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어의 황홀,
    백치의 역사 감각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 가상인터뷰 - 서정주
        2014년 03월 10일 02:05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1. 미당에 관한 스침의 기억

    미당 서정주가 별세한 지 10년이 훌쩍 지났다. 오랜 세월을 돌려,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캐릭터 가운데 하나인 그와 상상 속에서나마 인터뷰를 하려고 하니까, 새삼 그에 대한 오랜 기억 하나가 순간적으로 스쳐간다. 물론 그 기억은 충실한 내용을 갖춘 것이 아니라, 흐릿하고 아스라한 ‘스침’의 형상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1980년 11월, 그러니까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참여했던 ‘문학의 밤’에서, 나는 그저 신화적 존재이기만 했을 그를 처음 보았다. 생각해보니 그때 시인의 나이 66세였다.

    비록 노령이었지만, 그는 깊어가는 가을밤처럼, 우리에게 자신의 「국화 옆에서」에 대해 고조곤히 이야기를 풀어갔던 것 같다. 요즘 같으면 대학에서 불러도 올까말까 한 대가급 시인이 고등학교 ‘문학의 밤’ 찬조연사로 왔으니, 참으로 오래된 풍경이긴 하다.

    어쨌든 우리는, 미당보다는 옆 학교 여학생들의 출현이나 유치하게 써서 자료집에 실었던 자신의 작품을 읽어야 하는 순간에 더 관심을 두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이미 미당이 광주민주화운동을 짓밟고 권력을 잡았던 한 군인을 “단군 이래 최대의 미소”를 지닌 이라고 표현했다는 소문이 흉흉하게 돌았고, 이미 서정주는 미당(未堂)이 아니라 말당(末堂)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수군거림이 문예반 안에 돌기도 했다.

    하지만 어린 나는 그런 소문에 아랑곳없이 그롤 멀찍이나마 바라볼 수 있었고, 비록 단체사진이었지만 한순간을 정지시켜 놓고 그와 한 렌즈에 녹아 들어갔던 순간만을 소중하게 간직하려 했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 어떤 이유에서인지 손에 들어왔던 조남익 시인의 <한국현대시해설>에서 이미 그의 시를 10여 편 정도 읽어온 터라, 그 기쁨은 더욱 컸을 것이다. 나는 그때 이후 한 번도 그를 만난 적이 없다.

    그렇게 그를 스치듯 만난 기억으로부터 30년이 지난 시점에, 나는 21세기가 펼쳐지는 해에 숨을 멈춘 그를 상상 속에서나마 만났다. 그의 목소리는 고단한 듯 들렸지만, ‘또렷또렷’과 ‘카랑카랑’을 오가면서 자신의 시와 생애에 대한 그 나름으로 솔직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미 그의 시와 삶은 여러 글을 통해 알려질 대로 알려졌다. 그런데 나는 새삼 그의 음성을 통해 무엇을 들으려고 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나를 순간적으로 눈멀게 한 그의 매혹적 시편들과, 그 이면에 불편한 흔적으로 흐르고 있는 그의 어처구니없는 역사감각 사이에 끼인 간극에 관한 것이었을 터이다.

    2. 그의 생애와 시 이야기

    미당은 초기작인 「자화상」을 비롯하여 「화사」, 「귀촉도」, 「국화 옆에서」, 「춘향유문」, 「추천사」, 「푸르른 날」, 「동천」 등, 교육을 통해서건 자발적 독서를 통해서건, 나의 뇌리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숱한 명편들을 발표하였다.

    그는 <화사집>(1941), <귀촉도>(1948), <신라초>(1961), <동천>(1968), <질마재 신화>(1975) 등의 시집을 통해, 그에 대해 비판적인 이들이건 공감적인 이들이건 쉽게 범접하기 힘든 커다란 시의 산맥을 이루어놓았다. 그 세계는 우람하면서도 웅숭깊다. 깊은 산처럼 드리운 그늘도 깊고 어둑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생애와 시를 통해, 한국 시의 빛과 그늘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하였다.

    화사집

    서정주의 첫 시집 ‘화사집’

    미당은 첫 시집 <화사집>을 전후하여, 육체와 생명의 발견으로 특징지어지는 ‘저주받은 시인’으로서의 자전적 목소리를 시에 드러냈다.

