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빚더미에 거덜난 집에 시집 가
    [이기순의 생애이야기] 약수동 산동네서 서울살이 시작
        2014년 03월 13일 02:1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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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순의 생애 이야기-3 링크

    그르케까지 허고 그 혼인을 깨지를 못허는 거제.

    그러구는 첨으루 선을 보고 혼인을 한 거여. 대전 사람이여, 고향에 비하면 도시 사람인 거제. 대전서 세 살던 외사촌 성이 주인집 아들을 중신을 슨 거여. 나는 첨부터 싫다고 혔어. 인물은 그냥 그른디, 머가 싫은지 그냥 싫드라구. 우리 집이서 선을 봤어. 그 짝은 시어무이 자리가 같이 왔었제. 부모님은 사람이 성실해 보인다고 좋다고 혔어. 목수 기술이 있었거든. 그르니 밥은 안굶기겄다구 생각을 하신거제. 더구나 외사촌 성이 속인다는 생각을 혔겄어?

    근디 알고도 속였던 거여~. 같은 집서 살매 사정도 다 알고 함서. 그려니 나는 시방도 친척 모이는 디서 그 성을 보면 아는 척을 안혀. 평생 웬수가 된 거제.

    집도 그냥 낭구로 찌름~허게 지은 허술한 집이여. 한 집이서 살면서 밥하기 싫응게, 노상 그 집 가서 밥을 먹음서, 농 삼아 내 얘기를 끄냈다가, 그게 중신으루까지 간 거여. 사촌동상인데 그럴 수가 있어? 시상에~. 장난삼아 꺼냈더라도 아니다 싶으면 얼른 둘러대고 막았어야지.

    속을 몰랐으니 엄마 아부지 뿐 아니라, 큰아부지네도 좋다고 허드라구. 그려도 나는 싫다매 미루고 있는 건데, 사주단자를 가지고 서방될 사람이 온 거여. 그라구 그날부터 폭설이 오기를 시작혔는디, 하~도 많이 와서 차가 다니지를 못한 거여. 그 해에 눈이 징그럽게 왔어.

    그르니 남자가 가지를 못허고 우리 집서 삼일 밤을 자게 되았어. 어무이는 신이 나려서 집 옆 법당에서 밤기도를 혀고, 나는 아랫방서 막내 여동생허고 자고, 아부지는 멀리 장사를 나가고 없었어. 근디 나를 덮친 거여. 저도 떨면서 덮친 건데, 나도 얼결에 당한 거제. 빼도 박도 못 허게는 됐다지만, 그르케 함도 오고 잠자리까정 혔는디도, 나는 절대로 안 허고 싶었어. 이상하게 무신 크다란 짐승 모냥 무섭구 징그럽게 느껴졌어.

    그르다가 그 집에 빚이 많다는 걸 알게 된 거여. 어무이가 그 짝 동네를 가서 곰을 파봤지, 뒤를 파봤다는 거여. 그 동네에 외사촌 성 말고도 일가들이 많이 있으니께, 그 사람들 통해서 알아본 거제. 근디 그~르케 빚이 많고, 시엄니 자리며 시동상 자리며 안좋다들 소문이 난 거여. 시엄니가 빚도 많고 성깔도 나쁘고, 시동상은 깡패로 패싸움질이나 헌다는 소리를 들은 거여.

    그르니 어무이도 그제사 파혼 작정을 헌거여. 그 남자헌티 당한 거를, 츰에는 안하다가 난중에 어무이헌티만 야그를 혔어. 그려도 어무니는 파혼할 생각을 한 거제.

    근디 파혼하자고 그 남자 집에 갔다가, 어무이가 실갱이 끝에 기절을 한 거여. 그 짝서는 파혼을 못 헌다고 버팅기제~. 그러니라고 선 보고 일 년 반을 끈 거여. 그 간에두 남자는 집엘 자주 왔어. 저는 같이 잘라고 혔지만, 나는 절대루 아니였제. 그르다가 별 수 읎이 날을 받아놓고, 그라구는 또 몇 번을 당했어. 아무리 싫어도 사주단자까지 받았구, 집에서 여러 날을 재우기도 하구 혔으니, 결혼을 안할 수가 읎는 거여, 그 때로는.

    걔다가 우리 아부지가 새각시처럼 얌전하고 양반소리 듣는 사람이잔여. 아부지 체면에, 그르케까지 허고 그 혼인을 깨지를 못허는 거제. 그르니 어무이도 어쩔 거여? 큰집에서 사위 양복 한 벌을 해주고, 미싱이니 농이니 혼수를 채려서 시집을 갔어. 재산도 늘었고 내가 삼분지 일을 만들다시피 했으니께, 혼수도 잘 혀갔지.

