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옥윤 패티김의 사랑과 이별
    [산하의 가전사]1995년 3월 17일 길옥윤 떠나다
        2014년 03월 20일 02:3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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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김형민님의 동의를 얻어 자신의 페이스북과 블로그에 올리는 ‘산하의 가전사’(가끔 하는 전쟁이야기 사랑이야기) 글을 레디앙에도 부정기적으로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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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3월 17일 작곡가 길옥윤이 죽었다. 우리 세대보다는 두어 템포 앞선 시대에 전성기를 누린 사람이지만 그의 노래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지.

    그 장례식에서 장례위원회는 그의 전 아내 패티김에게 <‘이별>을 불러 달라고 했다.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 때로는 보고파 지겠지 둥근 달을 쳐다보면은 그날 밤 그 언약을 생각하면서 지난 날을 후회할 거야…..”

    그 부부가 헤어지기 직전 길옥윤이 만들었던 노래. 하지만 패티김은 그 노래를 끝까지 부를 자신이 없다고 거절했지. 그리고 장례식에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노래를 불렀어. <서울의 찬가>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 여기까지는 노래의 음색이 살았겠지만 그 다음 가사에서 그랬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리워라 내 사랑아 내 곁을 떠나지 마오.”

    길옥윤은 약산 진달래꽃으로 유명한 고장 평북 영변이 고향이야. 이후 평양고보를 나와서 서울대 치과대학에 다닐 만큼 머리도 좋은 청년이었지.

    어느 날 그는 길을 가다가 어느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혼을 빼앗기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세이렌에 홀린 뱃사람처럼 그는 건물 5층으로 달려간다.

    세이렌의 정체는 미군 24사단 장교클럽이었어. 음악에 넋이 나간 이 치대생은 미국인 밴드마스터를 붙들고 늘어져. “이 음악을 가르쳐 주십시오.” 별안간 뛰어든 한국인 청년에게 놀랐겠지만 악단 단장은 그에게 악보를 준다. 재즈였다. 그는 “한 번 매혹당한 뒤엔 자나깨나 그 음악 뿐”이었다지.

    사람의 팔자란 그런 거 같다. 결국 뭔가 할 사람은 뭔가 하게 마련이야. 막는다고 되지도 않고 거부한다고 이뤄지지도 않고 어떤 기회로든 그 길을 잡게 된다는 거지. 그때 미군 장교 클럽이 아니었더라도 길옥윤 정도의 음악적 재능을 가진 사람은 언젠가는 발휘됐을 거야. 재능에 더하여 독기에 가까운 끈기까지.

    언론인 오효진씨와의 인터뷰에서 드러나는 그의 모습 하나.

    “주역이 되려면 아무래도 색소폰을 해야겠다 싶어 선배 몰래 그걸 불면서 선배가 병 나기만 기다렸죠. 그러다가 마침 그 선배가 병이 나서 절절매길래 내가 나서서 색소폰을 불었죠. 그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색소폰을 불고 있죠.”

    저 끈기와 재능으로 그가 대성을 못했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겠지. 예를 하나만 더 들어 줄까. 일본에서 생활할 때 그는 일본인 음악 지망생 하나를 만나. 그에게 이런 얘기를 해 주지. “나는 인생을 얇은 종이를 한 장 한 장 겹치는 거라고 생각하네. 그 한 장 한 장 몇 년이고 겹쳐 쌓은 두께는 아무도 흉내낼 수가 없게 되네.” 이런 재능과 끈기를 가진 사람이 대성하지 않으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겠지.

    그가 운명의 상대 패티김을 만난 건 1958년 일본에서였어. 풋내기 가수였던 그녀의 예명은 ‘패티김’이 아니라 ‘린다김’이었어.(공군참모총장과 사랑을 나누던 로비스트 그 여자 아니다)

    첫 만남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던가 봐. 선배한테 먼저 인사도 하지 않고 서슴없이 다리를 꼬고 앉던 맹랑한 아가씨였으니까. 나이 일흔이 넘도록 대중이 있는 곳에는 함부로 가지 않으며 ‘스타는 좀 오만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라고 얘기하는 할머니 디바는 젊은 시절에도 그렇게 도도무쌍했었나 봐.

    둘은 가수와 작곡가로서 사무적으로만 만남을 가지다가 1965년 몸 담던 클럽이 망한 뒤 길옥윤이 귀국을 택하고 어머니의 병으로 패티김도 한국 땅을 밟은 다음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하지.

    패티김과 길옥윤 부부 TV동반출연

    패티김과 길옥윤 부부 TV동반출연(출처 www.pattikim.co.kr)

    패티김은 아마 역사상 가장 로맨틱한 프로포즈를 받은 사람일 거야. 봄비 보슬보슬 내리던 어느 날 밤 호텔 방의 패티김은 뜻밖의 전화를 받는다. 그녀는 4월이 오면 다시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었지. 길옥윤은 전화에 대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

    “눈을 감으면 보이는 얼굴/ 잠이 들면은 꿈속의 사랑 / 사월이 가면 떠나갈 사람 / 오월이 오면 울어야 할 사람/ 사랑이라면 너무 무정해 / 사랑한다면 가지를 마라 / 날이 갈수록 깊이 정들고 /헤어지면은 애절도 해라.”

