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드어워즈에 대한 단상
    [기고] '무엇' 못지 않게 '어떻게'도 중요한 게 예술
        2014년 03월 13일 11:31 오전

    Print Friendly

    재작년이었다. 레드어워즈의 선언문 같은 글을 읽었다. 말하자면 좌파적 가치를 담은 작품에 금사발을 주겠다 이 말인데…. 고개가 갸웃거렸다. “원래 예술이 불온한 건데 거기에 굳이 빨강색까지 칠할 필요가 있나?”

    누가 쓴 글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선언문에서 읽힌 바로는 글쓴이가 예술의 지향성에 대해 어떤 당위를 전제한다는 인상이 짙었다.

    며칠 전 레디앙 지면에 뜬 이상엽 선생의 짧은 글(관련 링크)에서도 그는 마찬가지였다. 선생께서 다큐멘터리 사진을 오래도록 해오셨으니 몸담아온 분야에 대한 비평적 준거는 분명히 갖고 계실 터이며 그 역시 온당한 것이겠다. 하지만 그런 준거가 현재의 문화예술 제반에 대한 어떤 당위로 확장되는 듯 하는 인상을 풍긴다면 나는 그것을 반기기엔 망설여진다.

    먼저 여쭙고 싶다. 수전 손택이 세련된 교양인의 상품처럼 된 현실은 어떻게 설명하실지. 불쾌해지는 타인의 고통보다는 아름다운 사진, 현실을 오도하는 사진, 이미지, 텍스트가 난무하는 세상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불쾌해지는 타인의 고통, 불편한 진실을 알려주는 이미지와 텍스트가 눈앞에 온다 해서 과연 불편한 진실을 사람들이 받아들일 것인지, 나는 그 효과를 신뢰하기 어렵다.

    불편한 진실을 알리는 예술이 만일 대중의 직접적인 집단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하거나, 혹은 적어도 인식의 변화라도 끌어내지 못한다면, 내가 보기에 그런 예술에게 돌아가는 것은 자본의 잣대를 앞세운 대중의 희롱뿐이다. 그런 예술이 자본의 예배당에서 세례 받기를 원치는 않을 테니까. 만일 원하고 있었다면 나로선 무슨 형용사를 붙여야 할 지 요령부득이다.

    나는, 예술이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말의 의미가 요즘은 다소 강박적으로 사용된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물론 진실을 알려야 한다. 그것이 무슨 진실이건 작품은 작가의 진실을 담아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당위일 테다. 이미 역사가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진정성이 결여된 작품이 영구적으로 생명력을 유지한 일은 지금껏 없었다.

    그렇다면 정작 중요한 문제는, 예술이 진실을 “어떻게” 알리는지에 달린 것은 아닐까?

    이상엽 선생의 글 서두에서 나오는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을 나는 보지 않았다. 앞으로도 보지 않을 것이다. 첫째로 주연배우에 대한 불신이 크고, 둘째로 포스터의 이미지에서 ‘낭만적’이란 인상을 받았으며, 셋째로는 그 영화를 본다 해서 내 인식형태가 변할 것 같지 않아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또 하나의 약속”이란 영화를 어떤 식으로든 저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적인 취향으로, 나는 다큐멘터리가 아닌 다음에야 그렇게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을 피할 뿐이다.

    물론 다큐멘터리도 나름의 메타포를 구사한다. 하지만 “또 하나의 약속”이 다큐멘터리는 아니지 않은가. 진실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작품들을 피하는 건 불편한 진실보다도 내겐 메타포가 결여된 서사가 더욱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런 작품들보다는 온갖 비유법이 동원되어 작가의 진실이 은밀하게 인코딩Encoding된 작품을 나는 더 좋아한다.

    나아가 그런 취향을 넘어서 보더라도, 작가의 진실이 비밀스럽게 포장된 작품들이 비평적으로 더 좋은 작품이면서, 진실을 알리는 데도 더 효과적이라고도 나는 생각한다. 인식의 변화를 견인한다는 차원에서 말이다.

    1회 레드어워즈 수상자들 사진

    1회 레드어워즈 수상자들 사진

    지식의 전달이 인식의 변화를 낳을까?

    생각건대 인식의 변화가 지식의 전달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거기에 곧바로 “그래”라고 답할 수가 없다. 바로 우리나라에서 지금 일어나는 일들이 증거 아닌가? 자신을 사로잡은 이념적 틀거리에 갇혀 눈앞에 노란 것을 들이대도 녹색이라고 보는 것, 이것은 비단 오늘 우리 곁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날것의 사실을 전달한다고 해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 하기도 어려우나, 지식의 전달을 통해 인식의 변화를 희망하기도 어렵기는 매한가지일 것이다. 그럼 인식의 변화는 무엇으로 견인되는가?

    가령, 적대적 라이벌 관계를 주된 구도로 삼은 만화에 심취해서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과, 같은 시기에 호혜적 라이벌 관계를 중심 서사로 한 만화에 심취했었던 사람을 생각해 보자. 이럴 때 두 사람의 성장에 대한 인식이 다르리라는 것은 상식이다.