    내 손으로 옷을 다 지어서 시집을 갔어. 우리 집에 오래 전부터 미싱이 있어서, 동상들 옷이랑 살림에 필요한 것들을 다 내가 만들어서 입히구 쓰구 그럈었거든. 어무이가 옷감장사 헐 때는 짜뚜리 남은 것들도 받고, 옷감을 끊어달라고도 혀서, 웃옷두 맨들구 다우다 치마도 맨들었어. 속감까지 넣어서두 맨들구. 그려니 철마다 입을 치마 저고리도 내가 만들고 혀서 시집을 간 거제.

    결혼식은 정월에 머리 낭자하고 구식으로 혔어. 사진 한 장을 안박았어. 친정서도 모두들 실망들을 한 거제. 시집으로 가려면 버스 정류장까정 십리를 가서 버스를 타야 허는디, 가마도 안태우고 걸어 나와서 버스를 타고 간 거여. 서방이 차를 불러달라고 혔는디, 그걸 안 불러줬어. 여러 가지가 궤씸헌 거제.

    막내가 시방 쉰이니, 나랑 열여덜살 거의 스무살 차이잖여. 나를 어무이같이 알고 나도 그르케 키운 건데, 네 살짜리가 울고불고 난리를 쳤제. 나도 갸를 띠어놓고 강게 너무 서럽고 슬프고. 갸가 울면서 한참을 쫓아오고, 나는 들어가라고 말리고. 그르다가 개울에서 내가 넘어졌어. 그르니 치마가 개울물에 젖었잔여. 그 정월 추운 날, 젖은 치마를 그냥 그채로 입고 버스 정류장까정 십리를 걸어간 거여.

    혼수는 미리 보냈제. 옛날에는 시집갈 때 친정 쪽 어른이 같이 가잔여. 아부지가 안가고 큰아부지가 갔어. 그르케 시집을 가서는 폐백 올리고 산 거여. 서방헌티도 정이 읎었지만, 홀시엄니가 둘이 앉았는 꼴을 못보는 거여. 가자마자 아이가 들어선 거제. 결혼 전에 날 받고서 집이서도 혔고, 어디를 가다가 산에서도 한번 또 당혔었는디, 그 때도 아그는 안 생겼어. 내가 혼인을 자꾸 미룽게, 저도 불안허니께 자꾸 덥칠려고 헌 거여.

    그 집은 아들 셋 딸 둘이여. 누이 하나에 그 사람이 큰아들이구, 바로 아래가 나랑 한동갑인 시누, 그 아래로 아들 둘. 나 시집갈 때 누이는 결혼을 이미 혔었어. 큰 남동상이 머리가 비상혀서 잘만 풀렸으면 잘 됐을 거여. 암산을 잘 허고 일본까지 가서 상도 타고 그렸어.

    근디 그 좋은 머리를 헛 데로 쓴 거제. 그 아들 뒷바라지를 하니라고 집 돈을 많이 쓰고 빚도 쓰고 혔는디, 그 시동상이 깡패루 풀려간 거여. 허구헌 날 돈 훔쳐들고 나가고, 못된 짓 허면 돈으루 막고, 돈 떨어지면 기어들어오고. 고등핵교 다님서 깡패 생활을 함서두, 머리가 좋으니 선상도 짜르지를 못하는 거여. 깡패를 하다가도 난중에는 조흥은행까지 들어갔었제. 근디 그걸 제대로 안다닝게 짤린 거여. 시엄니랑 시동상들이랑 한테 살았어.

    나랑 남편이랑은 세 살 차이여. 혼인 일 년만인 정월 보름날 큰아들을 낳았제. 홀시엄니가 둘이 앉았는 꼴도 못 보더니만, 아이 슬 때 을매나 입덧이 심헌디, 머 하나 사다주는 것도 읎어. 아그가 서서 친정을 가는디, 길바닥에서 몇 번을 주저앉고 허며, 수도 읎이 쉬었다 갔어. 집에 들어가니 어무이가 내 꼬라지를 보고 놀래 자빠지는 거여. 빼싹 말른디다, 거지 꼴을 하고 온 거제.