    특별히 「자화상」에는 식민지 시대를 살아간 청년 화자가 자신의 가난한 상황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드라마가 펼쳐져 있다. 이 시는 그 대담한 솔직성으로 우리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준다.

    그는 자신을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라면서 그 바람의 유동성과 역동성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타인이 자신을 ‘죄인/천치’로 보는 것에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겠다고 한다. “찬란히 틔워오는 어느 아침에도/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몇 방울의 피가 섞여 있”다는 충격적 진술을 통해 자신이 펼쳐갈 시적 편력을 암시하기도 한다.

    일찍이 “발표 이후 근 50년의 풍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선하며 충격적인 직접성”(유종호)을 주는 강력한 호소력을 보이는 이 시편에 대하여 시인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내가 살아온 이야기는 여러 책에서 여러 모로 긍정도 하고 비판도 많이 했으니, 오늘은 그런 거 말고 시 이야기를 주로 했으면 좋겠어. 「자화상」 이야기했던가? 그게 내 자전적인 이야기냐구? 아니야. 그건 그저 상징적 작품일 뿐이지. 내가 스물세 살 때 쓴 건데, 우리네 농촌 산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옛 조선 사람들의 자화상이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 해. 특별히 나의 이야기라고만 할 수는 없지. 그리고 「화사」는, 그게 언제였더라, 하여튼 내가 해인사 영당이란 암자에 있던 여름의 어떤 밤이었어. 조그만 박쥐 새끼 한 마리가 열린 창틈으로 날아 들어와 방안을 퍼덕거리며 수선을 떠는 것을 잡아서 내 양말깁기용 큰 바늘로 벽에 꽂아 놓고 나서, 한여름 구상해오던 이것을 술술 써냈지. 지금 생각하면 약간 엽기적이지? 어쨌든 그때 나는 육체를 중요시하는 자의 감각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인들이 흔히 했던 것처럼 일종의 잔인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경험했어. 그것을 더욱 극단으로 몰고 간 작품이 원초적 색상으로 노래한 「문둥이」지.”

    미당은 자신의 굴곡 많은 삶보다는, 자신의 시에 대해 그리고 시를 둘러싼 기억들에 대해 술회하고 싶어 했다. 자신의 작품 속에 들어 있는 자전적 속성을 부인하거나, 자신이 조금 잔인함을 동반한 깨달음을 가졌다고 고백하는 것은, 역시 그다운 솔직성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그를 둘러싼 가장 격렬한 의구심의 발원지인 식민지 시대의 말기, 곧 태평양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행적을 알고 싶었다. 그를 친일 문인으로 비판하는 시선들이 가장 원초적으로 머무는 시간이 바로 이때니까 말이다. 그는 뭐라 말할까?

    “1940년에 만주 간도성 연길이라는 곳에 가서 먹고살려고 노력 많이 했어. 조선반도 안에서는 정말 식구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거든. 그런데 거기에서의 생활이 정말 시련의 연속인 거야. 취직도 잘 안 되고, 결국 어떤 친구의 주선으로 들어간 만주 양곡회사 연길 지점에서 나는 영하 30도 추위를 무릅쓰고 일했어. 내게 가장 중요했던 건 식구들의 목숨이었거든. 그런데 월급이 45원이었는데 그 정도 가지고는 식구들을 도저히 먹여 살리기가 어려웠어. 그래서 귀국하여 잡지사 기자도 하고 그랬었지.”

    그가 겪은 가난과 유랑, 그리고 다른 이들에 비해 특별했던 가족 안녕에 대한 본원적 욕구 등을 그는 솔직하게 풀어놓았다. 그런데 바로 만주에서 돌아와 보여준 그의 행적이 결국 문제가 되었다. 나는 이렇게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이 일제 말기에 남기신 기록에 대해서는 <친일인명사전>(역사문제연구소, 2010)이 참담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한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서정주는 1942년 7월 13일부터 17일까지 <매일신보>에 평론 「시의 이야기」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친일 대열에 합류했다. (…) <국민문학> 1943년 10월호에 발표한 「항공일에」는 친일시의 향방을 잘 보여준다. 이 작품은 일제가 침략 전쟁을 미화하고 전쟁 동원을 독려하기 위해 제정했던 항공일 행사에 맞춰 쓴 기념시다. (…) 1944년 12월 9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송정 오장 송가」는 1944년 11월 24일 한국인 출신 소년 비행병으로 제일 먼저 가미카제 특공대로 전사한 인재웅(창씨명 송정수웅)을 추모하는 내용이다.” 이 내용을 뒷받침하는 그 작품을 찾아보았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거기에는 태평양전쟁을 ‘성전’으로 미화하는 목소리가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한번 읽어볼까요?”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귀국대원
    귀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게로 왔느니
    우리 숨 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 <송정 오장 송가(頌歌)> 중에서

