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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없는 세상을 위하여
2014년 첫 양심적 병역거부자 강길모씨의 병역거부 소견서
    2014년 03월 11일 02:3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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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처음으로 공개적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한 청년이 있다. 스물 여덟의 강길모씨. 강씨는 11일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군사주의 문화를 비판하며 올해 처음으로 정치적 신념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그의 동의를 얻어 병역거부 소견서 전체를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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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을 한다.

2011년 5월 24일, 난 입대를 했다. 꽤 늦은 나이에, 군대에 대한 좌절감과 분노, 일말의 기대감이 뒤섞인 채로 37사단 훈련소에 입소했다. 연병장 모퉁이를 돌자마자 날아왔던 조교의 욕설, 아이 다루듯 성인들을 대하는 간부의 태도. 나에겐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래, 군대니까. 군대니까. 하지만 무심코 들어간 화장실 칸 안에서 문에 붙어있는 구호를 본 순간부터 혼란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잊지 말자 천안함, 보복하자 연평도.”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 모두 북한에게 책임이 있다고 확신해왔지만, 직접적으로 보복하자는 식의 구호를 군대 안에서 보게 되니 전혀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부터 모든 생활 공간 안에 붙어있는 각종 구호, 문구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안보의식 호국정신으로”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모든 생활공간의 틈새에 박혀있는 이런 극단적인 문구들을 보며 망연자실했다.

특히 “경제를 살리는 사대강 살리기 사업” 식의 문구들이 생활관 곳곳에 붙어 있던 게 압권이었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군대는 한편으론 훨씬 더 단순했고, 한편으론 정치적이었다.

이틀 뒤는 마침 37사단에서 13년만에 부활한 훈련생 면회가 있는 날이었다. 어설프게 각을 잡고 앉아서 몇 십분 동안 훈련소장의 “훈화”를 들었다. 애국심+안보+군인정신+남자다움+복종+규율=자긍심이라는 주제의, 나름대로 알찬, 그리고 너무나 편견에 찬 훈화는 정말로 고통스러웠다.

몇 년 동안 끊임없이 추구해온 내 자신의 정치적 고민과 철학은 이 집단이 추구하는 가치체계 안에선 어떠한 의미도 없었다. 최종적인 결단은 사단훈련소에서도 의경, 전경이 차출된다는 설명을 들었을 때 이루어졌다. 의경, 전경으로 차출되어 시위현장에 투입된다면 도저히 군복무를 해낼 자신이 없었다. 결국 며칠간의 우여곡절 끝에 난 스스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날부터 우울증을 앓았다. 힘든 일, 내 성향과 맞지 않은 일을 무작정 피하고 있는 게 아닌지, 그 정도의 스트레스도 견디지 못할 정도로 나약한 게 아닌지 괴로웠다. 오랜 기간 고민을 했다. 정말 내 자신이 나약해서 포기한 것인지, 그렇다면 좀 더 강해져서 돌아가면 되는 건 아닌가.

하지만 한편으론 의문이 들었다. 입대 전에도 가졌던 의문이 너무나 강렬하게 다가왔다. 인간을 이렇게 단순하고, 복종적이고, 극단적으로 만드는 일이 강제적으로 일어나도 괜찮은 것일까? 이게 정말 우리가, 내가, 이 국가에서 살아가기 위해 당연히 감내해야 할 의무일까? 이것이 과연 어쩔 수 없는 문제인가? 정말 내 자신이 ‘문제’가 있어서 이런 일들을 감내하지 못 하는 것일까?

