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생과 교사,
    어디까지 평등할 수 있을까
    학생인권과 교권의 대립…교육의 본질적 특성에서 봐야
        2014년 03월 24일 03:0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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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청소년단체 ‘아수나로’에서 최근 녹색당의 반핵운동 구호 중 ‘아이들을 위한’이라는 표현이 ‘아이들’을 반핵운동의 주체에서 배제한다는 논리를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소수자 감수성을 제기한 것이라는 지지의 입장과, 지나친 평등주의적 관점이라는 반론이 있는 가운데, 대중예술인 서윤씨가 이번 논란과 관련해 하나하나 짚어봤다. 서윤씨는 그동안 학생인권조례로 인해 갈등이 증폭된 학생인권 대 교권이라는 대립 구도에서, 학생인권조례를 지지하면서도 우려됐던 지점들을 조심스럽게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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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 자유, 평등, 정의, 이런 말들은 너무 그 범위가 크고 포괄적이어서, 그 단어 자체로는 아무 뜻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왕왕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권 말입니다. 이 말은 사람이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사할 수 있고 존중받아야 하는 모든 권리를 일컬을 텐데요, 그 종류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사회가 복잡하게 나뉘고 분야마다 그 분야에 맞는 각론이 있습니다. 그 각론은 또 내부적으로 나름의 논쟁들이 있을 테고요.

    나는 인권이란 개념이 그런 각론들 내부에 형성된 논의의 각축장에 함부로 끼어들었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각론 내에서도 산재하는 여러 입장이 서로 충분히 부딪치고 타협해보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인권이라는 개념을 가져온다면, 각론 속에서 뒤채일 각 입장들이 입을 다물어버리는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결국 논의는 알맹이 없이 “인권”이라는 말만 반복하다 끝나는 셈이죠.

    이건 아마 평등이라는 개념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나는 일단, 평등이란 단어가 완전한 수평적 관계를 지칭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물론 관념적으로 보면 그것은 수평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어떤 것으로도 그 개념이 훼손되지 않을 평등한 것은 삶과 죽음 하나뿐인 것 같습니다. 나머지는 본질적으로, 혹은 작위적으로 형성된 불평등의 요소를 늘 포함하고 있다고 봅니다.

    작위적으로 형성된 불평등은 우리가 당연히 해소해야 하고 지양해야 할 것들입니다. 이와 달리, 인간의 활동 중에는 필연적인 불평등을 내포한 것들이 있습니다. 부정할 길 없는 불평등, 속된 말로 접어줄 수밖에 없는 불평등 말입니다.

    대개 이런 필연적인 불평등은 활동을 위한 관계의 설정에서부터 시작되곤 하는데요, 가장 대표적이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이슈가 되는 것이 바로 교육이란 분야가 아닌가 합니다.

    곧 선거도 다가오고요, 교육감이 누가 되느냐, 교육감이 되고자 하는 분들이 실현하려는 의제는 무엇이냐 하는 점들은 요 몇 년 새 가장 자주 회자되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요즘 들어 한층 활발해진 청소년 인권운동이라든가, 전혀 식을 기색이 없는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들, 그에 관련된 교권과 학생인권 간의 첨예한 갈등양상, 이런 현상들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교육이 가장 쟁점적인 사안 중 하나라는 방증 아니겠습니까?

    언급된 여러 쟁점들은 모두 직간접적으로 교육과 관련해서 우리가 생각할 만한 질문거리를 던져줍니다. 물론 청소년 인권운동의 경우엔 교육과 직접적인 연관성은 적지만, 우리가 크게 보아 교육대상으로 여기는 청소년 계층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들과 성인들의 관계 설정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점에서 교육의 원론적인 부분에 생각거리를 제공합니다.

    그래서 교육에서의 평등이 어떤 의미인지를 짚어보는 일이 필요할 성 싶습니다. 다루려는 주제가 평등인 만큼 원론적인 부분을 건드려 주는 편이 의미 있을 거란 생각에서입니다. 이야기는 좀 방만해질 위험이 있겠지만요.