    이 열렬한 송가 앞에서 잠깐 아득해지는 게 어찌 나뿐이었을까. 그런데 그의 얼굴도 동시에 어둑해졌다. 시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역시 그는 즉답을 하기보다는, 아스라한 에피소드 하나를 통해 우회로를 택하였다.

    “1944년초인가 한 무리의 문인들이 일본군 대기동 연습을 참관하러 김제 땅으로 갔어. 황토바람이 세차게 부는데 그때 내 앞에 가고 있는 비평가 최재서 선생께 내가 이렇게 말했지. “우리는 키릴로프보담 좀 나은 셈인가요?” 그런데 그 양반 말씀이 “글쎄, 역시 고단하기는 고단하군요. 지나치게 고단해요.” 하는 거야. 연습이 끝난 밤 술집으로 몰려가 술을 진창 마신 후 여관에서 자는데, 최 선생이 이불 속에서 뒤척이면서 소리 죽여 울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마침내 나를 안고 통곡을 하지 않겠나. 나도 같이 울었네. 그 울음소리가 답변이 안 되겠나?”

    이어서 그는 힘주어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나는 ‘친일파’나 ‘부일파’보다는 일본의 욱일승천지세 밑에서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로 체면하면서 살아간 것에 지나지 않아. 그렇다고 그때 내게 무슨 영광이 돌아온 것도 아니야. 1944년 봄엔가는 독립을 고취하는 연극에 관계했다는 명목으로 두 달 동안인가 구류를 살기도 했어. 이래저래 휘둘린 셈이지. 순간 ‘역사’니 ‘정의’니 하는 게 허무해지더군.”

    미당은 일그러진 역사에 참여했던 자신의 한때를 시대의 압력에 순응한 결과일 뿐이었다고 말했다. 어쩌면 그가 시를 쓰면서 정말 중요했던 건, 역사나 독립 같은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건 오히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요, 그 후에 찾아오는 근원적 초월과 달관의 직관적 순간을 아름다운 언어로 잡아채는 것이었다. 그뿐이었다. 아니 그것만이 그가 꿈꾸는 그리고 꿈꿀 수밖에 없었던 ‘시(詩)’였다.

    생전의 서정주 시인

    생전의 서정주 시인

    이러한 세계는 해방 후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그의 두 번째 시집 <귀촉도>는 바로 그러한 근원적 생명성을 강하게 추구한 성과이다. 이별의 한과 영원한 사랑을 그린 「귀촉도」, 새 생명의 환희를 노래한 「밀어」 등은 모두 이 시기의 작품들인데, 특별히 생명 탄생의 신비와 인고를 통한 성숙의 의미를 형상화한 「국화 옆에서」가 씌어진 것은 해방 직후라는 혼란의 시기였다. 격렬한 혼란의 때에 이렇게 고요한 시를 쓸 수 있는 것이 바로 미당이었다.

    “만약 내가 20대에 소복하고 거울 앞에 우두커니 홀로 앉아 있는 사십대의 여인이 모습을 보았다면 ‘흥! 저 아주머니는 해쓱한 게 밉상이야.’ 하고 한껏 비웃었겠지. 하지만 이 작품 쓸 무렵에는, 어느 샌지 거기에도 서릿발 속의 국화꽃에 견줄 만한 여인의 미가 들어 있다는 것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 거야. 나이 탓이었나?”

    나는 이 작품이 일본 황실의 상징인 ‘국화’를 노래한 변형된 친일 시편이라는 해석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과도한 역사적 상상력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생명 탄생에 이러저러한 자연의 힘이 오롯하게 협력한다는 생각을 한순간의 직관으로 풀어놓은 시편일 뿐이다.

