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전히 유효한 질문
    '당신들, 안녕들 하신가요'
    [책소개] 『안녕들하십니까』(안녕하지 못한 사람들/ 오월의 봄)
        2014년 03월 22일 10:3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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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사회를 뒤흔든 대자보들

    2013년 12월 10일, 철도 민영화에 반대한 철도 파업과 뒤이은 노동자들의 대량 직위해제 이후 고려대학교에 안녕을 묻는 대자보가 붙었다. 다음날 그 옆 자리에 40여 장의 화답 대자보가 붙었다.

    대자보는 곧 전국 각지의 대학으로 퍼져나갔고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되었다. 10일 만에 페이스북 ‘안녕들 하십니까’ 페이지에 25만 명이 모여들었다.

    대학교수, 외국 유학생에 이어 고등학생에서 초등학생까지, 다산 콜센터 직원과 대공장 노동자, 전업주부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대자보를 붙이기 시작했다. 성노동자와 성소수자, 그리고 이른바 ‘김치녀’ 대자보는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해가 바뀌면서 ‘안녕’ 대자보 열풍은 잦아들었지만 오히려 서로의 안녕을 묻게끔 했던 불안과 우울, 무기력과 좌절은 더 무겁게 한국 사회를 짓누르는 듯하다. 그러므로 ‘안녕하지 못한 현실에서 당신은 과연 안녕한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유의미하다.

    무엇보다 ‘안녕’이란 말은 2013년 12월을 계기로 무심코 건네는 평범한 인사말에서 왜 내가, 그리고 우리가 안녕하지 못한지, 어떻게 해야 안녕할 수 있을지, 안녕을 위해 내가,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열쇠말이 되었다.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 열쇠말을 들고 대자보를 썼던 사람들을 찾아 나섰고 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안녕들 하십니까?》는 바로 2013년 12월부터 두 달간 곳곳에 나붙었던 대자보들 가운데 200여 장을 추려 묶음으로써 ‘안녕들 사건’을 증언하는 생생한 기록이자 사건을 일단락 짓는 매듭이다. 동시에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안녕들 대자보’ 이후 각자의 삶에서 어떠한 변화와 고민을 지속하고 있는지를 담아 ‘안녕들 사건’이 향후 어떤 방향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갈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책, 《안녕들 하십니까?》에 실려 있는 수백 장의 대자보는 단지 수백 명의 생각이 아니라 수천, 수만의 안녕치 못한 이들의 고백이며 각각의 자신들로부터 출발한 살아 있는 이야기들입니다. 사슬은 그것의 가장 약한 고리만큼만 강할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사슬의 가장 약한 고리는 우리가 느끼는 안녕치 못함이 나로부터 출발하여 사회와 공명한다는 것. 결코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과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 프롤로그 ‘안녕하지 못함에 안녕을 고하며’ 중에서

    안녕-책

    대자보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인터넷과 SNS의 시대에 낡은 형식이라고 여겨지던 손글씨 대자보 한 장이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끌어냈을까? 무엇이 그들의 손과 마음을 움직였을까?

    1980~90년대 운동권의 전유물이었던 이전의 대자보들과는 달리 이번 ‘안녕들 대자보’는 ‘나는 안녕하지 못한데 당신은 안녕한가?’라며 말을 걸고 있다. 그 말 걸기에 화답하면서 스스로의 안녕치 못함이 ‘사회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서로 확인하게 되었다.

    물론 ‘안녕들 대자보’의 확산에 인터넷과 SNS가 커다란 역할을 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손글씨로 대자보를 쓰고 붙이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익명이든 실명이든) 자신의 생활공간, 일터, 배움터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발신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수신하며 서로 공감했다.

    그리고 공감을 넘어 고려대에서 서울역까지의 나들이, 성토대회, 대자보 백일장, 12.28 총파업 집회 등 ‘자기 정치’에서 비롯된 사회운동을 만들어갔다는 점에서 이는 분명 주목해야 할 ‘사건’임에 틀림없다.

    “조금 더 나은 방향을 찾아보는 노력이야말로 ‘자기 정치’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사회에서 정치란 직업 정치인의 전유물이 될 수 없고, 누가 완전히 대신해줄 수도 없습니다. 사람이 건강하기 위해서는 운동을 해야 하듯이 건강한 민주사회를 위해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 – 프롤로그 ‘안녕하지 못함에 안녕을 고하며’ 중에서

    물음에 맨 먼저 화답한 이들은 동료 대학생들이었다. 사상 최장기간의 철도 파업 속에 연일 직위해제 노동자들의 숫자는 늘어만 갔고 그에 따라 철도 노조에 대한 지지와 연대의 목소리도 높아져갔다.

