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련의 경험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하는가?
한상원 선생의 비판에 답하며-①
    2014년 03월 31일 03:1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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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에 <레디앙>에서 상당히 재미있는 평론(관련 글 링크)을 본 적이 있습니다. 백림(베를린) 훔볼트대에 계시는 한상원 선생님 (이하 존칭 생략)은 저에 대해서 두 가지 점에서 동의하기 어려운 여러 이유를 밝히신 것입니다.

하나의 문제는 “포스트(주의)”에 대한 비판이었으며, 또 하나는 “국가자본주의적, 전체주의적 지배체제였”던 쏘련을 제가 “다시 좌파의 담론에 복귀시키려”고 시도하는 데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매우 체계성이 있는 한상원의 평론에 대해 계속해서 답변을 드리고 싶었는데, 시간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이제서야, 미국에서 잠깐 체류하면서 드디어 여유를 얻어 몇 문장을 적어볼까 합니다. 일단 “쏘련의 명예 복원 문제”부터 다루고, 차후 다음의 글에서 “포스트”에 대한 태도의 문제를 다시 다룰까 합니다.

세계체제의 주변부에서 사는 것은, 솔직히 불편하고 힘든 일입니다. 아마도 한상원은 한국의 70년대를 목도하시지 않았을 터인데, 오늘날과 달리 한국은 명실상부한 주변부이었던 그 시절의 한국 지식인들은 보통 괴로운 노릇도 아니었습니다.

그 때는 예컨대 철학계에서 비교적 깨여 있는 분들의 관심사가 된 것은 프롬과 마르쿠제 등의 산업사회 인간의 “1차원성”, 창조성 상실, 내면의 고갈과 소외 등등이었습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같은 명작들은 그 때 처음 국역됐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양심 있는 지식인으로서는 프롬과 마르쿠제를 논하기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왜냐? 미국의 한심한 신식민지, 최악의 착취와 억압이 자행되는 곳에서는 채홍사를 보내 여성들을 강제 징발하여 성추행하는 괴물 같은 “한국적 민주주의” 화신과 여성 노동자들에게 오물을 던지게 하는 수준의 자본가들부터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는 산업사회에서의 인간의 소외를 논하기 전에 한국적 상황에서는 예컨대 남북문제부터 의제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답답하죠? 그런데, 이런 주변부적 답답함, 이 야만과 폭력 속에서는 김남주와 같은 유기적 지식인들이 형성될 수 있었으며, 결국 1980년대 말에는 산업화된 세계에서 가장 전투성이 높은 노조들이 출현됐습니다.

그 전투성이 식을 대로 식은 지금이라 해도 한 번 한국과 일본을 비교해보시죠. 이미 주변부도 아닌 한국이지만, 여러모로 사회의 저항능력은 훨씬 더 강합니다. 핵심부 고정 멤버 일본보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변부적 삶이란 어려움과 답답함 등과 동시에 어떤 가능성도 의미합니다. 변혁은 늘 (준)주변부에서 시작되니까요.

쏘련을 한상원이 논급하는 구주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정면 비교할 수도 없는 주된 이유는, 러시아/쏘련, 나아가서 동구 전체는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적 세계체제의 핵심부에 속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10월혁명의 장면

러시아 10월혁명의 장면

제정러시아는 경제적으로 봤을 때에는 서구의 식민지에 가까웠습니다. 1914년에 러시아 전체 산업자본의 약 47%는 외자(주로 프랑스, 벨기에, 영국 등지로부터의 투자)이었으며, 특히 가장 선진적 산업 부문은 거의 외국자본에 완전하게 종속돼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전기기계업 및 전기 관련 여타 부문에서는 약 90%를 독일자본 (주로 “시멘스” 재벌)이 콘트롤했으며, 금광업의 70%를 영국 자본이 콘트롤했습니다. 제정러시아 정부는 특히 프랑스로부터의 차관 없이는 그 어떤 대외적 행동(전쟁 등)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는 서구 열강과 일본 간섭군이 탄압하려 했다가 실패한 10월혁명과 그 후의 내전은 일면에서는 “제3세계 민족해방 운동”으로서의 성격도 강했습니다. 물론 개인 차원의 “전적 해방”을 꿈꾸시는 핵심부의 지식인 분 차원에서야 가난과 종속에 찌들린 오지에서의 그런 발버둥들은 다소 재미없게 느껴질 수도 있겠죠. 주변부의 해방운동들은 개개인의 전적 해방을 가져다주기에는 하도 거칠고 일차원적이잖아요?