병역거부 선언을 하고 있는 강길모씨

병역거부 선언을 하고 있는 강길모씨

과연 어쩔 수 없는 건인가

많은 사람들, 특히 군필자들은 우리의 군대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어쩔 수 없는 의무라고 말한다. 북한이라는 주적이 있고, 다른 나라들도 호전성을 내보이는 동북아에선 60만 상비군은 필수이며,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현행 징병제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북한이라는 위협 앞에서 정신무장은 필수이기에 안보 교육은 필수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모든 조치들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일까? 누군가를 어느 날 문득 좋아하게 되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 문제인가? 아니면 태어나면 언젠간 죽다는 사실처럼 ‘어쩔 수 없는’ 문제인가? 1+1이 2인 것처럼 ‘어쩔 수 없는’ 문제인가?

본인 의사와는 무관하게 온갖 우파적, 보수적 교육을 받고 불합리한 대우를 참으며 강제로 군인이 되는 일이 대체 어떤 식의 ‘어쩔 수 없는 문제’일까? 이제는 확실하게 말 할 수 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아니다.

북한이라는 주적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전쟁 중인 국가라는 ‘픽션’이 이 불합리한 상황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전쟁의 위협이 징병제를 특별히 더 정당화하는 것도, 군대의 현실적 필요성이 군대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것도 아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과 전쟁을 벌였고, 냉전 내내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던 핀란드는 무려 1959년에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했다. 중국과 ‘분단’된 대만 역시 2000년에 대체복무제를 도입했고 곧 모병제로 전환된다.

이러한 사례 어디에 “남자라면 반드시 군대에 가서 진짜 사나이, 진정한 시민이 되어야 하는” 필연성이 있는가? 이러한 사례 어디에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정반대되는 교육을 억지로 받으면서 그 가치들을 내면화해야 하는 필연성이 있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폭력이 가장 쉽게 정당화되는 방법은 ‘어쩔 수 없다’고 말문을 막는 일이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를 착취하는 일도, 갑을 관계에서 갑이 갑질 하는 것도, 20대 팔팔한 청년들 군대로 강제로 끌고 가는 것도. 다 죄다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다, 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우리 사회가 굴러가기 위해선 모두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그 어쩔 수 없는 일이 벌어지며 발생하는 고통들은 모두 무시된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군사주의 문화는 이를 증폭시킨다. 군대 안에선 불합리한 처우도 생과 사를 다루는 살벌한 조직 안에선 견뎌야만 하는 작은 일에 불과하며, 그런 조직의 위계질서는 명확해야 한다.

군대는 사나이를 강조한다. 사나이라는 강조된 남성성, 진정으로 우월한 인간이라는 이 남성성은 군대를 다녀온 남성들에게 권위를 부여한다. 군대는 개인들에게 이러한 논리들을 강요한다. 그리고 그 개인들은 이러한 논리를 군대 이후의 삶의 영역에서도 적용시킨다.

이러한 군대의 논리는 사회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무한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노동자는 불합리한 처우도 견뎌내야만 하고, 일이 능률적으로 진행되려면 갑을 관계의 권위에 의문을 품어선 안 된다.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군대 다녀온 남자는 사나이다워야 한다.

모든 문제의 근원이 군대에서 출발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언제나 무한경쟁시장이라는 냉혹한 생존 토대 위에 있으며,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는 동등하지 않다. 대부분의 역사에서 남성은 언제나 기득권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들은 나아질 수 있다. 노동자는 보다 자신의 권리를 보장 받아야 한다. 갑의 횡포는 법과 윤리에 의해 제어되어야 한다. 성 역할의 고정관념은 보다 개개인들의 특성들이 존중되는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이런 모든 문제들은 바뀔 수 있다.