    물론 아무나 이런다고 될 일은 아니지. 길옥윤은 작곡가이자 색스폰 주자이기 이전에 가수이기도 했다는 게 중요하다. 패티김은 여기에 넘어가고 만다. 그러나 패티김은 답답했을 거야. “사랑한다면 가지를 마라.”면서 결혼하자는 얘기는 죽어도 안하는 이 현란한 드리블의 골 못넣는 남자. 결국 청혼은 패티김이 했단다. (그런데 검색하다 나온 옛날 잡지에는 길옥윤이 “이렇게 자주 만나느니 같이 삽시다.”고 했다고 하는데 아닌 것 같아)

    둘은 김종필 주례로 결혼을 했고 이때 단 두 곡, <4월이 가기 전에>와 <사랑의 세레나데> 만 담긴 앨범을 기념품으로 나눠 줘.(이거 누가 가지고 있으면 비쌀 듯) 신혼여행은 월남 파병 한국군 위문 공연으로 대신한다.

    둘의 만남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신혼 여행이었지만 이 신혼 부부는 극히 위험한 지역까지 가서 듣도보도 못한 월남 땅 정글 속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청춘들에게 ‘타향살이’를 불러 주었다. 얼마전 월남 주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이 죽었을 때 패티김이 조가를 부른 것도 이런 이유겠지.

    더할 나위 없는 가수와 당대의 작곡가의 결합은 예쁜 딸을 비롯해서 수많은 아름다운 곡들을 세상에 내놓았지만 그 노래들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준 것에 비해서는 둘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어.

    여기서 이남기 전 SBS 사장님의 말을 빌려 와 보자. “영혼을 고갈시키는 창작 활동과 혼신의 열정을 기울여야 하는 연주 생활, 길옥윤씨는 어쩔 수 없이 순간적인 쾌락에 탐닉하게 됐고, 구도자같은 절제로 자기 관리를 하는 패티김은 그런 흐트러진 모습을 용납할 수 없었다.”

    둘은 불이되 서로 다른 불이었던 것 같아. 패티김이 꾹꾹 눌렀다가 때가 되면 자신의 혼을 담아 터뜨리는 화산같은 불이었다면 길옥윤은 어디로 튈지 모르고 어느 들과 산을 불태울지 알 수 없는 기름 묻은 관솔불이었다고나 할까.

    불들은 자주 격렬하게 부딪쳤고 그들 사이의 뜨거웠던 사랑마저 하얗게 태워 버린 뒤 그 재 위에서 무척이나 쿨하게 헤어진다.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지노라.” 두고두고 잊을만하면 누군가의 입에서 반복되는 최무룡 김지미 커플의 명언이 새삼 회자된 것도 그때였지. 그 즈음 만들어진 노래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다고 치는 노래 <이별>이지.

    1995년 내가 입사했을 때 최초로 투입됐던 일거리는 바로 길옥윤의 다큐드라마였어. 길옥윤이 세상을 뜬 후 그 마지막 모습과 인터뷰를 담은 영상 편집의 시다바리가 방송 입문 사흘 뒤 맡은 일거리였지. 편집하는 거 보면서 꾸벅꾸벅 졸면서도 그 전 해에 있었던 길옥윤의 이별 콘서트의 몇몇 장면은 그 후로도 지금까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네.

    암 투병 와중에 이미 휠체어 신세였던 길옥윤 앞에서 패티김이 눈물을 참으면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 그리고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눈빛으로 옛 아내를 쳐다보던 길옥윤.

    패티김은 콘서트장에서 그렇게 물었다는군. “<4월이 가면> 그게 프로포즈였나요? 지금도 궁금합니다.” 뭐였을까? 절정의 가수, 세상 그 누구도 굽어보면 봤지 올려다보는 사람 없었을 톱스타로서 프로포즈 한 번 받지 못한 자존심? 그냥 프로포즈 받지 못한 여자의 아쉬움?

    그때 길옥윤의 대답은 실로 명답이었다. “우리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알차고 기름진 시간을 함께 했습니다. 헤어진 것은 몸이지 마음이 아니었어요.” 그 후 선배가 편집하던 영상에서는 <이별>이 흘렀다. “산을 넘고 멀리멀리 헤어졌건만 바다 건너 두 마음은 떨어졌지만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 냉정한 사람이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거야.” 그리고 다음 해 길옥윤은 산을 넘고 바다 건너 멀리 멀리 사라져 갔다.

    부부 싸움을 한 뒤에도 화해하는 방식이 “미안해”가 아니라 끄적끄적 악보를 그려서 내밀었던 천상 음악가였다는 길옥윤. 이별 콘서트 때 패티김이 “그때 프로포즈한 거 맞아요?”라고 캐물을 때 그는 이미 다른 가수의 목소리를 빌려 그 대답을 했는지도 모르지.

    혜은이의 목소리로 말이야. “당신은 모르실 거야. 얼마나 사랑했는지 /세월이 흘러가면은 그때서 뉘우칠거야 / 두 눈에 넘쳐 흐르는 뜨거운 나의 눈물로/ 당신의 아픈 마음을 깨끗이 씻어드릴께/ 음~ 당신은 모르실거야 얼마나 사모했는지/ 뒤돌아 봐 주세요 당신의 사랑은 나요.”

    필자소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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