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바혁명 55주년
    새로 쓴 쿠바혁명의 사회사
    [책소개] 『쿠바혁명사』(아비바 촘스키/ 삼천리)
        2014년 04월 05일 03:3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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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롬비아 같은 나라, 특히 이들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미국의 정책과 해외 투자가 끼치는 해로운 영향을 지켜보고 연구하는 라틴아메리카학자로서, 근본적으로 다른 경제발전의 길을 창조하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미국 제국주의의 지배에 대놓고 도전해 온 쿠바 정부의 대담성과 쿠바 국민들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본문 33쪽)

    올해로 쿠바혁명 55주년을 맞았다. 혁명 직후 미국의 좌파 이론가 레오 휴버먼과 폴 스위지가 함께 쓴 Cuba: Anatomy of a Revolution(1960)가 《쿠바혁명사》(1984)라는 제목으로 번역되고 한 세대가 지났다. 라울 카스트로가 피델에 이어 국가평의회 의장에 취임한 지도 6년, 현재 쿠바 사회는 어떤 모습이고 쿠바는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오늘날 쿠바는 ‘자유를 향한 뜨거운 여정’ 속에서 사회주의 국가의 앞날과 경제 발전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그런가 하면 라틴아메리카의 변화를 주도하는 국가일 뿐 아니라, 무상교육과 무상교육, 생태농업의 종주국으로서 지속가능한 사회의 모델로 각광을 받고 있다.

    체 게바라가 꿈꾼 ‘새로운 인간’(hombre nuevo)이라는 개념은 게릴라 전쟁의 이념이 시들해진 뒤에도 세계 곳곳에서 대안적․혁명적 운동에서 강력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의 지은이 아비바 촘스키 교수는 역사학자의 눈으로 쿠바혁명의 빛과 그늘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 쿠바의 역사를 미국의 대외 정책과 관련하여 비판적으로 살펴본다는 점에서 아버지 노엄 촘스키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쿠바혁명사

    ‘현재진행형’ 혁명

    1959년 새해 벽두,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전설적인 게릴라 전투 끝에 부패한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 정권을 무너뜨렸다.

    1953년 7월 26일 몬카다 병영을 공격한 일이 쿠바혁명의 신호탄이었다면, 피델 카스트로가 감옥에서 풀려나와 멕시코로 망명한 뒤 1956년에 80여 명의 혁명가들과 ‘그란마호’(Granma)를 타고 쿠바로 진격한 것은 혁명의 두 번째 거사였다.

    하지만 그란마호를 타고 온 미래의 반란군 82명 대부분을 사살되고 말았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피델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 라울 카스트로,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등과 함께 쿠바 동부의 시에라마에스트라 산악 지대로 숨어들어 게릴라 부대를 꾸렸다.

    1959년 1월 8일 마침내 카스트로의 군대는 시민들의 환영 속에 아바나에 입성하였다. 바티스타는 포르투갈로 망명을 떠난 이후였다. 20세기 아메리카 대륙에서 처음으로 성공한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피델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 같은 혁명 영웅들과 게릴라 부대의 탁월한 활동 등 정치적 사건을 중심으로 그려진 것이다.

    쿠바에서 ‘혁명’은 수많은 상이한 국면, 뒤틀림, 전환으로 점철되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사회를 의식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현재진행형이다.

    쿠바혁명에 대한 이야기는 대개 여기서 그친다. 혁명정부는 토지개혁과 산업국유화를 비롯하여 쿠바 사회를 사회주의국가로 탈바꿈시켜 나갔다. 쿠바에서 ‘혁명’은 수많은 상이한 국면, 뒤틀림, 전환으로 점철되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사회를 의식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이 책은 에스파냐에 맞서 호세 마르티, 카를로스 세스페데스, 안토니오 마세오를 비롯한 이들이 독립전쟁에 나선 19세기부터 21세기 라울 카스트로 시대까지 연속되는 과정으로 살펴보고 있다. 특히 지은이는 쿠바 자체의 역사는 물론 20세기 미국, 소련 및 동유럽 블록,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라는 폭넓은 맥락에서 쿠바 현대사를 살펴보고 있다.