    한편으로는 학점과 스팩 관리 때문에 ‘안녕하지 못한데 안녕한 척 하며’ 또는 ‘자신만은 안녕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정치적으로 무관심했다는 반성과 성찰의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재벌기업 재단의 구조조정이 문제가 되었던 성균관대와 중앙대에서는 학생회 선거에서 대학본부의 개입 논란, 학내 언론의 탄압, 경쟁력이 없다는 이유로 통폐합되는 학과 등 훼손된 대학 내 민주주의의 문제가 거론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 흐름은 대학 청소 노동자들과 시간강사들의 싸움에 대한 연대로 모아졌다.

    안녕치 못한 사람들, 그리고
    안녕치 못하다고 말할 수조차 없는 사람들

    대자보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점점 다양해져갔다. 송전탑 반대 운동을 하는 밀양 주민, 파주출판단지로 가는 버스 정류장에 대자보를 붙인 출판 노동자, 안녕치 못한 사회에서 안녕함만을 보도하는 공영 언론의 문제를 지적하는 언론인, 삼성전자 서비스센터 직원, 노무사…….

    이들의 ‘자기 정치’와 운동은 진지하고 솔직한 자기반성과 성찰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을 안녕치 못하게 하는 것들에 대한 풍자와 조롱, 해학으로 ‘대자보 놀이’ 문화를 만들어내며 더욱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나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12월 18일 페이스북에 “저는 성매매를 하는 여성입니다”라고 시작하는 대자보가 올라왔다. “성매매를 하러 온 구매자 남성이 자신도 자보를 썼다며 자랑스럽게” 이야기했고 거기에 “호응하지 않았다고 주먹질을 당해야” 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대자보는 “나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며 끝맺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말대로 ‘누구나 말할 수 있어야 한다’며 지지했지만 또한 많은 사람들이 성노동자가 ‘안녕’에 동참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심각한 혐오발언도 등장했고 심지어 ‘안녕’ 대자보를 폄훼하기 위해 조작된 대자보라는 음모론까지 나왔다.

    성소수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성소수자의 대자보를 한 연예인이 SNS의 프로필 사진으로 삼자 일베 커뮤니티가 그 연예인을 표적 공격했다. 그럼에도 다양한 성정체성만큼이나 서로 다른 성적 소수자들과 그들의 지인, 부모가 쓴 대자보들이 잇달았다.

    삐딱하게 다시 묻기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질문은 정말 모두를 향한 것인가

    대표적인 여성비하 표현인 ‘김치녀’ 대자보도 등장했다. “당신은 학벌과 임금이 남성보다 낮거나 혹은 높거나, 연애상대로써 외국인을 선호하거나, 섹스 경험이 많거나, 연애하면서 섹스를 해주지 않았거나, 이상형이 키 큰 남자이거나, 여러 남자와 친하건, 여대에 다니거나, 내숭을 떨었거나 떨지 않았거나, 성형을 하고 예쁘거나, 성형을 안 하고 못생겼거나 등등의 이유로 인해 김장당한 김치”라는 일침에 많은 ‘김치들의 안녕을 묻는 대자보’가 화답했고 많은 이들의 대자보에 찬반 의견이 달리고 악성 댓글과 같은 혐오발언, 나아가서는 대자보를 훼손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청소년들의 대자보는 더욱 심각했다. 한 고등학교 학생이 학내에 붙이자 교장이 경찰에 신고한 사건은 상징적이다. “보름 남짓한 기간 동안 ‘청소년 안녕들 하십니까?’ 페이지에 올라온 대자보의 수는 115장”이었으며 그 외 산발적으로 인터넷 등에 올라온 대자보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훨씬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 실린 대자보는 단 15장뿐이다. 그것도 몇 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익명이다. “미성년자는 법적으로 계약의 동등한 주체가 아니다. 심지어 자신이 생각하고, 직접 손으로 쓴 대자보라 할지라도 법정대리인인 부모의 동의 없이는 아무런 공적 처분이 불가능하다”는 한 청소년 대자보의 내용(‘그 많던 청소년의 대자보는 다 어디로 갔을까?’)처럼 청소년은, 더불어 많은 소수자들은 아직도 발언의 기회, 공간, 자격조차 획득하지 못한 채 배제되는 현실을 다시금 뼈아프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책 마지막에 실린 대자보의 끝맺음은 사뭇 삐딱하다. 혹시 이 삐딱함이 ‘안녕들 사건’의 제 2편을 예고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안녕들 하냐는 질문에 대해 제가 삐딱하게 되묻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안녕들 하냐고 묻는 그 질문은, 정말 모두에게 묻는 것입니까? 모두가 물을 수 있는 것입니까? 정말로 괜찮은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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