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의 철저한 배제와 희망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 <노동의 새벽>을 다시 읽는다
        2014년 03월 24일 12:01 오후

    Print Friendly

    정녕 봄은 왔지만 봄 같지 않다. 겨우내 그리움이 싹들로 움트느라 대지는 진동하고, 우듬지로 길러온 소망이 연초록 이파리로 터지는데, 하늘은 미세먼지로 가득하다.

    산수유 연노랑 꽃이 코숭이로 가는 오솔길에 흐드러지고, 매화 향기는 벌써 눈으로 들어간 지 서너 시간이 지났는데 노래로 토해져 나오진 않는다. 선거부정으로 권력을 찬탈한 자가 하야는커녕, 노동을 철저히 탄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저리도 고운 꽃들이, 성큼 다가온 봄이 더 원망스럽고 서럽다.

    이 시대의 핵심 모순을 들라면 단연 철저한 노동 배제와 탄압, 이로 인한 노동자의 생존위기다. 절반이 비정규직이고, 수많은 노동자가 억울하게 해고를 당하여 거리로 떠도는데, 자본-국가-보수언론-대형교회-어용학자들로 이루어진 카르텔은 더욱 공고해지고, 이에 맞설 진보는 괴멸되었다.

    견제가 사라지자, 박근혜 정권은, 이명박 정권의 신자유주의 드라이브에 겨우 살아남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몇몇 공공영역마저 사영화하고 진보적 의제와 실천을 봉쇄하는 데 모든 권력을 동원하고 성역인 민주노총까지 침탈하였다. 사법부와 언론조차 굴종한 지 오래이고, 시민마저 신자유주의의 탐욕과 경쟁, 공포를 내면화하여 권위에 복종하고 있다.

    아주 쓸쓸한 풍경화 한 장면. 대우해양조선에서 넉 달 사이에만 산재사고로 3명이 사망하고 9명이 중상을 당하였다. 엄청난 대형참사인데, 이를 규탄하고 수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작년에 서울검찰청 앞에서 열었는데, 종이신문은 물론, 인터넷신문을 포함하여 단 한 곳의 기자도 오지 않았다.

    쌍용자동차에서 회계조작을 하여 억울하게 2646명을 해고하고 이들의 정당한 항의에 대해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러 생존위기와 후유증과 절망으로 24명이 사회적 타살을 당했는데도 국정조사를 열어달라는 최소한의 요구조차 무시하고 있다. 분향소마저 철거당하고 그 자리엔 화단이 놓이고 경찰들이 꽃들을 지키고 있다.

    이런 철저한 노동배제의 상황에서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을 다시 읽는다.(이하 아래 글은 <문학과 경계>에 “고통이 관리되는 사회의 풍경과 내면, 그리고 기억”이란 제목으로 썼던 글을 일부 수정한 것이다.)

    노동의 새벽

    전쟁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 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가도
    끝내 못 가도
    어쩔 수 없지(중략…)

    늘어처진 육신에
    또 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으로 붓는다.(중략…)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줏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위는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부분이다. 노동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한 과정, 곧 몸의 운동을 통하여 외부의 자연에 작용하여 변화시키고 이로 자신의 본성도 변화시킨다. 노동이란 나라는 주체가 내 목적과 의지에 따라 생산도구를 사용하여 내 앞의 세계를 개조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실천행위다.

    그러기에 노동이란 진정한 자기실현, 곧 자유다. 노동은 세계 속으로 시간을 끌어들인다. “노동은 살아있는 것, 형식을 부여하는 불이다. 그것은 살아있는 시간에 의하여 형성되는 구성물로서 사물과 그들의 시간성의 변이다.” 노동은 타인을 자유롭게 하기에 대자적 자유, 곧 정의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노동은 돈 버는 행위로 전락하고 노동자는 기계의 부품처럼 다루어지고 잉여가치를 자본에게 착취당하며 소외를 심화한다.

    몇몇 자본은 이윤을 늘리기 위해 야간노동마저 감행하여 노동자를 처절하게 착취한다. 밤일은 찰나의 순간만 졸아도 심각한 부상을 당하거나 때에 따라 목숨도 잃을 수 있기에 극도의 긴장 속에서 수면욕과 싸우며 수행해야 하는, 휴식 시간까지 작업을 해야 하는 고강도의 노동이다.