    미당의 이러한 근원적 생명성 탐구는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더욱 강화되는데, <서정주시선>에 실린 「무등(無等)을 보며」는 전쟁 기간 동안 시인이 겪었던 극심한 개인적 고통과 사회 현실에 대해 초연한 태도를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그때 나는 언어장애와 자살미수 등을 겪으며 극심하게 피폐해진 영혼을 가진 상태였어. 그런데 몸이 아플 때마다, 나를 조선대학에 안내해준 시인 김현승이 어디서 구해 오는지 모르지만 몸에 좋다는 양약을 가져다주어 몸이 소생했던 기억이 있어. 나보다 두 살 위였는데, 참 고마운 양반이었지. 그 무렵 광주의 무등산은 나에게 난생 처음 보는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만나는 감격을 주었어. 내가 신경쇠약과 영양실조로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 커다란 정신적 위안이 된 거야.”

    그 위안의 경험이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달관을 가져다준 것이다. 이처럼 가난한 삶이 간직하고 있는 순수성에 대한 긍정, 정신적으로 편안하고 따뜻한 삶에 대한 동경이 무등산과 ‘지란(芝蘭)’의 이미지를 통해 이 작품에는 그려져 있다. 그것은 갈매빛, 청산, 옥돌, 청태 같은 일련의 푸른 빛 이미지들의 연쇄 속에서 맑고 가벼운 정신을 향한 추구로 나타난다.

    결국 여유와 의지와 사랑과 인내와 초연으로 삶의 지혜를 긍정하고 승인하라는 권고가 이 시편의 메시지이지만, 그는 전쟁 직후의 절대 빈곤이라는 민족의 극한 상황을 그 특유의 정신주의적 초월로 뛰어넘는 달관의 세계를 보여준 것이다.

    이쯤 되면 이제 미당은 ‘역사’나 ‘현실’보다는 눈부신 순간의 초월을 중시하는 언어적 영매가 되어가고 있지 않았을까. 이때 그는 눈부시게 강렬한 그리움의 서정을 노래한 「푸르른 날」, 영원한 사랑과 지상적 한계를 함께 노래한 「춘향유문」이나 「추천사」, 한국인의 정체성을 추구한 「광화문」, 구도자의 염원을 담은 「꽃밭의 독백」 등을 쓴다. 화려하지 않은가. 그 영원성에 대한 추구가 빛을 발한 시집 <신라초>에 대하여 미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이가 들어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속의 이야기들 하고 눈이 잘 맞았어. 그래서 그것들을 한문 공부하는 셈 치고 예쁜 카드들에 한 이야기씩 또박또박 정성을 다해 가는 글씨로 옮겨 베끼고는 특별히 마음에 드는 구절엔 붉은 빛을 쳐갔지. 외우고 싶은 건 외우기도 하고. 그때 내가 만들어 가지고 다는 카드 다발이 적지 않았어. 그게 결국 ‘신라’의 기초가 된 거지.”

    미당은 이러한 정신의 극점에 또 하나의 대표작 「동천(冬天)」을 풀어놓는다. 이 작품은 ‘겨울 하늘’의 초승달을 제재로 하여, 그것을 여인의 ‘눈썹’으로 변형하여, 님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시편이다. 이때 여인의 ‘눈썹’은, 초기시의 이미지인 ‘피’가 변용된 것이다.

    말하자면 ‘피’가 인간의 원초적 생명력으로 충일된 이미지라면, ‘눈썹’은 여인의 관능과 그 육체성의 형식을 간직한 이미지다. 가장 작은 핵, 곧 육체의 마지막 남은 핵인 ‘눈썹’을 즈믄 밤이나 되는 고되고도 즐거운 꿈으로 맑게 씻는 행위를 통해, 그는 마치 「자화상」에서 이슬 속의 피를 맑게 다스려 나가듯이, 관능적 욕망과 고뇌를 다스려 마음 속에 남은 한(恨)마저 떨쳐버리려 한다.

    순간 그것은 지상의 인간에 속한 것이 아니라 천지만물의 윤회-거듭남의 세계에 속한 존재가 되어 천상으로 솟아오른다. 이때 비정(非情)의 존재인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마저도 그러한 ‘내 마음’의 정성과 그 속에 배인 시간을 알아채고 “시늉”한다는 것, 그래서 그 ‘달(눈썹)’을 범접하지 못하고 비끼어간다는 것이 이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다.

