 텍스트 섭취가 결국은 텍스트 녹음기를 양산하는 외에 아무것도 아님과도 닮은꼴이랄 수 있겠습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텍스트 섭취는 반성적 사유를 바탕으로, 반성적 사유는 또한 삶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사족을 달자면, 나는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많은 분야들과, 거기서 개별 주체들이 맺는 관계들에 이런 태도가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인문적 소양의 기본적 사안은 단지 한 번쯤 생각해보자며 제시하는, ‘인문적 소양’이란 표현에 담긴 모호하고 다의적인 의미층위의 한 단면일 뿐입니다.

    설령 이 글에서 제시한 단면이 어떤 식으로든 보편적 진리로 일반화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이 당위성이 모든 분야와 관계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떨 경우에는 지식이 먼저 필요할 수도 있고, 또 다른 경우에는 반성적 사유가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인문적 소양에 대한 오늘 우리의 열망이 결여한 것은 무엇이며 그것은 어떠한 성질의 것인지, 또한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를 고민할 필요성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글은 그 같은 필요성의 맥락에서 내 나름대로의 비판과 대안의 조심스러운 권고를 위한 것입니다.

    몇 차례 사용한 표현인 ‘주체적이고 통일성 있는 자아의 형성’은, 이런 비판과 대안이 (서로 비슷할지언정) 모두 각자의 삶의 맥락 속에서 반성적 사유를 통해 이루어지고 도출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되는 데 이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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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예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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