    친정 와서야 과일이랑 골고루 사다줘서 먹고 항게, 입덧이 좀 가라앉은 거여. 신행 가서 한 이십일을 있다가 갔어. 그러구두 한참을 못먹고 하는데, 한번은 서방이 나만 데리고 어디를 가자고 혀서, 어딘지 물을 새도 읎이 따라 나갔어. 과일가게를 가더니 두고 먹으라고 자두 한 접을 사 주드라고. 근디 그 한 접을 과일가게 앉은 자리서 다 먹은 거여. 그 때 자두는 아주 작고 시었제. 그게 을~매나 맛있는지, 한 접 백 개를 앉은 자리서 다 먹은 거여. 과일 장사가 깜짝 놀래. 을매나 못 먹었으면 그걸 앉은 자리에서 다 먹었겄어?

    시엄니는 둘만 나갔다 왔다고, 난중까지 두고~ 두고 온갖 소리를 혔어, 지 아들 읎을 때만. 자두 먹은 거는 말을 안혔지. 아들 있는 데서는 잘 나갔다 왔다고 혔었거든. 이중성격인 거제. 그게 첨에 너무 이상혔어. 그런 사람을 겪어보지를 않았응게. 빵이 그르~케 먹구 싶었제. 나는 시집가기 전에는 가루 것을 아예 먹지를 안혔거든. 남의 결혼식을 가도 친척들이 “쟈는 국수 주지 말고 찬 밥 갖다 줘라” 그라고들 웃었어. 그렇게 입맛이 달라지드라고.

    서방은 츰엔 잘 혔어. 근디 시엄니가 그르~케 강짜를 부려. 서방 있을 때는 잘 혀다가 서방만 나가면 볶아대는 거여. 그르니 서방은 모르제. 내가 시엄니 그런 거를 좀 얘기를 하면, 나를 믿지를 않고 오히려 싫어혀더라구. 시엄니는 술을 그르~케 좋아할 수가 읎어. 그 냥반은 오십여섯엔가 혼차가 됐다드라구. 막내 시동상 일곱 살에 내가 시집을 간 거여. 그 시동상을 모욕을 씻기고 어무이처럼 키우다 시피 혔어. 서방은 돈 버는 거를 모두 시엄니를 갖다 줘. 그르니 나도 서방도 늘 돈이 읎는 거제. 시엄니도 멀 어쩌는지, 맨날 돈이 모자라고 빚내고 일수 쓰고 그렸어.

    그르다가 어느날 그 판잣집이랑 살림들이 빚쟁이들헌티 다 넘어갔어, 숟가락 몽뎅이 하나 못 건지고. 시집갈 때 해간 세간들도 모두 뺐겼어. 그라구는 나만 남기고 온 식구가 도망을 간 거여. 참, 기가 차서~. 난 아무 것도 모르다가, 어느 날 봉께 아그허구 나허구만 남았드라고. 서방도 온다 간다 말 한마디 읎이 여러 날을 안 와.

    그르니 혼인 초에는 나도 잘 해볼라는 마음이 있었는디, 그 일로 아예 서방이고 시에미구 정내미가 떨어져 버리드만. 빚쟁이들이야 나헌티만 난리를 치제. 그르니께 동네 사람들이 오히려 막아주더라고. 그 며느리도 속아서 혼인한 거라고. 첨에는 빚쟁이들이 안 믿고 난리지, 붙들고 늘어질 게 나밖에 읎으니.

    그라구 있는데 친정 어무이가 소식을 듣고 온 거여. 그랴서는 근처 사는 친정 쪽 사촌 언니네로 나를 빼돌렸다가, 친정 동네로 데리고 들어갔어. 아그하고 몸땡이만 나온 거여. 친정에 있으면 빚쟁이들이 글루 찾아올 거 아녀~. 그르니 어무이네도 오래 못있고, 청주 이모네로 가 있었제. 거그서 한 달을 있었어.

    1968년 약수동 산동네에서 찍은 신당동 모습(사진=Homer Williams)

    1968년 약수동 산동네에서 찍은 신당동 모습(사진=Homer Williams)

    약수동 산동네서 시작한 서울 생활 / 행상과 좌판

    난중에 서방이 친정으로 찾아왔는디, 어무이가 선뜻 안알려줬어. 그 어린 것을 그르케 빚쟁이들헌티 넘기고 갔으니 을매나 미웠겄어? 그르다가 하두 강짜를 부리니, 별수 읎이 알려줬제. 그러구는 어무이가 쌀 열가마니 값을 내서, 서울 약수동 산동네 이종오빠네 집이다 방 한칸을 얻어줬어.