    이제 미당은 거침없이 한국 시의 장관을 하나하나 이루어나간다. 또 하나의 빛나는 성과로 기록될 시집 <질마재 신화>는, 기억 속에 전설처럼 남아 있는 토속적 일상과 세목을 눈부시게 재현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그는 토속적인 심미의식과 신화적 매혹을 불어넣은 「신부」 등 수많은 명편들을 이 시집에 담음으로써 스스로 ‘모국어의 은하계’가 되어버린다. 그는 <질마재 신화>를 이렇게 기억한다.

    “‘질마재’는 항시 다정하게도 사람의 일뿐 아니라 땅과 하늘의 모든 일들이 바짝 가까이 그 낯을 드러내서 살아 있는 시간이 아직도 되어 있는 곳이야. 어렸을 때 마음에 뿌리박은 그런 일들이 어디서 좋게 여긴 무엇보다도 훨씬 큰 위안으로 나를 부르고 있는 곳이지. 여기보다도 더 나은 내 여생의 담을 곳은 없었네. 그 이야기를 담은 결과지.”

    말년에 그는 바로 그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 귀환도 잠시, 그는 다시 ‘산’과 ‘떠돌이’라는 화두에 집중하면서 마지막 생애의 유랑을 택한다. 그것이 <떠돌이의 詩>(1976) 이후 <늙은 떠돌이의 시>(1993), <80소년 떠돌이의 시>(1996)에 담겨 있다. 이때 ‘떠돌이’는 그에게 자신의 생의 형식을 고스란히 암시하고 있는 실존적 명명임은 물론, 그 자체로 시인의 운명을 깊이 암시하고 있는 상징으로 다가왔다.

    결국 미당의 시적 편력은, 강렬한 관능과 경험적 구체성을 선보였던 전기 시세계에서, 후기로 갈수록 초월과 달관의 시학으로 가파르게 경사된다. 그것을 일러 구체성의 상실을 대가로 치른 무갈등의 시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화려하고도 다양한 이력을 통해 미당은 인간과 생명 자체의 심오한 현상과 본질을 함께 투시하면서, 그것을 민족어의 뛰어난 감각과 가락으로 담아냈다. 특유의 신화적 상상력과 원숙한 모국어 구사로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적 성채를 쌓아 올린 것이다. 그 성채는 높고 그 성채가 드리운 그늘은 깊고 어둑하다.

    서정주 자화상

    3. 뜨거운 상징, 서정주

    미당이 타계한 후, 학계와 문단에서는 그를 둘러싼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다. 그것은 먼저 한국 시의 거목을 잃어버린 일종의 추모 열기로 나타났지만, 곧바로 그가 생전에 보여준 어처구니없는 정치적 선택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로 확산되어갔다.

    게다가 한 유력 일간지가 ‘미당문학상’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황순원문학상’과는 달리 활발한 이견(異見)들이 오갔으니, 미당은 분명 ‘찬탄과 경외’는 물론 ‘비판과 청산’의 혐의도 동시에 가진 문제적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미당을 옹호하는 입장은 그를 평소에 스승으로 모셨던 이들이나, 미학적 가치로 그를 평가하려는 이들에 의해 폭 넓게 형성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대부분은 미당의 정치적 궤적과 예술적 성과를 분리해서 평가하는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다가 고은에 의해 미당의 친일 경력과 독재 시대에 보여준 정치적 행보 등이 비판되면서, 시인의 시와 삶이 분리되어 평가될 수 없다는 제안이 힘을 얻기도 했다.

    그의 일관된 권력 지향적 체질을 두고, 시인 특유의 천진난만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겠냐는 시각도 나타났지만, 이제 그 같은 심정적 면죄부 부여보다는, 그가 보여준 언어와 역사 감각 사이의 함수 관계를 밝히는 데 공력을 들여야 한다는 견해도 제출되었다.

    미당의 시적 궤적은 모국어(민족어) 또는 지방어(방언)가 가진 시적 가능성의 최상의 구현이라는 그만의 독자적인 시사적 공적으로 남을 것이다.