    ‘우리 아이들을 위한’이라는 구호, ‘다음 세대’를 위한 구호로 해석해야

    며칠 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는 녹색당의 반핵운동 구호를 비판하는 글이 나왔습니다. 내용은 이래요

    반핵 내지는 탈핵을 외치는 구호에서 ‘아이들을 위한’이란 말은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이들’이 보호받아야 하는 대상이요, 따라서 ‘아이들’은 반핵이나 탈핵운동의 주체에서 제외된다는 논리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현대 사회의 주체이며, 따라서 ‘아이들을 위한’이란 구호는 아이들을 동등한 주체로 존중하는 데 부적절한 구호다. 더구나 아이들은 이 구호를 외칠 수도 없다. 이 구호에 따르면 아이들은 구호를 외치는 주체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른들로부터의 어떤 보호대상도 되지 않는 동등한 주체로 참여하기를 원한다. 그러니 앞으로는 ‘우리 모두를 위한’으로 바꾸는 편이 좋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논변이 다소 거칠고 설득력이 부족한 글이라 하겠습니다. ‘아이들을 위한’이란 말은 내가 보기엔 ‘다음 세대를 위한’으로 해석되는 게 온당하거든요.

    ‘아이들을 위한’에서 ‘우리 모두를 위한’으로 바꾸자는 데에는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반핵이나 탈핵은 지금 당장 될 일이 아닙니다. 수백 기가 넘는 원전을 즉시 폐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정치적인 문제와 그에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니까요. 당장 그것을 모조리 폐쇄할 수만 있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당장 그것들을 폐쇄해버린다면, 정치인들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원전에서 일하며 먹고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겠어요? 그들에 대한 안배를 하는 일만도 시간이 꽤 걸리는 일입니다.

    하지만 단지 현실적인 여건 때문에 당장 불가능하다 해도 ‘언젠가는 해야만 한다’는 건 분명합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언젠가는 되어야 한다’는 그 당위 때문에, 반핵이나 탈핵을 외치는 구호는 필연적으로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 된다는 점입니다.

    청소년과 성인간의 실제적인 위계 있다는 것 인정해야
    일률적인 평등 주장은 복잡한 각론 진행 방해…’평등 환상’ 깨야

    또 하나 동의할 수 있는 이유라면 (아수나로의) 글 속에 있습니다. ‘우리들도 함께 외칠 수 있는’ 구호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건 일종의 수사적인 문제이지, ‘아이들을 위해’라는 구호가 반핵운동에서 청소년을 배제하는 구조적 억압의 기표라는 견해는 미심쩍기만 합니다.

    아주 그런 면이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청소년 인권행동 활동가들에게 이 문제가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보이기에, 그 해석 자체가 부당하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단지 그런 요소를 지나치게 부각시킨다는 인상을 지우긴 어렵군요.

    하나 더 아쉬운 점이라면 글쓴이가 상징적 평등과 실제적 평등을 버무리는 부분인데요. ‘평등한 주체로서 운동에 포함되기’를 원하는 청소년들의 열망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따라서 그 주장 자체에 어깃장을 놓고 싶진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청소년들의 열망이 수용되어야 한다는 당위가 곧 청소년과 성인의 완전한 평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님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좀 도발적인 언사가 될 수 있겠습니다만, 청소년들, 실제로 보호대상 맞습니다. 이건 누구도 모르지 않을 텐데요.

    청소년과 성인 사이의 위계는 지극히 실제적인 층위에서 발생하는 까닭에, 상징적 평등을 외치는 청소년들의 열망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관건은 실제적 불평등으로부터 오는 불리한 위치를 받아들이고, 취할 수 있는 상징적 평등을 얼마나 취하느냐 하는 점이 아니겠습니까. 일률적 평등을 주장하는 불필요한 수사는 자제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조심스레 진단하자면, 이런 주장이 ‘평등’이란 이름의 환상에 매몰된 결과는 아닐까 합니다.

    나는 평등이란 개념이 끼일 수 있는 자리가 아주 많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글의 서두에서 밝혔듯 그 개념이 포괄하는 의미의 범위가 너무 넓은 탓에,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논쟁에 개입될 경우, 특정 상황의 맥락에서 필요한 여러 이야기들을 무력화시킬 공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논쟁에 필요한 개념들을 논리의 트리로 구성해서 보자면 아마도 평등은 트리의 최상위에 위치해 있을 겁니다. 해당 논쟁의 장(場)에서 옥신각신 다투고 타협해서 해결을 볼 문제는 해결을 보고, 도저히 그 층위에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그때 상위의 개념을 가져와서 기준을 세우고 이야기를 진행해가는 편이 더욱 건설적이지 않을까요?