대대로 폭력과 억압에 익숙해지고, 세상에 문제가 있으면 이건 다 “유대놈” 등 외부자 때문인 줄 알고, “선하신 우리 황제님”을 신의 대표자로 인식해온 사람들에게 아주 일차적, 근원적 계몽부터 필요할 것인데, 특히 “포스트” 입장에서 본다면 이것은 아마도 또 하나의 억압으로밖에 안 보일 것입니다.

“포스트”하시는 분들은 그런 일차적 계몽이 아직도 들어오지 않는 지역에서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 상상이라도 하실 수 있는가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10월혁명 자체도 “반제, 반식민 투쟁”의 일면이 있었기에 쏘련은 예컨대 중국 혁명 등의 자연스러운 우방이 될 수 있었습니다 (조선 혁명도 물론 그랬습니다).

결국 그렇게 해서 쏘련과 중국 등이 핵심부의 직접적 통제에서 벗어나서 잠시나마 대다수의 이해관계를 고려한 발전의 길로 갈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발전의 방식이 자본/노동 시장을 배제하고 노동의 상품화를 억제한 방식이었다는 것, 이것부터 좀 평가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굳이 싼 값에 노동력을 팔아야 할 필요성도 없는 핵심부의 “지식인”이 아니고 인류 구성원 대다수의 관점에서 본다면 말입니다.

혁명을 했다고 해서 대다수의 사고가 하루아침에 완전히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러시아 농민들의 근왕의식, “선한 황제” 갈망 따위가 결국 스딸린 개인 숭배에 대한 대다수의 적극적 수용 등 추악한 현상으로 이어진 것도 사실이고, 이런 현상들이 사회주의의 본래의 목적과 무관할뿐만 아니라 정면 배치돼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무엇보다는 세계체제의 구조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공업화에 성공했다 해도 쏘련은 많은 면에서 주변부적 사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기에 쏘독전쟁 (반파쇼 전쟁)에서 엄청난 희생(2천7백만 명)을 치르지 않고서는 승리를 거둘 수 없었으며, 그러기에 대미 무장경쟁에서 대개는 미국을 따라잡느라고 거의 국부의 대부분을 낭비해야 할 노릇이었습니다. 독일, 그리고 무엇보다는 미국에 비해 약자이었으니까요.

약자가 강자와 부득불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약자 집단 안에서의 사정이란 어떤 건지 굳이 자세히 설명드리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총동원 분위기, “적의 스파이”에 대한 광적인 공포, 물자 부족, 긴장, 그리고 그 긴장의 분위기를 이용하는 권력자들의 각종 월권 행사…굳이 보지 않아도 뻔합니다.

그런 곳에서 사는 것이 편하냐 하면, 전혀 그렇지도 않습니다. 물자 부족과 매일매일의 상점에서의 “줄 서서 기다리기”도 그렇지만, 예컨대 저의 스승 격이 되신 분들에게는 대외접촉에 대한 관련 기관의 통제는 가장 불편했습니다.

자본주의 국가 거주의 외국 동료가 레닌그라드에 오면, 그가 공산당원 등 검증된 “진보인사”가 아닌 이상 그와 대화를 나누고 나서 간단한 대화요약을 “제1부서”(각 직장단위에서의 보안기관 출장소)에 제출하라, 외국 학술지에 논문 게재하려면 먼저 그 논문을 국역하여 “제1부서”에 제출하고 국가기밀 누설이 없는지 확인 받으라 등… 귀찮아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솔직히요.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패권세력인 미 제국과 “담론”의 장이 아닌 실력의 장에서 붙으려면, 그리고 그 제국의 모든 파괴,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살아 남으려면, 이런 내부 규율 없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할 것인지 한 번 스스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미 제국주의와의 투쟁을 미국 학술지에서 실리는 논문에서, “혼종성”이나 “이질적 공간”, “탈주” 등을 이야기하면서 벌인다면 아무런 규율은 당연히 필요가 없죠. 그러나 그런 “투쟁”으로는 세상이 약간이라도 바뀐 적은 있었을까요?