    마르크스도 이미 <자본론>에서 이것이 간장병과 폐렴을 비롯한 여러 병을 일으킴을 지적하였으며, 의사와 과학자들은 이것이 노동자의 24시간 생체주기의 파괴를 통하여 암, 뇌심혈관계질환, 수면장애, 위장질환, 간장질환, 당뇨, 교대부적응증후군, 정신질환 등을 유발하는 발암물질 내지 독소임을 지적한다. 유성기업의 노동자들이 이에 맞서 투쟁하였고 자본-국가는 이 노동자들을 연행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기에 ‘전쟁 같은 밤일’이란 표현이 과장이 아니다. 더구나 시적 화자는 이 일을 밤참도 없이 빈 속에 행하였다. 긴장감에서 벗어난 육체는 비로소 위장이 비었음을 알리고 노동자는 밥 대신 차가운 소주를 들이붓는다. 그도 안다. 이 소주가 망가진 위장에 독이 됨을. 그런 줄 알면서도 소주를 붓는 이유는 한국 자본주의의 모순 때문이다.

    이 시에서 현실은, 짬밥을 먹고 전쟁 같은 밤일,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고혈을 짜내어 치러야 하는, 그리 하면서도 과도하게 착취당하여 임금이라고는 겨우 내일의 노동을 유지할 정도로 주어지고 생산은 물론 노동과정과 다른 인간다운 삶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그러면서도 국가와 자본의 유착으로 인하여 최소한의 저항마저 철저히 봉쇄당하여 이미 병든 몸이 곧 스러져갈 것을 알면서도 쓰린 소주 한 잔으로 새벽의 허기와 분노를 달래야 하는 군부 독재 시대의 노동자의 삶이다.

    이 시엔 노동자가 억압당하고 착취당한 데서 오는 고통을 잘 묘사하고 있다. 한 개인의 고통에 머물지 않고 한 개인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사회 전체에 대해서도 고개를 돌린다.

    그리하여 한 노동자의 삶은 그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전체 노동자의 삶에 대한 인식으로 옮겨가고 이 인식은 곧 부조리한 사회체제에 대한 분노와 저항으로 이어진다. 한 인간의 비극과 부조리한 세계에서 빚어진 극도의 고통 속에서 시인은 희망의 빛을 발견한다. 노동자의 사랑과 정당한 분노, 희망을 바탕으로 한 단결이 있다면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햇새벽이 열리는 것이다.

    여기서 소주의 위상은 두 차례 전이한다.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진통제들이 고통의 예방 시스템으로 작동한 것처럼, 처음에 노동자가 몸이 상할 것을 알면서도 밥 대신 소주를 마신 것은 전쟁 같은 밤일의 고통을 달래주려 마신 것이다.

    그러나 자본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은 노동자의 몸은 이를 통해 세계의 부조리를 인식한다. 이 인식은 분노와 저항으로 승화된다. 술잔을 돌리면서 자연스레 노동자들의 사랑을 바탕으로 동지애가 싹트고 이는 연대를 형성한다. 사랑과 단결을 바탕으로 한 연대를 만들자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햇새벽-에 대한 희망이 솟아오른다.

    진통제의 소주는 노동하는 현실의 맥락 속에서 저항의 소주로, 술잔을 돌리는 동지애를 통하여 연대와 희망의 소주로 변모하는 것이다.

    집회 현장에서 늘 외치듯 연대가 희망이다. 하지만, 진정 물어야 할 것은 “왜 연대가 되지 않는가?”이다. 대중들이 신자유주의의 탐욕과 경쟁을 내면화하였다. 해고와 생존 위기의 공포 속에 권위에 복종하고 있다. 도그마와 종파로 갈린 채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 승리한 기억도 사라졌다. 몇몇 노동자는 목숨을 걸고 투쟁하였지만, 그것이 다른 사업장이나 연대운동으로 확산되지 못한 채 고립되었다.

    도그마와 종파 모두 허상일 뿐, 실상을 직시하고 이 모순에 대한 인식을 철저히 하고 계급의식과 역사의식, 사회의식, 공감을 가진 주체가 되어 신자유주의의 탐욕과 공포를 극복하고 굳건하게 연대하여야 할 때다.

    반신자유주의의 전선을 확고히 형성하고 자본-국가의 카르텔에 균열이 날 때까지 담대하게, 신명이 나게 행하는 투쟁이 노동의 새벽을 여는 길이리라.

    필자소개
    한양대 교수. 국문학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