    그러나 처음부터 평등이라는 상위 개념을 끌어와 이야기를 진행해버린다면, 해당 논쟁의 장에서 충분히 다뤄져야 할 점들은 묻혀버린 채 이야기는 교착상태에 빠지고 말 겁니다. 즉, 평등 개념의 기계적이고 일률적 적용은 복잡다단한 각론의 진행을 가로막는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나만의 견해가 아닙니다. 멀리는 키케로에서부터, 가까이는 E.H.슈마허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선인들이 논쟁의 이런 특성을 지적해왔습니다.

    학생인권

    학생인권, 교사와 학생간의 위계 전면 부정으로 이어진다면 더 큰 문제

    상위 개념의 섣부른 도입은 심지어는 각론의 뿌리를 뽑아버리는 일마저도 야기할 수 있는데요, 이 글의 주된 관심사인 교육과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예시를 들면서 이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얼마 전 서울시 학생인권조례를 개악하는 데 대한 토론회가 열렸었죠. 거기서 나온 한 발언자의 발언 내용이 몹시 (부정적인 의미로) 인상적이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실 교사라는 직업은 우리의 윗사람이 아니죠. 교사는 학생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졌을 뿐이고, 학교라는 공간은 교사가 가진 더 많은 지식을 학생이 나누어 갖는 공간입니다. 왜 교사와 학생 사이에 위아래가 있어야 하죠?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위의 발언은 다소 격앙된 상태에서 나온 내용이며 (그래서인지 몰라도) 극단적인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만, 이와 어슷비슷한 생각을 나는 참 많이도 보고 듣고 읽어왔습니다. 정말 교사와 학생 사이에는 위계가 없는 걸까요? 더 정확히 말해서, 없어야 합니까?

    교사라는 위치, 교사라는 사람들의 역할에 대한 저 발언자의 생각을 탓하고 싶진 않습니다. 어쩌면 교사라는 위치에 선 윗세대에 대한 지독한 불신 때문에 저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점에선 참으로 면구스럽습니다).

    이 문제(학생인권조례)는 교육과 관련해서 근래 들어 대두된 사안들 중 아마도 가장 논쟁적인 사안이 아닐까 합니다.

    학생들이 종교, 인종, 가정의 경제적․사회적 여건, 가치관, 성적 지향 내지는 취향, (성생활을 포함한) 각종 사생활로 인해 차별받지 않아야 하는 것은 불문가지입니다. 체벌이나 폭언과 같은 폭력 또한 당연히 금지되어야 하고요.

    그렇지만 지켜져야 할 학생인권이 곧 교사와 학생 간의 위계에 대한 전면적 부정으로 이어진다면, 나는 그것이 학생인권조례 개악보다 더욱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생인권조례는, 교사가 교사로서의 권한을 남용하지 않도록, 학생이 부당한 이유로 억압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지, 학생과 교사를 동등하게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완전한 평등한 관계, 서로간의 베풂의 질과 양이 동등함을 전제해야

    나는 굉장히 궁금합니다. 교사와 학생 사이의 위계를 용인할 수 없는 이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교육이 무엇입니까?

    굳이 사변적인 말들을 쓸 일도 아니죠. 교육이란 결국, “누군가가 누군가의 성장을 돕는 일”입니다. 그것이 지켜보는 일이건 조언하는 일이건, 이끄는 일이건, 강제하여 훈육하는 일이건 마찬가지입니다.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 “성장을 돕는다”는 데 이견을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성장하는 이가 학생이고 성장을 돕는 이가 교사가 되겠죠. 학생은 자식일 수도 있고 후배일 수도 있고 후임병일 수도 있고, 또는 사내에서의 후임자일 수도, 많은 경우엔 정말 문자 그대로 학생이기도 합니다. 이 관계가 정말 평등해야만 하는 것입니까?