세계체제 패권세력과의 실력 투쟁에서 쏘련 인민들이 그 자유와 권리를 아주 필요 이상으로 희생해온 거야 사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인권침해와 관료주의적 개인 자유의 유린이 많이 자행됐다는 것을 다 인정하더라도, 저는 그런 투쟁이 “좌파적 의미”에서 무의미했다고 전혀 보지 않습니다.

일단 (쏘련의 경험은) 노동의 상품화를 매우 억제하고, 이윤 추구가 아닌 다수의 이해관계를 고려한 계획으로 산업사회를 운영해도 그런 사회가 충분히 잘 발전될 수 있다는 사실부터 입증됐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쏘련이 이상사회인 건 절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군수공업의 전기수요 등이 있고 해서 탈핵에 거의 노력하지 않으면서 원전의존률이 높았다는 건 지금으로 봐서는 엄청난 미비점이죠.

그런데 예를 들어 체르노빌 재앙 이후 쏘련 당국의 피폭 인민들의 소개 작전과 후쿠시마 이후의 일본 당국의 대책을 한번 비교해보시죠.

일본에서는 과연 피폭지역으로부터 소개된 주민들에게 새 고장에서의 주택 공급과 직장 공급 등은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요? 일본은 구 쏘련보다 몇 배 부유한 사회이고 관료체제가 매우 발달된 사회인데, 빈민이 대부분인 후쿠시마 지역 주민들을 사실상 방기하고 거의 무대책으로 일관한 것은 자본주의의 기본적 속성과 연관돼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는 쏘련사회는 질적으로 많이 달랐습니다.

그것뿐인가요? 주변부에서의 동원사회라는 악조건 하에서 고투하면서 월남, 쿠바, 나아가서 남아공 등지에서의 혁명들과 연대해서 지원한 것은 자본주의적 세계체제 전체의 역사를 상당히 바꾼 건 아니었을까요?

월남에서의 참패가 아니었다면 70년대 이후 미 패권의 상대적 약화는 가능했을까요? 쿠바 혁명없이는 오늘날 베네수엘라의 변혁은 가능했을까요? 베네수엘라의 빈민들에게 물어본다면 과연 그들은 그들의 관점에서 쏘련을 “전체주의적 국가자본주의”로만 평가할까요?

미시간의 밤이 깊어집니다. 아무래도 한꺼번에 20세기의 역사를 바꾼 실험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위한 모든 이야기를 다 적을 수 없기에 일단 지금 여기까지 쓰고 나중에 이 문제에 대해 계속 상론토록 해보겠습니다.

결론을 대신해서 말씀드리자면… 역사는 교과서나 시험문제는 아닙니다. 역사에는 정답이 없어요. 역사를 변증법적으로 본다면 늘 진보에의 시도들에 각종 부작용들이 생기게 마련이고, 또 그런 시도들이 초기 동력의 소진에 따라 퇴보로 이어지기가 마련이기도 합니다. 쏘련의 실험도 그랬습니다.

가난과 억압에 시달려온 지역에서의 과감한 반체제적 반란은 시간이 갈수록 보수화, 제도화돼 그 한계를 노출시키고, 또 그 반란에 따르는 세계지배세력과의 무자비한 대결은 엄청난 희생을 요구해 그 반란의 초기 목적을 대단히 왜곡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그런 류의 반란들을 일으켜서 이윤 체계를 흔드는 것만은 우리가 “담론”이 아닌 현실의 차원에서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입니다.

현실로서의 쏘련에서는 추악한 면들은 많았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쏘비에트”의 꿈은 계속해서 러시아나 네팔, 인도, 콜럼비아 등지의 배제 당하고 짓밟힌 자들의 발버둥을 자극할 것입니다. 역사가 진보한다면 바로 그런 발버둥, 세계적 착취 체제에 대한 그런 대듦으로 진보합니다. (색깔 강조는 편집자)

필자소개
박노자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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