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파가 아무리 동네북이라지만
    쓴소리, 수용할 것과 수용할 수 없는 것들
        2014년 03월 16일 03:0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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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프레시안의 강양구 기자가 서평의 형식을 빌어 한국 좌파에 대한 나름의 비판과 고언을 담은 글을 올렸다.(관련 글 링크) 이 글에 대해 남종석씨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강 기자의 글에 대한 소회를 적었다. 격렬한 비판적 반박이면서 또 한 측면에서는 강 기자의 글을 수용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한국의 좌파에 대한 고민의 일각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남종석씨의 동의를 얻어 페이스북 글을 레디앙에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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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3월 13일자 [프레시안]에는 강양구 기자의 장석준 동지의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에 대한 서평이 올라와 있다. ‘동료를 잃은 한국 좌파에게 바치는 쓴소리’라는 제목의 글이다.

    그는 원래 2008년 이후 세계 좌파 정당의 지형을 살펴볼 공산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최근 연이은 좌파 정치인, 활동가들의 자살을 보면서, ‘한국 좌파가 왜 이 지경이 되었나?’ 라는 다소 도발적인 문제제기로 책에 대한 서평을 대신하고자 한다고 하면서 현재 한국 좌파에 대한 그의 단상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위 기사는 서평이라기보다는 한국 좌파의 실패에 대한 [프레시안]류의 비판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그가 지적하는 한국 좌파의 실패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한국 좌파 소위 PD(민중민주계열)은 분단체제를 적극적으로 사고하지 못했다는 점. 즉 민족주의 진보진영과 함께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분단체제의 의미를 가장 예리하게 포착한 정치인은 고 김대중 대통령이었다는 것도 덧붙인다.

    둘째, 좌파는 개방성과 연대의식이 매우 약하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녹색당과 노동당은 왜 통합하지 못하는가를 그 예로 꼽고 있다.

    셋째 한국 좌파는 협동조합과 같은 공동체주의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역사회에서 뿌리를 내리고 10년이고, 20년이고 자기 공간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2.

    좌파들이 분단체제론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것은 좌파의 실패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분단체제론을 주장한 이들이, 과거에는 비판적 지지론자들이었고, 지난 대선에서는 ‘2013년 체제 어쩌구’ 하면서 민주당으로 결집하자고 주장한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이들은 남한의 정치 상황을 분단으로 환원하고 이를 절대시함으로써,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남한 내에서의 계급 갈등, 노동 배제적 정책에 대해서는 침묵했으며, 심지어 노동자들의 생존권적 투쟁을 노조이기주의로 몰고 갔던 기회주의자들이었다.

    분단체제론자들이야말로, 한반도에서 진보좌파를 상대화시키고 보수야당과 같은 중도우파에게 진보의 힘을 밀어주어야 한다고 떠들던 자들이다. 그들은 운동진영에서 성장한 많은 활동가들이 보수야당으로 들어가는 것을 정당화 했고, 빅텐트를 만들어야만 진보적 실천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더불어 그들은 야당 집권 시기 다양한 위원회, 기구, 정부출연 기관에서 학자로서, 활동가로서 나름의 기득권을 향유했던 집단이기도 하다.

    ‘주체 근본주의자들’ 역시 분단을 절대시하는 점에서 분단체제론자들과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주체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미 제국주의와 이에 저항하는 민족으로 환원하고 분단을 절대시 했다. 주체근본주의자들이 분단체제론자들과 다른 점은 남한의 야당이 아니라 북한 노동당을 충성의 대상으로 삼은 점일 뿐이다.

    주체 근본주의자들은 야당과의 연정을 꿈꾸다가도 때로는 ‘무장봉기’의 필요성을 토론한다는 점에서 좌우를 왔다갔다 한다. 이들은 한반도의 객관적 정세와 관련 없이 ‘좌익 맹동주의-우익 기회주의’를 함께 아우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분단’이 갖는 힘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한다. 주류 분단체제론자들이나 주체근본주의주의자들이 ‘분단’을 명분으로 역량을 빨아들여 한편에서는 민주당 후견부대를 만들고 다른 한편에서는 주체주의의 자양분을 만들고 있으면서, 결국 진보좌파의 성장을 사실상 가로막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좌파의 무능은 바로 여기에 있다. 분단체제론자들, 주체주의자들과 같은 근본주의자들이 ‘분단’이라는 명분으로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보좌파들은 냉정한 현실을 사고하지 못하고, 스스로 고립주의, 분파주의에 물들어 이들 세력에 대한 제대로 된 견재와 대안을 만들지 못했던 것이다. 아직도 “이념과 노선의 순수성에만 물든 좌파”들은 현실을 보지 못하고 각자 도생만을 하고 있는 것이다.

    3.

