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명'을 상상해보자
    어떤 개인적 의거도 대중혁명을 대신할 수 없어
        2014년 04월 09일 09:4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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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며칠 전에 미국 아세아학회 참석차 미국에 갔다 왔는데, 돌아오는 길에 너무나 재미있는 체험을 했습니다. 보통 기내 영화에 대해서는 저는 그다지 기대 없습니다. 주류 중의 주류영화만이 항공재벌에 의해 엄선돼 기내에서 상영된다는 것은 여태까지의 경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국 항공사 비행기를 탔는데도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금년에 개봉된 <The East>이라는 영화 (관련 홈페이지 링크)를 보게 됐는데, 할리우드 영화임에도 정말 보기 드물게 좋은 영화이었습니다.

    영화로서도 질이 좋았지만, 무엇보다 사회학적 고찰의 재료로서 이용가치가 높았습니다. 그 영화를 통해서, 비교적 젊은 (이 영화의 감독은 1980년생입니다) 유식층 미국인들이 “혁명”을 어떻게 상상하는지를,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무술 등에 능한 전사형 여성인 제인 (가명은 사라). 민영 탐정회사의 직원인 그녀는 악덕 제약재벌 등 환경파괴적인 대기업을 응징하는 환경주의적 무정부주의 조직 “동방” 안으로 침투하여 그 활동에 대한 자료 수집하라는 지령을 받습니다.

    각종의 모험 끝에 그녀는 그 조직 속으로 들어가 “프락치 활동”을 개시했는데, 가면 갈수록 정체성의 혼란을 겪습니다. 일면으로는 그녀의 고용주인 탐정회사는 자본가다운 냉혈성의 극치를 보여줌으로서 그녀를 실망시킵니다.

    “동방” 조직원들은 미군과 결탁하여 인체를 훼손시키는 최악의 제약상품을 만들어내는 제약재벌 임원들에게 독극물을 먹이려 해도, 그녀의 신고를 받은 그녀의 회사는 그 임원들을 구하려고 전혀 들지 않습니다. 그 임원들은 그 회사의 고객이 아닌 이상 이건 경찰의 문제지, 민영 탐정회사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총자본”, “자본가계급”이라고 하지만, 그 내부의 관계는 정말 Homo homini lupus est, 만인이 만인의 적이 되는 셈이죠.

    이스트의 한 장면

    영화 The East 한 장면

    반면, “동방”의 조직원들은 義士仁人으로서의 정체를 점차 드러냅니다. 계속해서 재벌들이 내다버리는 독극물에 의해 죽고 병든 피해자들에 대한 자료를 공개해주는 등 약자 편에 서주는 모습을 보이고, 무분별한 폭력을 절대 하지 않는 대신 기업계의 원흉들에게만 응당의 대가를 치르게끔 하는 양산박 梁山泊의 군자처럼 행동합니다. 참, 그 원흉 중의 한 명은 바로 조직원 한 명의 아버지이기도 했습니다.

    그 조직원은 사회의 보다 큰 善을 위해 사적인 정을 극복하여, 아버지의 제약회사가 독성 공해물을 마구 내다버리는 소천의 강가에 자신의 아버지를 유인하여 그로 하여금 그 독성 공해물로 죽은 물에 목욕케 합니다. 피해자처럼 한 번 아파보라는 뜻입니다.

    딸로부터 천벌 격의 징벌을 받은 악덕 재벌인이 돌연히 회개하고 그 악질성을 자아비판함과 동시에, 그의 사병들이 그 장소를 급습하여 총격전을 벌여 그 딸을 결국 저격해 죽게 만듭니다. 조직원 중의 한 명은 의대 중퇴생이지만, 악덕 재벌들의 제약상품이 그의 신경망을 파괴했기에 그는 치명상을 입은 그녀를 수술하다가 손이 떨려 일을 망쳐, 그녀는 죽고 맙니다…

    거두철미하여 말씀드리자면, 결국 제인/사라는 조직의 수령과 연애에 빠지고, 여태까지의 그녀의 죄스러운 인생을 스스로 정리하고 여러 무정부주의적 조직에 포진돼 있는 그 회사 프락치들에게 전갈을 보내 그들에게도 환경주의적이며 무정부주의적 혁명의 편에 서주기를 극구 설득합니다. 그녀의 애인이 된 조직의 수령은 아예 그들의 신상을 공개해 그들을 응징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일면으로는 그 와중에서는 “동방”의 아지트를 FBI가 급습합니다. 살신성인할 작정으로 의대 중퇴생은 나머지 조직원들을 피신시키고 혼자 몸으로 수갑을 차고 평생 영어의 몸이 됩니다….

    하여튼, 한 마디로 “매력적 영화”가 가질 모든 요소들은 여기에 다 포함돼 있습니다. 혁명가와 연애에 빠진 펨파탈(운명의 여인)부터 주류의 악인과 사투를 벌이는 비주류/소수의 선인, 주류사회의 범죄성에 대한 고발 등등까지입니다.

    그러면 인제 이 영화를 사회적 의미가 부여된 텍스트로서 고찰해봅시다. 매우 분명한 것은, 여기에서 “동방”의 혁명가들은 선善 그 자체입니다. 미국 영화로서는 사실 이례적인 부분이죠.