    쿠바혁명이 일어나기 전, 부패한 바티스타 정권 아래에서 90만 명 남짓한 가장 부유한 쿠바인들이 나라 전체 소득의 43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툭하면 마이애미로 쇼핑 여행을 갈 수 있는 돈에다 에어컨이 있는 사치스러운 집에 살면서, 심지어 죽은 뒤에도 변함없이 높은 수준의 안락을 누릴 수 있도록 “엘리베이터, 에어컨, 전화기”를 갖춘 묘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피델 카스트로를 비롯한 혁명가들은 정치혁명뿐 아니라 사회혁명의 과제를 함께 실행에 옮겨갔다. 노동자의 임금은 인상되었으며 실업자는 일자리를 얻었다.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는 임대료와 사용료 인하의 혜택을 누렸다. 농민들은 토지와 신용을 얻었다.

    효과는 가시적이었다. 상당한 정도의 재분배가 일어났다. 실질 임금이 약 15퍼센트 인상되고, 그에 따라 지주와 기업가들의 소득은 떨어졌다.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수십만 명의 쿠바인들이 혁명의 성공에 즉각적이고 지속적인 주체가 되었다.

    사회 서비스가 크게 확장되어 무료 또는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무상으로 제공되는 “기본적 사회서비스에는 교육, 의료, 의약, 사회보장뿐 아니라 장례, 수도, 스포츠 시설, 공중전화까지도 포함되었다. 편의시설과 대중교통 요금도 대폭 인하되었다.

    자유와 다양성, 문화 강국의 면모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쿠바혁명을 정치사가 아니라 사회사, 문화사의 틀로 쓰고 있다는 점이다. 아비바 촘스키 교수는 역사학자이면서도 쿠바의 인종, 젠더, 섹슈얼리티, 종교 등 사회학적 주제들을 본격적으로 다룸으로써 쿠바 사회의 다양성을 보여 준다.

    문학, 영화, 음악, 스포츠, 춤, 정치 문화, 음식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의 거의 전 영역을 망라하여 쿠바 사회의 속살을 드러낸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자유와 다양성’ ‘민주주의’ 등 사회과학의 개념을 적용시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의 세계관이 창조한 쿠바의 이미지와 편견을 불식시키고 있다.

    쿠바혁명 이후 정부의 문학과 예술에 대한 투자는 모든 영역에 걸쳐 있었다다. 문자해득 운동과 교육에 대한 압도적인 강조를 통해 아메리카에서 문자해득률이 가장 높은 인구를 창출했으며, ‘아메리카의 집’(Casa de las Americas)과 ‘카리브의 집’(Casa del Caribe) 같은 제도, 출판사, 문학상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쿠바 문학의 역사를 재발견하여 출판하기도 했다.

    《돈키호테》는 10만 부가 인쇄되어 “쿠바 섬의 모든 골목에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은 1968년에 《돈키호테》와 비슷한 부수가 인쇄되어 거의 다 팔려 나갔다. 레게에서 살사에 이르는 카리브 양식의 음악은 세계적으로 특히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콜롬비아 소설가 마르케스가 꽃을 피웠지만, ‘마술적 사실주의’이라는 개념을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도입한 이는 쿠바의 문호 알레호 카르펜티에르였다.

    혁명정부가 권력을 장악한 불과 몇 달 후인 1959년 3월에 설립된 쿠바영화예술산업원(ICAIC)은 토마스 구티에레스 알레아, 움베르토 솔라스, 파스토르 베가, 사라 고메스, 훌리오 가르시아 에스피노사, 세르히오 히랄 같은 명감독을 배출했고 놀랄 만큼 다양하고, 우수한 영화를 만들어 냈다.