    강양구 기자의 두 번째 비판은 나름 타당하다. 좌파의 연대의식 부재는 고질적이다. 진보 좌파들은 차이를 강조하고, 자기 입장의 순수성을 옹호하는 데는 유별나게 장점을 지니고 있으며 정세의 객관성을 살피는 데는 아무런 능력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노동당 주류가 사민주의자들과 자신을 구별정립하려는 것, 소위 변혁적 좌파세력들이, 아무런 능력도 힘도 없으면서, 계급정당을 만들겠다는 것 등은 좌파의 고질적인 연대의식의 실패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좌파들의 고립주의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문제는 현재와 같이 진보운동 전체가 무너지고 많은 활동가들이 좌절하고 있음에도 이념과 노선에만 집착함으로써 아무런 대안도 없는 상황을 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좌파 진영의 큰 지분을 갖고 있는 노동당은 미래에 대한 아무런 대안도 없으면서 내부적으로 지리멸렬해지며 ‘서서 죽은 자’가 되어가고 있으며, 소위 변혁적 좌파라는 집단은 대중적인 정치적 언어가 무엇인지, 현 정세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 채 ‘좌경적인 발언’만으로 자신들의 가치를 입증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강양구 기자의 비판은 딱 여기까지만 맞는 말이다. 서평자가 예로 들고 있는, 녹생당과 노동당이 합치지 못하는 것은 노동당이 녹색주의를 반대하기 때문이 아니다. 녹색당의 다수 당원들(특히 평당원들) ‘비정치적인 환경운동’ 출신이라 그들이 좌파정당들과 어울리는 것을 그렇게 달갑지 않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정치에 대한 현실주의적 접근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노동당 주류는 누구보다도 녹색당과 연대하고, 심지어 통합하려 한다는 점이다. 서평자가 얼마나 상황파악을 제대로 못하는지는 이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4.

    셋째 비판도 좀 곤란한 비판이다. 서평자는 좌파가 공동체주의, 협동조합 운동과 같은 공동체주의 문화에 특히 둔감하다고 쓰고 있다. 그러면서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을 요구한다. 그러나 장석준 동지가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에서 쓰고 있는 ‘공동체주의’는 정확히 말해 자본주의의 재생산 체제로부터 독립된 공동체적 유대의 공간이다. 이것은 일종의 자율주의적인 공동체주의와 같은 것이다. 민중의 집 프로젝트가 이런 특징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나 자신도 협동조합운동을 반대하지 않는다. 생협과 같은 활동도 의미 있으며, 심지어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을 받는 협동조합도 나름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적 유대를 만드는 하나의 방식이지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에서 말하는 신자유주의적 저항의 진지로서의 기능을 본격적으로 담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협동조합은 현재의 ‘시장질서’를 그대로 유지하며, 운영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대안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체제가 유지되는 속에서 그에 적응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기업에서 고용되는 대신 자기고용을 하는 것이고, 협동조합을 매개로 사회적 상호작용을 하는 미시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끼리 협동조합 한다고 해서 신자유주의 질서가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착각이다. 오히려 협동조합 자체가 신자유주의 질서 속에서 살아남는 것이 더 큰 과제인 것이다.

    협동조합이 의미가 있다면 이런 현실적인 제약조건을 받아들이되 그 속에서 회원간 네트워크, 상호교류와 유대, 정치적 의식의 고양과 일상적 삶의 공유를 실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름 진보진영의 진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의 거시적 대안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좀 과장되었다고밖에 할 수 없다.

    서평자가 만약 좌파가 지역사회에 뿌리 내리지 못했다고 했다면 나는 그 비판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도 진보좌파의 무능이 우선적인 책임이겠지만, 서평자 스스로 추켜세우는 분단체제론자들과 같은 사이비 민주당 지지 세력이나 주체주의자들이 아니었다면 좀 더 나은 상태가 되었을지 모른다고 나는 변명아닌 변명을 하겠다. 우리가 무능하다는 비판은 수용하겠는데, 그렇다고 이 서평자가 쓰고 있는 방식으로 무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강양구 기자의 글은 서평은 고사하고 감상의 내용도 담고 있지 않다. 서평이든 감상이든 책에 관한 글이라면 대상이 되는 책의 내재적 의미를 다룰 수 있어야 한다. 텍스트의 분석 자체가 옳은가 그렇지 않은가를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런 내용은 없다.

    거기다가 저세상으로 떠난 박은지 부대표를 끌어들이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그녀의 안타까운 죽음을 상기시켜 좌파들로 하여금 각성을 일으키려는 것인가? 만약 그렇게 하고자 했다면 제대로 알고나 지적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좌파가 아무리 동네북이라지만 이런 주제넘은 비판까지 들어야 할 상황은 아닌 것이다. 이런 인상비평은 우리의 읽기에도, 좌파 정치의 발전에도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필자소개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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