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망'을 재생산하는 사회
    저소득층 45%는 우울증 또는 위험군...'사회'의 부재
        2014년 03월 12일 09:5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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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마다, 문화마다 “자살”의 함의는 다릅니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자살은 “최후의 저항” 방법으로 통했습니다. 매천 황현의 자살도 그랬지만, 이와 같은 방식은 실제로는 격렬한 사회적 운동의 파도 속에서 90년대 초반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전태일의 분신도, 1991년의 그 “분신 정국” 속에서의 분신들도 “절망”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절망에 가까운 상황에 “죽음”으로까지 저항할 굳은 의지의 표시이었습니다.

    그러나 약 2000년대 초반쯤, IMF을 겪고 나서는, 이와 같은 최후 저항의 방식은 더 이상 다수에게 그 어떤 호소력도 가지지 못하게 된 셈입니다. 전태일이나 1991년의 분신자살자들을 동시대인들은-그 저항방식에 찬성했든 반대했든 간에-뚜렷하게 “기억”이라도 했지만, 2000년대 초반 이후로는 자살이 “호소”되기는커녕 아예 “기억”조차 되지 않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전태일은 “국민”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만, 가령 허세욱 동지를 기억하시는 분들은 많이 계시는가요? 허세욱 동지는 2007년에 자기 몸을 불사르면서 실신될 때까지 “한미 FTA 반대!”를 외치신 분입니다. 그것도 협상이 진행됐던 서울 하얏트 호텔 바로 앞에서입니다.

    본인이 죽고 나면 다들 비정규직인 동지들에게 모금도 하지 말고 그냥 화장해서 그 재가 미국놈들을 괴롭히게끔 전국 미군기지에 뿌려달라는 그의 유서를 보면, 그 마음속의 한이 얼마나 깊었는지 쉽게 알 만합니다. 운전기사, 철거반대 운동가이신 고 허 동지는 그람시가 이야기한 “유기적 지식인”의 전형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통스러운 죽음은, 비록 정태인으로 하여금 노무현/유시민 진영을 버리게끔 하는 등 일부에 영향을 미쳤지만, FTA를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노무현 류의 “시민사회”에 그다지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머지않아 그냥 정치적 “이벤트” 흐름 속에서 묻히고 말았습니다.

    허세욱 동지뿐인가요? 노무현 무렵에는 지방 비정규직, 농민 분신자살 소식들을 상당수 언론들이 아예 보도하지 않았는가 하면, <한겨레>와 <경향>은 대체로 단신보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죽었으면 죽었지, 이게 개인문제다 라는 논리는 “진보”를 자칭하는 “시민사회”까지 덮었습니다. IMF 이전까지만 해도 자기 몸을 버리면서까지 사회에 어떤 “말”을 전하고자 하는 이들을 “사회”가 어느 정도 거룩하게 생각하는 아비투스가 있긴 있었는데, 이제 그런 사회는 증발되고 만 셈입니다.

    생계형 자살이라기보다는 절망형 자살들

    IMF 이후로는 “절망형 자살”들은 언론에 그나마 가시화된 자살들 중에서 점차 다수를 차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왜 절망형 자살이라고 부르냐고요? 우리는 “생계형 자살”이라는 말을 쓰지만, 이 말은 절반의 진실만을 전해줍니다.

    세 모녀를 결국 죽게 만든 결정적인 원인은 주된 부양자(남편/아버지)를 잃어 각종 질병에 걸린 가난한 사람들을 지원해줄 만한 제대로 된 제도의 부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와 같은 자살들은 사회적 타살임에도 틀림없죠. 한데, 생계곤란에 처해지는 모든 이들이 무조건 죽음을 택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자살률이 가장 낮은 나라들을 보면, 대다수는 빈국들입니다. 자살이 거의 없는 네팔이나 10만명 당 1년간 자살자가 0,1명에 불과한 이집트에서는 생계곤란자들은 없나요? 우리보다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 같으면 극단적 가난 속에서도 “삶”에의 의지를 불태우나요?