    전자는 상대를 짓밟고 파멸로 몰아붙임으로써 성장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 후자는 상대의 성장으로부터 자신의 성장을 위한 동력인을 얻음으로써 원하는 바에 도달할 것이라는 생각을 지녔다 말함직하다.

    또는, 군국주의적 바탕을 견고하게 지닌 만화에 심취하여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과, 탈정치적 성향이 짙게 배인 만화에 심취했던 사람을 생각해보자. 이들이 같은 사건에 대해 당연히 다른 반응을 보일 것이며 일상 생활에서의 태도와 세상을 향한 시각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면에서 다른 기준을 가질 수도 있다. 이런 것을 일컬어 우리는 ‘성향’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에 산재한 무수한 사실들을 자신의 진실로 엮어 판단하는 바탕을 만든다.

    두 가지 예를 들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거다 : 인식의 변화는 정서적 바탕의 변화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알아차리고, 그것으로 판단하는 등의 이성적 활동을 간과하거나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실을 보고 알아차리는 것 자체가 정서적 바탕의 변화 없이는 어렵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이성은 늘 정서의 바탕 위에서 작동해왔음을 주지해야 한다.

    이 지점이 예술에서 메타포가 중대한 전략으로 부상하는 곳이다. 직접적으로 들이대기보다 넌지시, 보지 않을 수 없는 곳에 슬쩍 던져놓는 것 : 진실의 샘플을 제시하기보다 진실에 다가서도록 유혹하는 것 : 이것이 인식의 변화를 견인하기 위해 예술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고자 하는 진실을 표면에 드러내는 것은 예술보다는 저널리즘의 방식이다. 저널리스트를 꿈꾸는 게 아니라면 자신의 진실은 되도록 작품 이면에 배치하는 편이 예술가로서는 더 나은 방안이 아닐까?

    이쯤 되어 한 가지 변명을 해야겠다. 보지 않은 영화들에 대해 단정적으로 “메타포가 없다”고 말하듯 한 점에 대해서다. 그것이 불편할 분들이 여럿일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또 하나의 약속”이라는 영화가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 영화 속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대부분 사실과 일치한다는 여러 이야기들로 미루어보건대, 내 생각에 이 영화는 감독이 사건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보여주는 작품이지 메타포의 전략을 취한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듯싶다.

    인식의 변화를 견인하는 방안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현대라는 사회의 시공간은 그 각각의 방안을 위한 기관이든 사람이든 너저분할 정도로 많은 곳이다. 굳이 예술가가 저널리즘의 영역에 침투해야 할 이유를 나는 찾지 못하겠다.

    침투한다고 잘못될 일은 당연히 아니다. 그런 형식의 예술도 오랜 시간 나름의 문법적 전통과 비평적 토양을 풍성하게 만들어왔고, 또 나름의 분명한 기능이 있다. 그러나 이는 예술의 한 형식일 뿐, 예술의 제 형식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상엽 선생의 며칠 전 글을 대한 뒤 레드어워즈에서 수상한 작품들의 면면을 찾아봤다. 그전에는 어떤 작품이 수상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실은 그 선언문에서 받은 인상 때문에 의도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기도 했다.

    두 차례에 걸친 수상작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대부분의 작품들은 “또 하나의 가족”과 유사하거나 혹은 르포르타쥬, 다큐멘터리 등으로 분류될 법한 것들이었음에 아쉬움이 남는다. 심사과정에서 이루어진 토의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는지는 알 수 없어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수상작들을 보건대 그 비평의 준거들이 예술 제반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기엔 어렵다고 생각한다.

    겨우 두 차례 열린 행사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섣부른 행동일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비판보다는 곡진히 바라는 점이라고 하는 편이 적절하겠다. 어차피 결과적으로야 비판이 될 테지만. 바라건대 나는 레드어워즈에서 더 다양한 분야의 작품이 심사대상에 올랐으면 좋겠다.

    은폐되거나 왜곡된 사실을 폭로하며 진실의 샘플을 알리고 좌파적 기치를 세우는 작품뿐만 아니라, 배꼽잡고 웃거나 눈물콧물 빼는 가운데 은밀하게 사람들의 가슴 속 눈금을 좌클릭 해주는 작품도 레드어워즈에서 다루어졌으면 한다.

    별 생각 없이 재미있게 보고 친구들과 수다 떨었던 작품이 레드어워즈의 수상작으로 선정된다면 “어? 저거 나도 봤는데, 저게 그런 뜻도 있었어?” 하며 한번쯤은 더 관심을 받을 법하지 않은가. 좀 더 지적인 사람이라면 학습과 숙고를 통해 작품 이면에 도사린 좌파적 가치를 내면화할 수도 있겠다.

    이런 일들이 반복된다면 사람들은 일일이 빨간 알약을 먹여주지 않아도 차츰 스스로 빨간 알약의 맛을 알고 찾아먹으려 들지 않을까?

    시간은 걸리겠지만 나는 레드어워즈가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방안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행사 자체는 물론이거니와 그 추구하는 바에서도 말이다.

    필자소개
    대중예술인. 게임원화로 생계 유지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