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동네 녹색대안' 만들기 실험
    [에정칼럼] 일상에 뿌리 내리는 지역정치를 찾아서
        2014년 03월 28일 11:0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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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평구 참여예산위원에서 만난 한 분과 명함을 주고받고 스팸에 가까운 이메일을 받고 있다. 첫 회의부터 뾰족함과 까칠함이 웬만한 운동권보다 더 해서 인상 깊었던 분이었다.

    50대 중반의 남성으로 ‘돈 받으면 할 말 못한다.’싶어 회사를 관두고 주부로 살며 주민자치위원, 참여예산위원 등 사회활동을 하시는 분이다. 은평구청과 은평구의회를 중심으로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감시하고 이를 사람들에게 이메일을 통해 알리신다.

    그래서 은평구의회가 열리면 상임위원회든 본회의든 방청하며 노트북 들고 꼼꼼히 기록하시고 뭔가 문제가 있다 생각 들면 사람들에게 알린다. 그분에게서 받은 메일 중 하나다.

    “은평 뉴타운과 뉴타운 외 타동과의 (쓰레기)봉투 값이 동일한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뉴타운 봉투 제작비용은 더 많이(투입구 인식표시 비용추가) 소요되는데도 불구하고 (중략) 뉴타운 주민들은 언제, 어느 때나 쓰레기를 투입구에 넣으면 됩니다. 다른 지역 주민은 1주일에 3번, 집 앞 또는 길에 내어 놓으면 지저분하고, 냄새도 나고 합니다. 많은 민원도 발생합니다. 은평구 구청은 조례에 봉투의 가격이 규정되어 어쩔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조례는 누가 제정 했을까요? (중략) 재무건설위원회 의원님들 조례개정을 하여 봉투 값의 인하를 요청합니다.”

    구의회 모니터, 진보구감 등 진보정당의 지역조직이 게으름 피우고 하지 못한 걸 이분은 정말 사심 없이 혼자 하고 있다. 물론 읽다보면 철학과 가치관의 차이로 동의 안 되는 주장을 가끔 하시기도 하지만 조례가 어떻게 바뀌었고 어떤 사업엔 예산이 늘고 어떤 사업엔 예산이 깎였는지 등 구청과 구의회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기에 유용한 정보들이 많다.

    그러나 그분의 노력에 비해 지역사회에서의 반향은 크지 않다. 공무원과 구의원들은 싫어하고 귀찮아 하지만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분을 통해 알게 된 정보를 가지고 집단적으로 발언하고 행동하는 데까지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조직적이지 않은 감시, 세력화 되지 않은 견제가 가진 한계인 것이다.

    협동조합과 지역시민사회단체의 활동이 활발하지만 지역의 정치권력에 대한 감시・견제 활동은 약한 편이다. 내가 속해 있는 노동당을 비롯한 녹색당, 정의당, 통합진보당의 지역조직들 역량도 낮은 수준이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구의원 후보 출마를 고민하며 ‘당선되면 은평구를 어떻게 바꿀 거야’란 선배의 물음 앞에 주춤했다. 당원이 아닌 친구들로부터 ‘공약이 뭐야?’란 물음을 처음 받고는 ‘중앙당과 시당에서 아직 정책이 정리되어 안 나왔는데…’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무상의료, 무상교육, 무상교통, 민영화 반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큰 줄기의 정책언어는 술술 말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우리 동네에서?’라는 데에 이르면 말문이 막힌다. 그리고 일상을 살아가는 주민들의 생활에 밀착한 구체적인 정책, 공약은 여전히 안개 속이다. 이것이 노동당의 후보로 나가고자 결심한 나의 부끄러운 수준이다.

    지역에 살면서도 지역에 대해 잘 모르고 선거 시기가 되면 상급 당부의 정책담당자가 잘 짜준 정책과 공약이 내려오기를 기다린다. 그렇게 받은 정책 중 지역에 맞는 것을 고르고 고치고 그것을 후보든 선거운동원인 당원들이 공부하고 외워 홍보한다. 선거기간 동안 열심히 외치고 다니지만, 우리가 외쳤던 정책과 공약은 선거일과 동시에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다음 선거 때까지. 정책 수립 과정의 전반적인 틀이 진보정당이라고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정책은 법률과 통계 수치를 분석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만드는 것이라는 고정관념. 그렇게 해서는 생활의제, 생활밀착형 정책은 나오기 어렵지 않을까. 더욱이 누군가가 만들어 내려준 정책대안이 지역 당원과 주민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 힘들지 않을까. 정책 수립 과정에 지역 당원들과 주민들이 참여한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정책은 힘과 생명력이 더 강할 것이다. 동시에 지역의 대안 역량도 높아질 것이다. 그것이 생활정치 아니겠는가.

    그런 문제의식 속에서 “우리동네 녹색대안 만들기” 실험이 시작됐다. 노동당 은평구 당원협의회와 은평녹색당이 주관하고 에너지정치센터, 좋은예산센터, 정보공개센터가 중간 지원 조직으로 서포팅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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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동네 녹색대안 만들기 모임 모습(사진 : 주현미)

    지난 1월 말 <은평 민중의집 랄랄라>에서 열린 첫 자리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참여의 목적과 마음가짐이 다 달랐다.

    다가오는 선거에 압박을 느낀 두 당의 후보들부터, 내 손으로 직접 지역정책을 만든다는 데 관심을 보인 당원, 당원으로 지역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막연해 보는 눈을 배우러 왔다는 당원, ‘풀뿌리 정치’ 말은 하지만 그게 뭔지 모르면서 정치를 야구 경기 구경하듯 비판만 해왔는데 이제는 참여하고 싶다는 사람, 우연히 랄랄라 들렀다가 재미있겠다 싶어 참여하게 된 주민까지.

    참가자들이 각자 관심 분야를 말하고 엇비슷한 주제를 묶어 에너지/토건교통/주거/문화/먹거리 5개의 모둠이 만들어졌다. 두 번째 모임에서 정보공개센터와 좋은예산센터에서 관련 교육을 받고 모둠별 주제에 맞는 정보를 청구하고 예산을 검토하는 숙제가 내려졌다. 각 주제에 맞춰 막히며 물어 보라고 멘토들도 붙여줬다.

    며칠 전 3번째 모임에서, 모둠별 경과보고를 했는데 생각만큼 진척되어 있진 않았다. 다들 생활인으로 쫓기며 살다 보니 미뤄두기도 하고 또 처음이다 보니 서툴러 계획처럼 속도가 안 난다. 그래서 과연 지방선거 전에 지역공약이 나올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잘 다듬어진 종합 대안이나 아름다운 그림이 나오지 않으면 어떠랴. 12년 진보정당 당원으로 살았지만 ‘일상에 뿌리 내리는 지역 정치’가 여전히 막연하기만 한 우리들에겐 유의미한 실험이지 않을까.

    6.4 지방선거가 계기가 됐을 뿐 선거 이후에도 은평구의 ‘녹색대안’을 만드는 실험은 계속될 것이고 이것은 첫 걸음일 뿐이다. 첫 실험은 두 당의 활동당원들이 중심이지만 선거 이후에는 주민 참가자를 모아서 함께 하는 ‘민중의회(혹은 시민의회)’를 열어보자는 꿈까지 꾸고 있으니.

    필자소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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