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균의 군대, 지금의 국정원
    [산하의 가전사] 잔머리의 비극
        2014년 03월 28일 10:5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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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7년 3월 25일 선조실록을 보면 임금 선조가 기분이 무척 좋다. “통제사 원균이 임명을 받자마자 곧 무용을 떨쳐 적선 3척을 포획하고 수급 47급을 바쳤으니 매우 가상하다.”

    전임 통제사 이순신의 전과에 비하면 그닥 대단할 것도 없었지만 임금이 이렇게 ‘가상해’ 한 이유는 따로 있었지. 이순신을 끌어내리고 원균을 그 자리에 앉힌 사람이 자신이니까.

    비유하자면 아이들이 추천한 반장 물리치고 육성회장 아들 반장 삼았는데 그 반장이 올백을 맞았을 때 담임의 심경.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있답니다.”라고 말하고 싶어 좀이 쑤시는 표정 짐작이 가겠지? 선조가 그랬지. 원균에게 상을 내리는 건 물론 누군가 공이 있으면 더 적어 올리고 장계를 가져온 사람까지 상을 내리려 했으니 알쪼지.

    그러나 좋아하는 건 임금 뿐이었어. 비변사에서는 이렇게 삐딱하게 나오고 있었거든. “원균이 바친 왜군의 모가지들이 만약 나무를 베러 온 이들이라면 쳐들어와서 사람을 죽인 왜적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게 무슨 얘길까. 원균의 보고에 따르면 기문포라는 곳에 들어온 왜군을 들이쳐서 배 3척을 침몰시키고 47명의 목을 베었다는 건데 ‘나무를 베러 온 이들’이라는 건? 이미 원균의 보고와는 다른 내용이 조정에 알려져 있었거든.

    다른 보고에 따르면 이 일본군들은 3월 초, 조선군과의 양해 하에 (당시는 휴전 비슷한 상태여서 이런 일이 가능했어) 나무를 베러 온 병력이었어. 조선 수군이 나타나자 기겁을 하고 땅에 엎드렸고 원균도 얘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술까지 먹인다. “한 잔 먹고 돌아가라.” 일본군들은 코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얼굴들이 벌개서 자기들 배를 타고 돌아가는데 갑자기 원균의 팔이 올라가. “공격” 포를 쏘고 화살이 쏟아지자 왜군들은 기겁을 하지. 이게 무슨 뒤통수냐.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분노는 상상 외로 크다. 정예병이라기보다는 보급 임무를 맡은 일본군들이었지만 이들은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 목숨을 걸고 싸울 생각을 하지. 잃을 것 없는 자들만큼 무서운 건 없거든.

    여기에 잘못 걸린 게 경상도 고성 고을 사또였던 조응도의 배였지. 공을 세우려고 그랬는지 영차 영차 배 저어 일본군 배들까지 제일 빨리 다가선 건 좋았는데 악에 받친 일본군들이 일제히 조응도의 배에 달라붙어 방패벽을 넘고 갑판에 뛰어내린 거야.

    일단 좁은 공간에서 칼싸움을 시작하면 조선군은 일본군의 적수가 안된다는 게 임진왜란 내내 처절하게 깨달은 교훈. 조응도의 배 위의 조선군은 싹쓸이되거나 물에 뛰어든다. 조응도 본인도 칼에 맞아 바다에 떨어져 구조되긴 하지만 숨을 거두지.

    마침내 조선의 주력 전함인 판옥선 한 척이 나무꾼들에게 나포가 되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진다. 조선군은 이제는 자기들이 피땀 흘려 만든 판옥선을 공격해 불태워야 했지. 그리고서야 물에 떠오른 왜군들의 시신을 건져 장만한 것이 문제의 마흔 일곱 개의 머리였던 거야.

    ‘가상’한 일은 전혀 아니고 오히려 ‘가증’스러운 일이었지. 전투병도 아닌 나무하러 온 병사들을 감언이설로 속여 술까지 먹이고 고이 돌아가게 한 다음 뒤통수를 때리는 졸렬한 수단이었으니.

    아마도 원균은 그로부터 1년 전 자신이 쳤던 큰소리를 생각하고 있었을 거야. “나 같으면 부산포를 들이치겠습니다. 육군만 함께 해 준다면 문제 없습니다!” 그러고 임금 무시한 죄로 잡혀간 이순신의 뒤를 이어 통제사에 앉았으니 뭔가 폼 잡을 일이 필요했던 거지.

    부하들에게 괜시리 시체들 갈고리로 끌어올려 목 딸 생각하지 말라던 이순신과는 달리 그에게는 ‘증거’가 필요했던 거고. 저항도 없이 납작 엎드린 일본군을 죽이는 것보다는 “달아나는 적들을 분연히 쫓아 격멸하고 목을 치는” 견적을 냈던 거고.

    지혜롭지 못한 이들은 잔머리를 굴리지 말고 그냥 우직한 대로 살아야 해. 그래야 주변에 피해가 없고 사람들로 하여금 착각하게 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주변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고 결국은 감당할 수 없는 눈덩이같은 피해를 스스로 빚게 되는 거지.

    당장 경상도 지역 조선군 지휘관 김응서에게서 급보가 날아들고 총사령관 권율도 진상을 밝히지. 김응서의 보고에 등장하는 일본군 장수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을 것 같다.

    “용무를 밝히고 공문까지 보였는데 자기 배에 초대하여 술까지 먹인 후 불시에 포를 쏘아 다 죽이다니 이런 법이 세상에 어디 있소. 나무하러 온 쪽배 몇 척 잡았다고 그게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조선군은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요.” 그러면서 그는 협박한다. “우리도 조선 백성들 좀 잡아 족쳐야겠소.”

    나쁜 사람은 그만큼 상대하기 쉽다. 품성이 나쁜 건 꼭 지적하지 않아도 드러나게 마련이고 경계 받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멍청한 사람들은 대개 그 멍청함을 감추는 재주 있기가 쉽고 스스로도 잘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위험해. (내 얘기 아니다)

    그들은 용감한 체 하지만 사실은 용렬하고 충성하려 하지만 충성의 방법을 모른다. 그래서 소나기를 피하려다가 장마비를 만나고 어떻게 잘못을 수습할 줄 몰라 남에게 그 죄를 뒤집어씌우기를 잘한다.

    조선 함대를 깨끗이 말아먹은 칠천량 해전에 대해서도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요즘 뉴스에 등장하는 한국군이나 국정원을 보면 글자 그대로 선조가 다스리는 원균의 군대 같아서,그들이 칠천량 꼴로 허무하게 무너지고 우리의 ‘안보’ 같은 건 불쏘시개가 될 것 같아 겁나.

    술상 차려 준 뒤 뒤통수 때리고 그 목 잘라서 공 세웠네 임금에게 바친 원균이나 남의 나라 공문서 조작하고 증거는 없지만 간첩이라고 우기는 국정원이나 “같이 잘까?”는 성희롱이 아니라고 우기거나 “고인이 자신은 잘 있으니 가해자는 용서하라고 그랬다고 무당이 그랬다네요.”라고 유족들을 위로한답시거나 “원래 아드님은 급살할 팔자였답니다.”라는 점괘를 들이미는 군인들이나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어.

    필자소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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