    자살

    우리 사회의 절망형 자살의 모습들(방송화면)

    자살률이 최저인 나라들 – 필리핀, 타지키스탄, 아르메니아, 요르단, 시리아, 이집트 등등 – 을 보면, 부유한 국가는 물론이거니와 산업화/도시화가 완료된 나라도 거의 없습니다. 자살 관련 의학 논문들을 보면, 자살 위험이 가장 높은 분들은 우울증 환자들이고, 한국에서는 저소득층의 약 45%가 우울증 위험군으로 분류됩니다(관련 링크). 즉 빈곤, 無복지 사회의 야만성, 그리고 자살의 관계만큼 확실합니다.

    한데, 보통 우울증 환자 비율도 산업화 진척에 따라 증가되며, 한국의 경우에는 IMF 이후 산업사회 신자유주의화 속에서도 계속 연간 약 4%의 증가율을 보여 왔습니다. 자본주의 “발전”과 우울증의 확산이 정비례하는 셈입니다. 과연 이 부분에서 우리가 최근 우리의 자살현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단서를 잡을 수 없을까요?

    생계가 곤란해도 계속 꿋꿋하게 살려고 하는 빈국들의 빈민층/약자들과 “중간 강자”인 한국 사회의 빈민/약자 사이의 차이는 뚜렷합니다. 한국의 빈민이나 약자(이 두 가지는 중첩되기도 하고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빈민이 아닌 약자도 있기 때문입니다. 밑에서 이야기할 장자연처럼)는 사회, 타자들에게 호소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IMF 이후 신자유주의 질풍노도 속에서 급격히 원자화된 이 사회에서는, 사실 “사회”라는 게 이미 없습니다. 그 폐허만 남은 거죠. 사회는 어떤 통념적 “규범”의 존재를 전제로 하는데,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규범” “나는 취직하고 싶다, 성공하고 싶다, 잘 살고 싶다” 정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나의 가족붙이, 피붙이도 포함할 수 있지만 거기까지일 뿐입니다.

    그 울타리 바깥의 어떤 비극이 일어나든, 정의가 이루어지든 말든 “나”의 관심사는 전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제 억울해서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신 분들은, 대개 “사회”에 호소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2009년에 <Ch일보>주인님을 위시한 이 사회 여러 보스들의 위대하신 성욕을 채우려고 강제 동원 당한 장자연이 자살했을 때에, 그녀는 가해자들의 이름이 적힌 문건을 알리려는 노력을 자살 이전에 하지 않았던 셈입니다.

    문건은 거의 우연히 밝혀졌지만, 그녀의 죽음은 “호소”라기보다는 그저 돈이 많은 놈들의 성기가 지배하는 이 시궁창이 속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절망감의 표시였습니다. 원자화된, 연대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 되고 만 사회에서는 “절망형 자살”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짓밟혀진 사람에게 그저 유일하다 싶은 상황타개책으로 남을 뿐입니다.

    자살률이 제일 낮은 사회들인 이집트와 필리핀, 네팔 등은 아직도 전통사회의 공동체성이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장자연을 죽게 만든 악마들을 보호해주고 그 중에서는 그 누구도 형사처벌을 받지 않은 “부자들만의 국가”가 있을 뿐, 공동체는 IMF 이후의 개체화로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공동체도 파괴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긍정적인 근대적 의미의 개인이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자신감과 도덕적 책임이 강한 칸트적 “개인”은, 배우가 성노예 대접받는 그야말로 정신병적인 “국가”에서는 과연 조용하게, 원만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결국 이미 한국을 세계 2위 자살 최강국(?)으로 만든 이 자살 행렬들을 멈추려면 이 두 과제를 우리가 동시 실행해야 합니다. 수평적 연대에 기반한 공동체성 회복과 진정한, 권리와 책임을 동시에 절감하는 해방적 의미의 “개인”의 완성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망한 이들의 마지막 선택들을 우리가 바꾸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만든 이 시궁창이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모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필자소개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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