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은지 노동당 부대표 사회장 진행
        2014년 03월 10일 01:27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노동당 박은지 부대표의 장례가 10일 사회장으로 진행됐다.

    고 박은지 부대표 장례위원회는 이날 오전 10시 대한문 앞에서 영결식을 갖고 이어 12시 서울 서교동에 위치한 노동당 중앙당사에서 노제를 진행했다.

    대한문 앞은 고인이 생전 쌍용자동차와 관련해 각종 집회에 참석해 고락을 함께 했던 곳이다.

    고인의 선배이자 동지였던 정지영 사회진보연대 공동운영위원장은 추모사를 통해 “저에게 은지는 굉장히 고집스러운 후배로 기억되고 있다. 학생운동을 같이 하던 시절에 고집스러움으로 억지를 부리며 다투기도 하는 치기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다”고 회고했다.

    이어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은지의 그 고집스러움이 사람들이 어렵다고, 안될 꺼라고, 불가능할 꺼라고 했던 일들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할 때 밀어붙이는 원동력이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온 가족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이 어려운 현실에서 세상을 확 바꾸겠다고 나섰던 젊은 활동가 은지가 겪었을 어려움과 고통은 비단 은지만이 느낀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그래서 많은 활동가들이 암담한 현실 앞에서 고통 받고 어려움을 느끼다 안타까운 선택을 하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몫”이라고 강조했다.

    박은지 부대표 영결식(사진=장여진)

    박은지 부대표 영결식(사진=장여진)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는 “박은지 부대표를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 이 현실에서 먹먹함과 터질 것 같은 아픔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지금은 떠날 때가 아니라 투쟁할 때인데 너무 빨리 가버려서 무척이나 속이 상한다”고 안타까워했다.

    박 대표는 “고인이 죽기 바로 1년 전 2013년 3월 8일 광화문 광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장애등급제 폐지는 10년 후의 상식을 외치는 것이다. 10년 전의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당시에는 상식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상식인 것처럼, 10년 후에는 사람들을 마치 고깃덩어리처럼 등급을 매겼던 시절이 있었다고 말할 것’이라고 했다. 10년 뒤 상식을 만드는 투쟁이라며 우리를 지지한다고 했다”며 “그런데 이 모든 약속 지키라고 재촉하지도 못하게 뭐 그리 급한 일이 있다고 가버렸냐”고 한탄했다.

    그는 “어차피 모두가 떠나는 그 길, 살아온 날 보다 살아갈 길이 더 많았던 당신, 너무 외롭지 않았으면 한다. 너무 가슴 아프지 말고 편안해지길 바란다”며 “어두운 밤 홀로 느꼈을 외로움과 아픔 모두 벗어 던지고, 언제까지나 당당하게 외치던 그 목소리로 하늘나라에서 우리 투쟁과 함께 해달라”고 말했다.

    이용길 노동당 대표는 “우리가 그대를 아프게 했다. 우리가 그대에게 고통의 짐을 함께 짊어지도록 요구했다. 동지는 기꺼이 그 짐을 함께 짊어졌고 늘 웃는 얼굴로 오히려 주위 동지들을 챙겼다”며 “그 웃음 뒤에 동지가 어떤 아픔을 인내해야 했는지, 그 아픔의 깊이가 어떠했는지 우리는 미처 가늠하지 못했다. 우리가 죄인이다. 용서해 달라”며 말했다.

    이어 이 대표는 “우리는 동지가 늘 안겨주던 희망과 패기, 사랑과 열정을 잊을 수 없다”며 “‘꿈을 공유했기에 너무도 소중한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한 노동당 당원들 사이에서 그대의 그 밝던 눈빛이, 명랑한 웃음소리가 여전히 살아있다. 그 힘으로 버텨 내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이 대표는 “이제 아픔과 괴로움은 모두 벗어버린 채 훨훨 자유로이 가시라”며 “박은지 동지가 남기고 간 모든 꿈, 어린 아들을 우리 모두의 꿈, 우리 모두의 아들로 키워나갈 것을 다짐한다”고 말했다.

    유족을 대신해 호상 인사를 한 김종철 전 노동당 부대표는 “박은지 동지는 제가 18대 총선에 출마했을 때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저를 도와줬었다”며 “선거가 끝나고 진보신당이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10장 분량의 글을 써오더니 당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다”고 회고했다.

    김 전 부대표는 “왜 당 활동을 하고 싶은지 물어봤더니, 결혼 후 남편이 병역특례로 가 있을 때 돈을 벌어야 해서 기간제 교사로 일했는데, 생일날 남편이 케익을 사다놓고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러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날이 태어나서 가장 슬픈 날이었다고 했다”며 “기간제 교사로 일하면서 남편에게 생일 축하를 받는 것보다 진보운동을 꼭 하고 싶다고 했다. 그것이 꿈이기 때문이라며 눈물을 글썽이던 게 기억난다”고 말했다

    그는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며 기자들을 모아놓고 우리 당 기사를 왜 다뤄야 하는지 쓰러질 때까지 마셨다”며 “자기 몸도 좋지 않은데 자기 역할을 다 해줬던 박은지 동지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몸은 갔지만 마음은 우리 가슴 속에 살아있다. 언젠가는 더 좋은 세상에서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IMG_0148

    IMG_0161

    영결식이 끝나고 유족들과 참석자들은 서교동에 있는 중앙당사로 옮겨 노제를 지냈다. 당원들은 고인의 영전 앞에서 생전에 고인이 그토록 원했던 당가를 합창하며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이날 이용길 대표는 “우리는 고인에게 많은 빚을 졌다. 그가 남긴 꿈과 이상이 이제 우리 어깨 위에 놓였다”라면서 “노동자 민중과 언제나 함께 하면서 진보정치의 앞길을 밝히려던 고인의 뜻을 이어가자”고 밝히고 장례위원회에 감사를 표했다.

     

    필자소개
    레디앙 취재기자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