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역사 최고의 용장 척준경
    [산하의 가전사] 조자룡과 관우와 장비 합쳐 놓은 듯
        2014년 04월 02일 02:5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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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역사에서 최고의 무용(武勇)을 떨친 사람이라면 누구를 꼽겠어? 전략가로서의 장군 말고 실제 전장에서 자신의 힘으로 전세를 바꾸고 믿을 수 없는 기적을 창출해 내고 영화같은 일을 서슴없이 해 내는 일당백의 용장이라면?

    이성계? 이성계도 대단한 사람이긴 했지만 최소한 무예와 용기 차원에서라면 내가 생각하는 이 사람 앞에서 눈을 내리깔아야 할 거야. 김유신? 화랑 시절에 낭비성 전투에서 활약한 정도를 제외하면 최전방에서 칼싸움한 거 같지는 않고. 강감찬? 이야기한 적 있지만 칼 들기 버거웠을 문신이었고. 이순신? 일본군하고 칼 맞대고 전투한 적은 없으실 거야.

    하지만 1108년 3월 30일께 동북 9성을 쌓은 뒤 어깨에 잔뜩 힘 주고 개경으로 개선한 윤관 장군 옆에 버티고 서 있었을 이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우리 역사 최강의 무장이야. 그 이름은 척준경. 삼국지로 치면 조자룡과 관우와 장비를 뭉쳐 놓은 것 같고 그리스 신화로 치면 헤라클레스와 아킬레스를 모아 놓은 것 같다고 하면 에이 뻥치지 말라고 혀를 내밀겠지?그럼 들어 봐.

    이 사람은 황해도 곡산 사람이야. 좀 다른 얘긴데 ‘곡’자 붙은 동네는 좀 팔자가 센 것 같아. 골짜기 많고 산간 지대라는 뜻이니 살기에 척박하지 않았겠어? 심지어 요즘도 ‘곡’자 붙은 동네는 사연이 많잖아? 지도를 보면 이 곡산은 평안남도 강원도 함경남도와 접하는 황해도의 맨 변두리다.

    해발 1000미터 이상의 고지대고. 이 척박한 동네에서 척준경은 자랐어. 귀족이 아니었으니 당연히 읽고 쓰기를 배우지 못했지만 그는 힘이 장사에 싸움에 능했고 군인으로 풀리게 된다.

    국사 교과서에서 ‘별무반’을 배웠을 거야. 여진족이 흥성해서 고려에게 대드는데 고려군이 패한 뒤 “우리는 다 보병인데 저들은 기병이라 상대가 안됩니다.“ 하여 신기군 신보군 항마군 (다음 중 별무반이 아닌 것은? 에 몇 번 틀린 뒤 지금까지 기억하는)의 17만 별무반을 조직하여 여진족을 들부수고 동북 9성을 쌓았다고 하지. 척준경은 이 와중의 최전방에 있었어.

    여진족이 처음에 고려를 괴롭히기 시작할 때 동북면 병마사는 임간이라는 사람이었어. 이 사람이 여진족을 얕보고 준비도 안된 군대를 출진시켰지만 참패하고 자신도 전사하고 말아.고려 동북면의 거점이던 정주성도 함락 위기에 몰리는데 이때 척준경이 펼친 활약을 보자.그는 갑옷 입힌 말 한 필과 무기를 들고 단신으로 여진족 기병대에 돌진해.

    아마 여진족은 웃었을 거야. “고려 애들도 말 타는 애가 있구나 깔깔.” 그런데 척준경은 그 웃음과 창날을 뚫고 기병대 속으로 뛰어들어 여진족 지휘관의 목을 쳐 버린다.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 저놈 잡아라! 여진족 100여 명이 일시에 척준경을 쫓아갔는데 척준경은 숲속으로 요리조리 빠져들어가서는 추격하는 여진족 장수를 향해 활을 겨눈다. 쐐액. 빈틈없이 화살이 꽂혔고 여진족 장수는 땅에 떨어져 버르적거리는 신세가 된다.

    임간의 뒤를 이은 윤관이 싸워 봤지만 현실은 이미 역부족이었지. 여기서 고려의 절치부심이 별무반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런데 복수를 위해 고려군이 동북면으로 출동할 즈음 척준경은 감옥에 갇혀 있었어. 무슨 죄인지는 모르지만 원래 배경 없는 사람이 세운 공훈은 화가 되기 쉬운 법이지. 하지만 윤관은 척준경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를 풀어주고 여진 토벌군의 일원으로 삼아.

    이 선택은 윤관 자신과 고려군을 구했어. 고려사 기록만 봐도 척준경은 거의 초인적인 활약을 해. 완강히 농성하는 여진족의 석성을 공격할 때는 성벽을 혼자 기어올라가 성벽에 붙어 있던 여진족들 수십 명을 죽이고 성을 함락시키는 대공을 세우지. 거의 <반지의 제왕>의 레골라스나 아라곤 급의 위용.

    여진족의 저항도 완강해서 한때 윤관의 지휘부가 습격을 받아 전멸 위기에 처할 때가 있었어. 이때 가까스로 척준경의 부대에 연락이 닿아 척준경이 달려왔으나 중과부적. 포위망은 뚫리지 않고 자신들마저 위험해진다 싶자 동생 척준신이 소리쳐. “형님. 놈들이 너무 세요. 우리마저 죽겠소. 쓸데없이 죽을 일이 뭐 있소.”

    모르긴 해도 척준신은 쌈박질 제대로 할 줄도 모르면서 속임수나 써서 여진족들 부아나 돋군 (윤관은 여진족을 속인 다음 뒤통수 치기를 무척 잘했어) 이 귀족 나부랭이들이 싫었는지도 몰라. 지나치기만 하면 자신의 뒤통수에 무식한 놈들 소리를 꽂아박던 높은 놈들을 위해 우리가 죽어야 할 이유가 뭐냐 싶었겠지.

