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기전으로 이인좌를 잡다
    [산하의 가전사] 노론의 일당독재, 지금 현실과 다른가?
        2014년 03월 25일 04:3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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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사극 영화를 보다가 기함을 할 때가 있어. 아무리 드라마는 드라마고 허구는 허구라지만 그래도 실제 있었던 일에서 가지를 쳐야 하는 건데 이건 SF 수준의 스토리가 난무할 때가 있단 말이지.

    영화 <신기전>이 그랬어. 세종 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고 명나라 사신이 등장하는 건 좋은데 명나라 사신이 청나라 복장을 하고 있는 건 어안이 벙벙한 일이었는데다 영화 속 ‘신기전’을 두고 무슨 탄도미사일같이 묘사한 데에는 가족오락관 MC만 부르게 되더라. 허 참 허 참. 당시 그런 무기가 있었다면 아마 오늘날 지구의 공용어는 한국어이지 않았겠어.

    신기전은 위력도 있고 훌륭한 무기지만 유황을 전량 수입했던 처지로 효용 대비 투자가 너무 많은 무기였고 정확도도 떨어지는 등 단점도 만만찮은 무기였어. 신호용으로나 위협용으로 즐겨 쓰였는데 이 신기전은 조선 왕조 최대의 국내적 위기를 넘기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다. 1728년 3월 23일의 안성 청룡산 전투에서였지.

    신기전

    용산전쟁기념관의 대중소 신기전의 모습(엔하위키)

    박시백 선배의 <만화 조선왕조실록>이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는데 시간 나면 도서관에서 챙겨 보기 바란다. 숙종편과 경종편 영조편을 보면 그 왕들의 즉위와 교체기에 얼마나 많은 암투가 벌어졌고 당파간의 환국,, 즉 정권 교체가 횡행했는가를 대충 짐작할 수 있어.

    그리고 이 시기의 특징은 붕당싸움이 정권을 잃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뿐 아니라 가문의 생사를 건 판갈이로 화하고 있었다는 거야.

    왕조차 절대 충성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당파의 이익과 권력의 대변자로 전락했지. 소론과 남인의 지지를 받았던 경종을 두고 노론 당파에 속한 이가 “우리는 경종에 예의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동시에 소론과 남인에게 노론의 지지를 받아 등극한 영조도 마찬가지로 비토를 받지. 한 술 더 떠 경종 독살설이 퍼지면서 영조는 그 반대파에게는 한낱 왕위 찬탈자에 지나지 않게 돼. 소론 가운데 강경파들은 남인과 북인들까지 끌어들인 반란을 기획하지.

    그런데 노론의 지지를 받고 왕이 됐지만 붕당의 폐해를 극복해 보려던 영조는 난이 일어나기 조금 전에 노론 일색의 정권을 갈아치우고 온건 소론파를 등용했는데 이로 인해 반란을 꿈꾸던 이들 사이에도 균열이 일어나지. “우리가 왜 이런 주상을 갈아치워야 되는 거지?” 목표가 일그러지면 단결도 흔들리는 법. 잇따라 역모 사실이 알려지고 조급해진 충청도의 이인좌는 반란의 봉화를 들어올려. 이인좌의 난이라고 부르는 무신란(戊申亂)의 시작이지.

    이인좌가 주도한 난이라기보다는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일대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난 반란이고 이인좌가 죽은 뒤에도 경상도 일원에는 반란이 계속될 만큼 대규모였지. 이인좌는 청주성을 점령하고 기세등등 서울로 진격하게 돼. 그는 경종 임금의 위패에 날마다 곡을 하면서 자신의 거사의 명분을 세우려 들었지. 즉 경종 임금은 독살 당했고 영조가 그 범인이라는 거지.

    이인좌의 난 소식을 들은 영조는 노발대발하지. 후일 아들마저 죽여 버리는 이 다혈질이 얼마나 흥분했겠어. 소론이 일으킨 난리니 조정 안의 소론 대신들도 안절부절이었지.

    오명항 같은 사람은 자기도 소론으로서 책임이 있으니 물러나겠다고 하지만 영조의 답은 이랬지. “소론의 난이니 소론이 진압하라.” 오명항은 도원수가 돼서 경군을 이끌고 남하한다. 충청도에서 올라오는 이인좌군과 맞부딪친 게 안성 청룡산 전투. 1728년 3월 23일이었지.

    오명항은 관군이 직산으로 간다고 선전한 후 안성으로 들이닥쳤고 어둠 속에서 이인좌 군과 마주하게 돼. 이인좌는 관군이 직산으로 갔으니 자신의 앞의 군대는 안성의 지방 병력이라고 착각하고 공격을 서두르게 되는데 그들의 기를 꺾은 게 신기전이었어.

    밤하늘을 가르면서 쉬쉭거리며 날아오는 신기전을 보면서 이인좌의 반란군은 이들이 지방군이 아닌 경군임을 깨닫고 경악하고 만다. 장비가 부족한 반란군으로는 주변에서 펑펑 터지거나 (수류탄 위력 정도는 충분히 냈지) 사람 정도는 우습게 관통해 버리는 신기전의 위력에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어 결전을 앞두고도 코를 골면서 잠이 든 바 있는 배짱 좋은 오명항은 총공격을 명령했고 이인좌 부대는 박살이 난다. 이인좌는 시골 사람들에게 붙잡혀 서울로 끌려와 능지처참을 당하게 되지.

    그 뒤로도 경상도 일원에는 반란이 계속되면서 남인의 본거지였던 영남은 반역향으로 찍히게 된다. 오죽하면 영조가 대구 감영 앞에 ‘평영남비’ (영남 평정 기념비)를 세웠을까. 그리고 이 반란으로 흉흉해진 삼남지역의 민심을 살피기 위해 암행어사를 파견하는데 바로 그 사람이 유명한 ‘암행어사 박문수’다. 이 사람 역시 소론이었지.

    이처럼 반란 이후에도 영조는 탕평을 강조했지만 강경파 소론은 징하다 싶을 만큼 영조에 반항하지. 고립되면 고립될수록 그 독기와 결기는 강해지나 봐. 강경파 소론들은 이후 30년간 집단 자살에 가깝도록 역모를 꾸미다가 몰살당하는 일을 반복해. 심지어 과거 보러 온 시험지에 지금 임금은 경종을 독살했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식의 글을 써 내는 그야말로 “나 죽으려고 환장했음” 시위를 벌이기도 해.

    남인 북인이 한참 전에 정계에서 밀려나고 서인이 갈린 노론과 소론 중 소론도 점차 약화되면서 노론은 점차 일당 독재의 형국을 차지하게 돼. 영조도 그랬고 정조도 그랬고 탕평책을 기치로 들면서 균형을 맞추려고 애를 쓰지만 그들조차 노론을 가장 중요한 정치적 파트너로 삼을 수밖에 없었지.

    청룡산 전투에서 마주쳤던 두 소론 모두 그런 미래를 바라지 않았을 테지만 이인좌의 난은 그 암담한 길의 시작을 알리는 전초였고 청룡산 산자락에 쏟아진 신기전은 신호탄과도 같았지.

    왜 무신란 얘기를 꺼냈느냐고? 그냥….. 나는 요즘 우리나라 정치도 그 양상이 비슷해져 가는 것 같아서. 한국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노론(?)의 힘은 날이 갈수록 요지부동인 것 같고 거기에 저항하는 세력은 날로 쇠약해지고 오명항과 이인좌처럼 소론끼리 싸우다가 쇠약해지거나 고립되고 악에 받친 신념으로 자멸적인 길을 걷고 있지 않나 겁난단 말이지.

    필자소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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