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좌파는
    사극 <정도전>에 주목해야
        2014년 03월 18일 11:0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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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사극 <정도전>이 한창 인기다. 조재현, 유동근, 서인석은 물론, “어록”까지 유행시키며 연기력의 절정을 보여주는 박영규의 주옥같은 명연기와 명대사들은 물론, 스피디한 전개와 구성으로 이 드라마는 동시간대에 진행되는 <개그콘서트>의 시청률을 넘어섰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의 공세가 국가주의 보수 이데올로기와 결합된 한국 사회의 지배체제 하에서 사극 <정도전>을 진보좌파가 주목해야 할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이 드라마는 정통사극의 형식을 빌린 정치혁명의 서사이며, 제작진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기득권층의 지배방식을 고려말 권문세가의 지배에 대입함으로써 결국 역사 속에서 현재를 반추하게 만드는데 성공하고 있다. 이 드라마에서 고려말을 배경으로 그려지는 현재 한국 사회의 모습을 몇 가지 적어보겠다.

    정도전

    무상복지 논란

    도성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중 아사자가 속출하고 게다가 나라 곳간마저 비어버린 상황에서, 이제 막 도당(의회)에 입성한 이성계는 귀족들과 부유층의 쌀을 거두어 백성들에게 나눠주자고 주장한다.

    이인임은 이에 반대하며, 무상으로 쌀을 나눠줄 경우 백성들이 먹을 것을 찾아 노동을 하지 않고 위에서 내려오는 시혜에만 의존하게 될 것이며, 그럴 경우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과도한 복지는 노동 유인을 감소시키며, 이것이 국가 경제 성장을 저해할 것이라는… 우파들의 논리와 너무나 닮아 있다.

    ‘조반 역모사건’의 음모

    이인임의 측근인 염홍방에 의해 강제로 땅을 빼앗긴 조반이 염홍방의 노비들을 죽이고 국왕에게 모든 사실을 고하려 하자, 이인임은 이 사건이 자칫 귀족들 전체의 부패 스캔들로 확산될 것을 우려한다.

    이 사건의 확산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이인임이 택하는 길은 조반이 “역모”를 일으켰다고 날조하는 것. 그러면서 측근들에게 재상은 필요할 때면 “한없이 잔인해지라”고 요구한다. 그 어떤 세력도 함부로 그에 대해 발설하기를 두려워하며, 진실 여부를 막론하고 죄가 성립되는 것은 과거에는 역모였으며, 오늘날은 “내란음모”인 것이다.

    이인임의 조반 역모 조작은 김기춘이 주도하는 청와대 공안팀이 벌인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을 연상시킨다.

    중병과 사면

    이 일을 계기로 최영과 이성계가 군사를 일으켜 권문세가 일당을 진압하자, 수세에 몰린 이인임은 꾀병을 부려 동정 여론을 확산시키고, 이를 틈타 국왕이 자신에 대해 정치적 사면을 내려달라고 청한다. 국왕은 이인임을 사면할 것이라 발표하지만 개혁 세력인 사대부는 반발한다.

    결국 이렇듯 중병에 걸린 행세를 하며 동정 여론을 유도해서 집권자로부터 사면을 얻어내는 수법은 오늘날 재벌 총수들이 수천억을 횡령하고 회계를 조작하는 등 범죄를 저질러 놓고도 구속 당하는 즉시 병자 코스프레를 하고, 결국 대통령의 사면으로 복권되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논리와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기득권 세력과 맹목적 애국주의의 결합

    이 드라마에서 가장 탁월한 지점은 부정부패에 찌든 기득권층,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청렴하게 살며 국가에 충성하며 사는 애국주의 세력이 어떻게 궁극적으로는 서로 유착하게 되는가를 설득력 있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흔히 기득권 세력의 부패를 목도하고나면, 나라의 안보를 지키는 청렴한 군인 세력이 나타나 부패한 기득권층을 척결하고, 강하고 질서 있는 사회를 만들어주기를 희망한다. 박정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박정희에 대해 가진 이미지도 아마 이러한 것일 것이다.

    이 드라마는 그러나 기득권층(권문세가)을 대변하는 이인임 세력과, 그의 정적인 청렴한 애국주의 세력 최영이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이익을 ‘백성’의 이익 앞에 세움으로써 서로 동일한 이해관계를 맺게 되고, ‘백성’을 내세워 사회를 개혁 또는 변혁하려는 집단(여말에는 사대부)과 어떻게 충돌을 빚는지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정도전이 구상하는 ‘국가에 대한 반역’은 ‘백성’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국가’를 우선시하는 입장과 ‘백성(인민)’을 우선시하는 입장 사이에는 근본적인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 충돌의 메커니즘을 이 드라마는 어떠한 정치학 이론서보다도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 조선이 고려보다 진보한 사회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가 있다. 조선이 고려에 비해 풍요롭고 강한 국가였던 것은 맞지만, 성리학이 가진 근본적인 보수주의 때문에 고려에 비해 조선은 여성의 권리와 사회적 풍습 등에 있어서 거의 반동에 가까울만큼 퇴보한 것 역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백성의 고통은 국가에 대한 반역, 즉 혁명의 명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드라마는 정도전이란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생각보다 급진적인 정치적 시선인 셈이다. 진보좌파가 이 드라마에 주목해야 할 이유로 이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거기에 배우들의 전율이 느껴질 정도의 명 연기와 탄탄한 연출, 구성 능력이 곁들여져 극적인 재미까지 더해졌으니, 누가 이 드라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필자소개
    독일 훔볼트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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