    교사와 학생이라는 관계가 정말로 완전히 평등하다면, ‘교사’와 ‘학생’이란 관계 자체가 성립 불가능한 것은 아닌지요? 완전히 평등한 관계란 건, 내가 보기엔 호혜적 관계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베풂의 질과 양이 거의 동등함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과연 교사와 학생의 관계도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가르치는 일은 곧 배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가르침과 동시에 자기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지식과 사유가 정돈된다는 것은 경험적으로도 알 수 있고, 이미 교육심리학에서도 여러 차례에 걸쳐 증명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교사가 자신의 지식과 어지러운 사유의 편린을, 가르치는 과정 속에서 정돈한다 해서 교사가 곧 학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교사의 미덕 혹은 교육행위에 수반되는 부수적 효과 중 하나일 뿐, 교육행위의 당위라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학생은 교사로부터 배움을 통해 모르던 것을 알게되고 새로운 사유를 할 기회 혹은 단서를 얻게 됩니다. 그렇다고 교사가 학생으로부터 새로운 사유의 방향을 얻는 것이 학생만큼 잦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일견 도식적인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이런 면에서 교사와 학생 간의 호혜적 관계는 서로 베푸는 질과 양이 동등할 수 없습니다.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완전한 평등’은 불가능, 베풂의 질과 양에서 위계 생겨

    여기서 잠시 서로에게 배우는 친구의 관계를 생각해봅시다. 이 경우에도 우리는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베푸는 질과 양이 언제나 동등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런 차이가 지속적이라고 한다면 과연 그들은 계속해서 친구관계로 남을 수 있을까요?

    그들의 미래는 다음의 둘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서서히 혹은 어느 날 멀어져버리거나, 아니면 많이 베푸는 쪽이 덜 베푸는 쪽보다 결정권을 갖거나’.

    이것이 평등한 친구관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성인군자가 아니고서야 끊임없이 베풀기만 하면서도 “자네는 둘도 없는 나의 영원한 벗일세”하며 언제까지나 껄껄껄 웃어줄 수 있겠습니까?

    서로에 대한 베풂의 질과 양에서의 차이가 좁혀지지 않으면서도 그 관계의 지속성이 담보되는 것은, 그 관계가 자체적으로 위계를 지니고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즉, 더 베푸는 쪽이 덜 베푸는 쪽보다 더 많은 권한을 행사하는 관계 말입니다.

    하나가 더 있죠. 친구관계와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다른 점 말입니다.

    서로에게 배우는 친구의 관계에서는, 단지 자신을 상대에게 보여주는 것만으로 족합니다. 얼마나 배우는지는 각자의 몫입니다. 이것은 교육행위가 아닙니다. 명백한 교육의도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명백한 교육의도가 개입되면서 설정된 관계입니다.

    교사의 부당한 직권남용 지양…그러나 위계질서 부정은 곧 교육행위 부정

    지금까지 말한 이유 때문에 나는, 교사와 학생은 그 관계 자체가 이미 위계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교사와 학생 사이의 이 본질적인 위계를 무너뜨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교육행위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사와 학생이란 관계도 없이 교육행위가 이뤄질리 없으니까요. 앞서 교사와 학생 사이의 위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행위가 학생인권조례 개악보다도 위험하다고 지적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입니다.

    오늘날 학교에서 일어나는 교사의 부당한 직권남용, 지나친 위계질서, 그로 인해 벌어지는 물리적․상징적 폭력 따위는 마땅히 지양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 때문에 교사와 학생 사이의 위계 자체를 뿌리부터 부정한다면, 그 부정으로 인한 폐단은 부당한 위계질서에 의한 폐단 못지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더욱 큰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겠죠. 왜냐하면, 부당한 위계질서에 의한 폐단은 교육행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학생인권조례 개악을 지지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또한, 교사와 학생이란 관계의 태생적인 불평등이 옳다는 것도 아닙니다. 교육을 부정할 생각이 아니라면 그 관계의 불평등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일 뿐입니다.

    오해를 피하고자 반복해서 씁니다만, 나는 교사의 직권남용과 그로 인해 침해당하는 학생들의 권리는 지켜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를 위한 모든 움직임에도 지지를 보냅니다. 이 글을 통해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인권 내지는 평등과 같은 개념에 경도된 나머지 인정할 부분마저 간과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육에서의 평등을 실현하는 일은, 교육에서의 필연적인 불평등을 받아들일 때 오히려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래야 현실적인 의제를 수립하고 실행하는 데서 더 많은 공감과 지지를 확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필자소개
    대중예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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