    하지만 척준경은 또 우직한 무장이었어. “너는 살아서 아버지를 봉양해라. 나는 나라에 몸을 바쳤으니 의리상 가만 있을 수 없다.” ‘나라에 몸’ 따위 제치고 척준경의 말은 이런 뜻이었을 거야. “네 말이 맞다. 하지만 나는 윤관 도원수에게 의리가 있어!”

    그는 10여명의 부하들을 모은다. “목숨을 걸 놈만 나와라. 나와 함께 죽자.” 이렇게 죽기살기로 뭉친 열 명의 결사대와 함께 그는 1천명의 여진족을 향해 돌진한다. 영화도 이런 영화가 없지. 그러나 분명한 정사의 기록이야. 척준경과 그 결사대가 휘두르는 칼에 여진족이 우수수 쓰러지자 여진족들이 아우성을 치며 물러선다. “이것들은 사람이 아니다 해.”

    그렇게 척준경은 윤관의 생명을 구하고 고려 군대를 구한다. 이때 윤관은 펑펑 울어. 죽을 목숨이다 염불을 외우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누군가 자신을 구한 느낌이었겠지. 울먹이면서 윤관이 말한다. “나는 평생 너를 아들로 대하겠다. 너는 나를 아버지로 여겨라.”

    우리가 국사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동북 9성은 여진족의 압박으로 지켜지지 못했어. 그러나 그 전쟁이 결코 헛되지 않은 이유는 여진족이 척준경으로 대변되는 고려군의 매운 맛을 톡톡히 봤던 데에도 있을 거야.

    그 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는 고려가 대충 고개만 숙여 주면 아무런 시비도 걸지 않았고 전쟁을 도발하지도 않았고 고려에서 누군가 반역을 해서 금나라로 도망가면 그 멱살을 잡아 넘겨 주기까지 했어. 중국 대륙에서 그 정도 세력을 떨친 정복 왕조가 한반도를 양순히 내버려 둔 건 금나라가 유일해. 아마 그들의 뇌리에는 사람도 아닌 것이 짐승도 아닌 것이 혼자서 성벽 기어올라 수십 명을 날려 버리고 열 명으로 천 명을 향해 돌진하던 한 고려인이 남아 있었을지도 모르지.

    윤관 척준경

    척경입비도, 여진족 정벌 후 국경비 세우는 장면 (17세기 민화)

    척준경은 무식했지만 멍청하지는 않았어. 무슨 말인가 하면 금나라가 서고 사대를 요구해 왔을 때 척준경은 “금나라와 척 지지 말자”고 주장한 거지. 보통 척준경 정도 되면 “그 자식들 별 거 아닙니다.” 하고 큰소리를 치는 게 자연스럽지만 그 역시 여진족을 알았던 거고, 허리 한 번 굽히면 될 일에 수만 명의 목숨을 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아는 전쟁을 아는 장수였던 거지.

    그의 후일을 보면 좀 안스러워. 그는 그저 군인이었고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충성했어. 이자겸의 밑에 있을 때는 이자겸의 명령에 따라 행동했고 심지어 궁궐을 태워먹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지. 그래서 그는 고려사에도 반역자 리스트에 들어 있어. 하지만 왕이 밀사를 보내 “자네가 이럴 수 있나”라고 꼬드기자 또 거기에 고개를 끄덕여 이자겸을 제거하는 데 큰 공을 세운다.

    왕을 호위하고 나오는데 이자겸의 군대가 달려들었지. 이때 척준경이 나서서 벼락같이 호통을 치자 이자겸 군대가 ‘동작 그만’ 돼 버렸다고 해. “내가 척준경이다. 나설 놈은 나서 봐.” 장판교의 장비 정도는 저리 가라 할 포스.

    대공신이 됐지만 그는 정치를 몰랐고 어떻게 사람들을 속이고 구스르고 둘러치고 메치는 방법을 몰랐어. 곧 그는 임금으로부터 배신을 당하지. 궁궐을 태운 죄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탄핵을 받아 척준경은 벼슬을 잃고 귀양가게 되는 거야.

    하지만 임금도 마지막 배려는 포기하지 않아서 귀양지는 고향 곡산이었지.고향 곡산에 이르는 비탈길을 걸으면서 그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 무지렁이로 태어나 감옥에 갇혀 죽을 때를 기다리기도 했다가 중국 대륙에까지 그 용맹을 떨친 (그에게 깨진 금나라 장군들 송나라와의 전투에서는 대활약했다고) 무인이었다가 고려 최고의 자리에도 올라 봤던 그의 인생 역정은 아마 그 첩첩산중의 고갯길을 돌아들면서도 다 회고하지 못할 이야기 투성이였겠지.

    하지만 그걸로 끝이다. 그의 성 ‘척씨’ 즉 곡산 척씨는 그가 시조로 기록돼 있지만 그 뒤 거의 단종된 것 같아. 지금 국내 인구 조사로도 척씨는 없다고 나오거든. 그가 세운 공에 비추어 보면 현대에도 수십만 명이 ‘곡산 척씨’를 자처하며 척씨 종친회에서 척씨 시조 고려국 문하시중 척준경 장군 제사를 지내 줄 법도 한데 척준경은 그 후손을 자처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이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지 뭐야. 우리 역사상 기록상으로는 단연 최고의 용장이 말이지.

    당연하게도 그의 표준 영정 따위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윤관의 동북 정벌을 묘사한 그림 하나를 갖다 둔다. 선춘령에 ‘고려지경’ 즉 고려국 국경 표시석을 세우는 광경이지. 한 번 찾아 보렴. 누가 척준경일지.

    필자소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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