    아부지는 염소장사 함서, 그 집서 하숙을 하고 있었제. 일부러 아부지 가차이다 둔 거여. 그 때 쌀 열가마니 값 방은 아주 엉망이었제. 쌀금이 쌌거든. 정지도 읎는 방이었제. 큰아이 두 살도 되기 전이여. 그르케 서울 생활이 시작된 거여.[1971년경]

    그 집이 방이 일곱 개가 있었는데, 아부지가 하나 쓰고 우리가 하나 쓰고, 다른 염소장사나 장사꾼들이 하숙이니 자취니를 혔어. 그 때부터 아부지 밥은 내가 맡은 거제. 아부지가 쌀도 팔아주고 반찬값도 대주고 헌 거여. 그르다가 아그를 업고 행상을 시작혔어. 시방 광주대단지 들어선 그 경기도 광주를 가서 빵을 뗘다가 팔기도 혀고. 천오백원이면 큰 다라이 하나 가득 수북허니 줘. 그걸 하나에 삼원씩 중부시장을 돌아다니면서 파는 거여.

    서방은 일을 찾지만 쌩판 모르는 서울서 일이 쉽게 안기나? 그니께 첨에는 일을 못혔지. 그르다가 둘째를 낳고는, 하나는 업고 하나는 걸리며 장사를 계속 혔어. 중부시장서 소라도 뗘다가 연탄불 놓구 삶아 팔았어. 종이봉지 뽀족혀니 해서 담아서.

    행상 하믄서 어무이 생각이 많이 났제. 울 엄니가 나 어렸을 때 이렇게 업고 댕김서 장사를 혔겄구나….하구. 서글프제~. 가난을 벗어날라구, 새끼들을 업고 걸리며 부부간에 장사를 해서 살림을 키워놨구, 나두 그르~케 열심히 살면서 살림을 불렸는데, 시집와서 모든 게 도로아미타불이 된 거 아녀? 한심하기도 허고, 아부지니 외가 성이니 원망시럽구~.

    한번은 빚쟁이가 으뜨케 알고 거그를 찾아 왔어. 와서 보니께 너무나 기가 막힌 거제. 아무 소리 않고 나가더니만, 그 길로 쌀 한 말을 팔아다 주면서, 아그들 밥해 먹이고 열심히 살라고 혀더라고. 그러고는 다시는 오덜 않았어. 고맙기도 혔지만, 오죽허면 빚 받으러 왔다가 보태주고 가나 싶어 더 기가 멕히더먼….

    서방은 일을 안 하니 술 담배가 더 많아지고, 애는 둘이나 되고. 그르니 돈 모투기가 너무 힘들었어. 멀리 돌아댕길 수가 읎어서, 약수동 집 근처서 파 마늘 배추 그런 거를, 행상허매 좌판허매 팔았지. 겨울게는 깻잎 절군 거를 어무이가 보내줘. 팔아서 반찬값이라도 혀라고, 일부러 절궜다가 아부지 편에 보내는 거제. 그걸 씻어서 양념해서 팔기도 허고.

    애들 큼서는 중부시장서 장사를 많이 혔지. 약수동 산동네가 중부시장이랑 안멀었거든. 큰 머스매를 이종오빠네다 맡기고 다니기도 혔어. 아부지 주변 사람들로 연결을 혀서 남편 일도 생기니, 이젠 돈 모트는 재미가 났제.

    그 때는 염소를 팔아서 잡아주면, ‘똥보’라고 해서 내장은 그냥 버렸어. 그걸 깨깟이 씻어서 양념해서 볶아내봉게, 하숙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르~케 좋아들 혀. 영양도 많잖여. 나도 안해봤지만 한번 해보니께 허겄드라구. 그르니 다른 염소장사들도 내장을 일부러 모아 와서, 같이들 해먹는 거여.

    이모가 근처 딸네집을 왔다가 그 이종오빠네도 왔었제. 그 부잣집 딸네 아들네들이 을매나 맛있는 거를 많이 해 드렸겄어? 근디 이모가 그 내장볶음을 너무너무 맛있게 잡순 거여. 세상에~, 읎는 집에 와서 드셔서 잊지를 못하는 건지 어쩐지…. 돌아가시기 전까지 나만 보면, 노상 그 얘기를 허셨어. 기순네서 먹은 염소 내장볶음이 너무나 맛있었다고.

    난중에 쌀 열가마니 값을 친정어무이헌티 갚았어, 어무이야 이자는 안받을라 혀지만, 나는 누구헌테고 계산은 분명혀. 동네서 오십만 원짜리 번호계도 부었어. <계속>

    필자소개
    1957년생 / 학생운동은 없이 결혼/출산 후 신앙적 고민 속에 1987년 천주교사회운동을 시작으로 “운동권”이 됨. 2000년부터 진보정치 활동을 하며 여성위원장, 성정치위원장 등을 거쳐, 공공노조에서 중고령여성노동자 조직활동. 현재 서울 마포에서의 지역 활동 준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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