    전 작품을 통해 한결같이 높은 수준과 균질성을 보이며 한국 시의 예술적 성취를 한 단계 끌어올린 그 막중한 시사적 비중에도 불구하고, 미당과 그의 시를 우리가 이처럼 비판적으로 걸러내야 하는 것은, 그가 보여준 언어적 절정에 눈부셔하는 동안 ‘문학(시)’이라는 것이 정치적 인식과 예술적 형상의 통일체라는 사실이 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가 엄혹한 식민지 체제와 분단 체제를 살아왔다는 엄연한 사실조차 묻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의 전 작품에 대한 내밀한 독서를 통해 시와 삶 사이에 개재하는 필연적인 내적 연관성을 밝혀, 일생을 통한 그의 권력 옹호와 텍스트 내부에 존재하는 현실 관조의 상동성(相同性)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설적으로 말해, 미당이 우리 민족 언어의 최고 절정이라는 데, 식민지 체제와 분단 체제를 치러온 우리 근대문학사의 불행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미당이 있어 우리 비평은 지루한 동어반복이 아니라 첨예한 이견들로 풍요로울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단호한 일회적 청산의 대상이 아니라, 불구적 근대를 경험한 우리 근대사에 대한 반(半)항구적인 반성의 자료인 것이다. 그 반성이 텍스트에 대한 내밀한 경험 속에서 이루어져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바로 그 미당이, 2000년 12월 24일 밤, 강남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눈 내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였다. 그때를 그는 이렇게 기억한다.

    “내가 죽기 며칠 전인가, 큰며느리와 윤재웅, 유자효, 전옥란이 그렇게 온 것 같아. 그때 나는 희미하게나마 “윤이가 보고 싶어”라고 말했어. 윤이는 미국에 사는 내 둘째야. 급히 귀국해서 임종을 한 것 같아. 사실 나는 10월 10일 아내가 저세상으로 떠난 뒤 바로 몸져누웠어. 두 달 남짓한 짧은 투병을 한 셈이지. 10월 말쯤인가 제자이기도 한 중앙일보 이경철 기자에게 나는 “나도 시인의 축에 낄 수 있겠는가” 하고 물었어.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왜 아니겠는가? 그가 ‘시인의 축’에 끼다니? 그는 한국 시가 도달한 최고의 미학을 구현한 사람이다. 하지만 의심의 여지도 없이, 미당은 “누이의 어깨 넘어/누이의 수틀 속의 꽃밭을 보듯/세상은 보자”(「학」)라고 노래한 시인이다. 그에게 세상은, 가파른 역사나 세세한 현실의 세목으로 구성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근원적이고 초월적인 심미적 공간 곧 ‘누이의 수틀 속의 꽃밭’에 담긴 그 무엇이었다. 그 꽃밭은 아름답지만 감동이 덜하다.

    마치 백석의 후기시들이 비록 투박하지만 감동적으로 다가와서 가끔 시집을 덮고 하늘을 쳐다보는 순간을 요청하는 것과는 달리, 미당 시편은 언어적 매혹과는 달리 인간적 감동은 훨씬 덜한 세계이다.

    그것이 미당의 시와 삶이 닮은 점이다. 땅에 발 딛지 않고, 조금은 곁으로 빠지면서 깊이 근원으로 침몰하는 것. 그것이 미당 시가 그이 삶을 닮아버린 원리이다. 그래서 이 어마어마한 시인은, 급기야 1987년 어느 날, 임기를 얼마 안 앞둔 집권자에게 「전두환 대통령 각하 제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를 낭독하기까지 했다.

    미당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 체조와 산책과 여행을 마다하지 않았고, 기억력 유지를 위해서 세계의 좋은 산들의 이름을 1,625개 골라 외워 그걸 아침마다 되풀이 암송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의 시편의 한 구절처럼, “괜, 찬, 타,”(「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하고 내리는 눈발 속에서 그도 저 가파르고 굴곡 많은 20세기의 세상을 건너갔다.

    언젠가 미당은 “소원이 있다면 이것들이 나 사후에도 되도록 오래 어느 만큼의 독자들의 심금을 울려 가주었으면 하는 것뿐이다.”(<미당 서정주 시전집>, 1983. 자서)라고 고백한 바 있다. 그 고백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지금도 많은 이들은 미당이 남긴 시편들을, 그의 사후에도 여전히, 읽고 노래하고 외운다.

    나는 이 뜨거운 상징을 앞에 두고, 그가 남긴 언어의 황홀 뒤로 흐르는 그의 백치에 가까운 역사 감각을 바라보면서, 새삼 그의 초월적 미학을 경험하면서, 그를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안아 들이고 가야 한다고 쓸쓸하게 되뇐다. 그 순간에도 미당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찬사와 비판을 그저 “어디 내생에서라도/다시 만나기로 하는”(「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인연처럼 듣고 있었을 것이다.

    필자소개
    민교협, 한양대 국문과 교수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