우리들 자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보다 높은 가치로 존중하느냐에 따라서 구체적인 선들, 구체적인 모습들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이런 것들은 결코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군대와 군대문화는 “어쩔 수 있는 일”들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엉뚱하게, 개인들에게 고통으로 다가오는 폭력적인 일들은 “하면 되는” “까라면 까야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아파도 참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고. 이것이 우리 사회의 징병제가 가지는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우리 사회에서 군대는 국가의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사회적 폭력, 문화적 폭력까지 정당화하고 재생산하는 도구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서 또는 스스로에게서 받았던 두가지 질문

내가 병역거부를 하겠다고 말했을 때 가장 자주 받았던 두 가지 질문이 있다. 첫째가 군대가 없으면 어떻게 전쟁을 막느냐는 질문이요, 둘째는 네가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죽는 상황에서 넌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이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나는 전쟁은 군대 이전의 단계에서, 보다 중요한 단계인 평화적인 국제관계를 지향하는 단계에서 결정된다고 답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답변에 대해 코웃음을 친다. 만약 지금 당장 군대가 없다면 다른 나라의 침입을 어떻게 막을 것이냐, 당신의 주장은 이상론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우리가 평화적인 국제관계를 지향해야 하고, 더 보편주의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금 당장 모든 군대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우리는 이념의 세계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따라서 지금 여건에서, 주어진 사회적 맥락 없는 논의는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지금 이 시점에서 군대를 통해 평화를 유지한다는 주장이 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사회 전체가 군사주의화 되어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말해주는지, 이러한 현재 상태가 과연 얼마나 정당한지가 진짜 물어져야 할 일이다.

지금 당장 군대가 없어지면 어떻게 할 거냐는 비현실적인 질문은 처음부터 적절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군대만 사라지고, 다른 나라의 군대는 그대로 있는 마법 같은 일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가능하지도 않은 일을 그 무엇보다 중요한 전제로 다루는 것은 오류이다.

그리고 우리는 2000년 전 로마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21세기에 살고 있다. 군대를 더 키우고 힘을 비축하는 방식으로만 세계를 바라보는 일, 특정 국가 안에서만 세계를 바라보는 일은 그 자체로 퇴행적이다.

이러한 시각들은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 몰래 친구랑 싸우고 싸움 짱 운운하는 그런 수준 이상이 아니다. 당연히 올바르지도 않을뿐더러, 처음부터 어떠한 문제도 해결 할 수 없는 방식이기도 하다.

설사 최소한의 물리력이 요구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일은 그 이전의 여러 정치적 상황들을 보다 평화롭게 만드는 일 아닐까? 적어도 우리가 이성적인 존재이려고 노력하는 한, 이는 당연한 결론이다.

두 번째 질문. 네가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죽는 상황에서 넌 어떻게 할 거냐는 질문. 이 거칠고 조야한 질문이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혔었다. 이 질문은 병역거부를 준비하며 가장 많이 고민했던 질문이자 과거에 군 입대를 했던 이유였기도 하다.

아무리 피하려도 해도 개념적으로 대면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그리고 난 이럴 때 분명히 상대를 죽일 텐데 이런 내가 병역거부를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러나 지금은 이에 대해 나름대로 대답을 할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 질문은 미리 대답을 준비해선 안 되는 질문이다. 설사 대답을 준비한다고 해도 무의미하다. 이 질문은 행동방침을 묻는 질문이 아니다. 어떤 행동이 더 윤리적이냐고 묻는 질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을 실제 삶에서 만났을 때, 무엇을 하든 결정된 행위는 윤리적으로 면책될 수 없다. 죽이던가, 죽던가의 문제는 윤리적으로 미리 답을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에 대해 우리가 미리 내릴 수 있는 윤리적 답이 있다면, 스스로를 그런 상황에 놓이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뿐이다.

나는 모든 대한민국 남성이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기에 군대를 가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선택의 여지도 없이 군대 아니면 감옥을 요구하는 제도에도 동의하지 않으며, 그러한 주장과 제도들로 인해 우리 사회가 겪는 내부적인 문제가 너무나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나에게 다시 한 번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군대냐 감옥이냐 두 가지 방향만이 있는. 나는 더 이상 정당한 의문들을 개인의 품성으로 돌리는 폭력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대신 인권과 평화의 문화를 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이려 한다. 더 좋은 삶을 위하여. 전쟁없는 세상을 위하여.

2014년 3월 11일

필자소개
병역거부 선언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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