    카를로스 푸에블라, 실비오 로드리게스, 파블로 밀라네스 같은 싱어송라이터들은 1970~1980년대 이후에 에스파냐어권 대부분의 지역에서 쿠바혁명 음악의 얼굴이 되었다.

    쿠바의 전통적인 손(son) 음악은 1997년에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CD와 영화가 나오면서 1990년대에 전 세계적으로 다시 유행했다. 또한 전통적 형식의 새로운 변이들인 랩과 레게톤 등도 월드뮤직의 최신 유행 음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새 노래’ 운동과 그 쿠바판인 ‘누에바 트로바’(Nueva Trova)는 방송 전파의 상업성과 외세 지배에 도전하고 진정으로 지역적이고 의미 있는 음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쿠바에 대한 오해와 편견

    아비바 촘스키 교수가 이 책을 집필한 계기는 자신이 가르치는 미국 대학생들의 무지와 편견을 바로잡고자 하는 소박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그동안 나온 쿠바 관련 저작 전반을 검토하고 비밀 해제된 국무부 외교문서를 꼼꼼히 뒤지게 된다. 미국 정부가 쿠바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1961년 4월의 피그만 침입과 1962년 10월의 쿠바 미사일 위기이다. 그 밖에도 1975년 미국 상원위원회 조사는 1960년부터 1965년 사이에 CIA가 관여한 적어도 여덟 차례의 피델 카스트로 암살시도를 보고했다. 아이젠하워 이래 모두 열 명의 미국 대통령은 카스트로를 권좌에서 제거하고 쿠바혁명을 전복하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와 낭패로 돌아갔다.

    쿠바혁명은 미국에서 탈공산주의적 ‘신좌파’와 전 세계 곳곳의 반제국주의 운동의 성장에 기여했지만, 오래된 (공산주의) 좌파의 정통성을 거부했다.

    쿠바는 아프리카에서 반식민 혁명을 지원하면서 후원자라고 간주되던 소련의 정책을 그저 추종한 것이 아니라 종종 주도했다. 제3세계 여러 나라들에게 의료 및 교육 원조를 해 온 쿠바는 미국의 원조 임무를 반영하기도 하고 때로는 능가하기도 했다.

    쿠바는 비동맹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써 수시로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펴 제3세계에서 위상이 높아졌다. 피델 카스트로는 1979년부터 1983년까지 의장이었다.

    비록 쿠바의 군사 개입이 더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서 쿠바의 또 다른 관여는 원조 노동자, 교사, 의사가 그 대륙에 쏟아져 들어갔다는 것이다. 정치학자 줄리 페인실버에 따르면, 쿠바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민간 원조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국가의 규모와 자원에 비해서뿐 아니라 절대적인 양으로도 가장 컸다.

    1963년, 56명의 쿠바의 의료 노동자가 처음으로 알제리에 파견된 이래 1991년까지 쿠바는 1만 명의 의사를 포함하여 약 3만 명의 의료노동자를 해외에 파견했다. 1984년, 카스트로는 의료 원조 프로그램을 제고하기 위해 특별히 1만 명의 새로운 의사를 양성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2005년 말에는 쿠바는 68개 나라에서 의료 원조 임무를 수행했다.

    지은이는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이며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나는 쿠바혁명의 경험을 요약하거나 그것에 관한 전반적인 판단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 혁명은 때때로 불리한 환경 아래에서 전진해 왔다. 그것은 전에 없었던 사회경제적 평등을 창조했으며, 가난한 제3세계 나라가 자기 국민들을 먹여 살리고, 교육하고, 보건의료를 제공하는 일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보여 주었다. 그것은 놀라운 예술적․지적 창조성을 이끌어 내기도 하고, 한편으로 숨 막히는 관료제를 만들어 미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자유를 제한하기도 했다. 또한 그것은 경제적 저발전을 극복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보여 주었다.”(2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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