    미국 주류 영화에서는 예컨대 공산주의자들을 “선”으로 묘사하는 것은 극소수의 예외에 속합니다. 1981년의 <Reds>는 약간 그랬지만, 거기에서도 주인공인 기자 존 리드는 결국 권력에 굶주린 코민테른의 지노비에프 등에 의해 이용을 당하고 죽을 뿐이죠. 리드야 “선의 편”이었겠지만, 지노비에프와 코민테른은 벌써 “악”에 가까웠습니다.

    미국 주류 영화에서 “선한 공산주의자”를 찾는 것은, 북조선 주류 영화에서 “착한 미제놈”을 찾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인데, 이 영화 같으면 혁명가들이 무정부주의적 환경주의자이었기에 “선인”으로서의 묘사가 가능했습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자본주의 국가의 체제를 실제로 무너뜨린 적은 없기에 리버럴한 사회의 공식 담론에서는 “공산당만큼 나쁘지 않은” 사람들로 통합니다. 촘스키의 경우는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레닌 등을 비판하는 무정부주의자는 미국에서는-제한된 규모긴 하지만-지성계 스타로서 뜨는 것까지 허용돼 있습니다.

    환경파괴의 정도가 하도 심하기에 환경주의는 단순히 배제의 대상에 오르는 것보다 미국의 공식 담론에 어느 정도 포섭되는 부분이 있기에 긍정적 주인공으로서의 “환경주의적 무정부주의자”의 출현은 가능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의 주류는 일단 “체제를 위협하지 않는 혁명”을 상상하려고 합니다. “동방”은 악덕 재벌기업의 노동자나 지역주민들을 조직해서 대중혁명을 일으키려 하지 않습니다. 그 노동자나 주민들이 피해를 보는데도 말입니다.

    주로 중산층/유식층 백인인 “동방” 조직원들은 기업계 원흉에 대한 “개인 응징”의 방식을 택하지만, 이런 권선징악의 행동은 아무리 드라마틱해 보여도 체제를 혁명적으로 바꾸는 데에 이를 리가 없죠.

    그러나 “동방”은 굳이 “체제의 변화”를 도모하려 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부유한 집안의 자녀들인 그들은, 수천만 명이 중노동하면서 가난 속에서 사는 나라에서 황금의 아동기를 보낸 자신들의 원죄에 대한 속죄를 하려고 하는 셈이죠.

    어쩌면 “속죄하는 귀족” 유형에 속하는 1870-80년대 러시아 인민주의자들과 흡사하기도 하지만, 인민주의자들의 목표는 그래도 분명히 제정의 타도와 사회주의 실현이긴 했습니다. “동방”의 목표는? 일단 “가장 나쁜 몇 놈부터” 제대로 응징해보고 보자는 거죠.

    그리고 “나쁜 놈 응징”하는 과정에서는 일단 “우리들끼리” 진정한 자유를 체험해보자는 것입니다. 남녀 혼욕, 서로의 나체를 차별 없이 물 속에서 어루만지면서 이성간의 동지애를 키우는 것, 서로간의 키스를 많이 나누는 것, 숲속 아지트에서의 자유연애, 주류가 쓰레기통에 버리는 먹을 만한 음식물들을 거기에서 꺼내 먹는 1968년 풍의 매력적인 삶…

    매력이야 끝이 없지만, 과연 이런 라이프스타일의 대중화는 어디까지 가능할는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결론을 내려봅시다. <The East>의 혁명은 너무나 매력적이고 멋지지만, 분명히 체제의 극복과 무방한 혁명입니다. 체제에 정말 위협이 되는 혁명이었다면 주류 화면에 올랐을 리도 없었겠지만요. 사실, “혁명”이라기보다는 몇 명 백인 엘리트들의 대사회적 “속죄” 과정과 자유 모색을 그렸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재벌”과 “범죄”가 동의어로 나타나는 영화가 이렇게 절찬리에 주류 영화관에서 개봉, 상영된다는 것은….모종의 분위기 변화를 의미합니다.

    대공황의 장기화 속에서는 자본주의는 그 명분을 잃었습니다. 아주 많이 잃었습니다. 그러니까 인기를 얻자면, “훌륭한 스파이”보다 “개과천선하여 혁명가가 된 프락치”를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는 건 차라리 더 효율적입니다. 이건 아주 재미있는 부분이죠. 가면 갈수록 자본주의의 실체가 드러남으로서 영화계도 거기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는 점 말입니다.

    그리고 자유에의 모험으로서의 “혁명”의 시도, 어차피 당분간 진정한 의미의 혁명이 불가능한 세계체제의 중심부에서는 차라리 어쩌면 그런 개인/소집단의 “탈주”와 “지배자들에게의 응징”은 선전효과라도 있긴 있습니다. 일제에 의한 식민화를 이미 막을 수 없었던 시점에서 안중근의 의거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의거들은 아무리 존경스럽고, 살신성인은 아무리 본받고 싶어도, 그 어떤 의거도 대중에 의한 혁명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서 그 생각을 계속 했습니다.

    필자소개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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