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골학교 선생님은
    왜 태양광 패널을 가져갔나?
    [에정칼럼] 3세계의 조건과 상황 이해가 선행돼야
        2014년 02월 27일 02:2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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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11월 중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의 한 칼럼이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라오스 산골학교들에 태양광발전기 지원활동을 마치고 귀국한 연구원이 쓴 것이었다. (관련 칼럼 링크)

    연구원은 라오스에 태양광, 초소수력 등 재생가능에너지를 지원하는 활동을 하고 있는 입장에 있으나 재생가능에너지, 또는 그것의 제3세계 지원을 단순히 좋은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되며 그로 인한 지역의 사회적, 특히 권력적 작용에 대해 유의해야 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오스에서 재생가능에너지가 ‘기적’을 이룰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칼럼을 통해 생생하게 전했다.

    짧은 시간 안에 댓글들이 주르륵 달렸다. 그런데 대부분의 댓글들이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이 칼럼의 전체 주제가 아니었다. 그 주제를 도출하는 데 쓰인 작은 부분, 바로 다음 문장들이 전한 내용이었다. “오랜만에 학교를 다시 찾았다. 그런데 태양광 패널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수소문해보니 교장 선생님의 집으로 옮겨져 사용되고 있다고 했다.”

    따라서 꽤 심각한 글들이 많았다. 제3세계에 대한 외부의 정치적 경제적 개입으로서 개발원조의 폐해, 특히 덜 민주적이기 마련인 이런 작은 공동체에 외부 지원이 들어감으로 인해 권위주의를 강화시키게 되는 부작용, 혹은 오히려 상당히 민주적이었던 공동체를 외부 지원에 대한 접근성 서열을 통해 망가뜨리는 등의 문제가 전 세계의 일반적 경향임을 확인하면서 연구소의 라오스 지원 활동을 염려하는 내용들이었다.

    그때 나는 라오스에 남아있었다. 2009년부터 시작한 라오스 산골학교 태양광발전기 지원 활동은 2012년부터 라오스 싸이냐부리 지역 재생가능에너지 지원사업으로 확대되었고 그 현장 활동을 내가 맡고 있었다. 따라서 라오스 현장에서 일어난 이 문제적 사건에 대해 나는 설명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이런 상황이 만국 공통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라면 그 해결책 역시 일반적이고 보편적일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행 곤란’이고 뭐고 없이 뻔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심각한 댓글들 틈에 고작 한 줄밖에 답변을 달지 못했다. “라오스 산골학교의 교장선생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교장선생님이 아니고, 교장선생님 집은 교장선생님 집이 아니에요.”라고

    발전 단계의 차이 또는 번역의 오류?

    유엔에 가입한 국가라고 한국과 라오스가 똑같은 ‘국가’가 아님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전혀 다른 국가 안에서 일컫는 ‘정부’, ‘관료’, ‘공무원’도 서로 똑같은 걸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을까? 당연히 똑같지 않은 것을 가리킴으로 해서 일어나는 오해와 갈등, 문제 상황에 직면했을 때 나는 진정 당황해하지 않을까?

    순서대로 답하면, 처음에 나는 신기해했다. 삼십 해가 넘게 살았지만 한국에서는 ‘고속성장’이라는 말이 와 닿지 않았다. 축음기는 박물관에서나 보고 턴테이블도 써 본 적 없이 시디플레이어로 넘어왔지만 ‘기술도약’이라는 개념이 나의 음향기기 사용의 역사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걸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내겐 책 속에만 들어 있었던 것 같던 이런 용어들이 라오스에서는 생활 속으로 모두 튀어나왔다.

    라오스는 1992년에야 전기가 들어온 싸이냐부리(Xayaboury)같은 느린 소읍도 있지만 2007년 이후 못해도 여섯 달마다 한 번씩은 들르는 외국인의 눈에도 그 속도가 보일 만큼 수도 위양짠(Vientiane)에는 외국계 법률사무소와 은행, 컨설팅회사 간판들이 빠르게 늘었다.

    한편 지붕도 없는 시골 재래시장 흙바닥에서 좌판을 지키고 있는 소년도 휴대전화는 쓰지만 읍내 보통 가정은 물론 송전선이 들어가지 않는 지역에서는 새로 생긴 관공서에도 유선전화가 없다. 라오스의 고속성장과 기술도약은 베트남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킷마이’(신사고) 시기부터 따지더라도 고작 20년만의 ‘(초)고속성장’인 것으로, 기술도약과 함께 그 지역적 세대적 민족적 편차까지 커 ‘압축 근대’의 실제 전시장을 관람하고 있는 듯 흥미롭게 놀라움을 나에게 선사했다.

    다음에, 뜨내기 여행자의 시각에서 2년째 살고 일하는 거주민의 입장이 되면서, 나는 당황스러웠다. 그건 ‘예산’이라는 단어부터 시작했던 것 같다. 9월부터 1학기가 시작되는 라오스이니 회계연도 개시는 다를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다.

    그러나 학교 재무를 맡은 선생님이 내게 1년 예산이라 알려준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예산’과 전혀 달랐다. 아니, 한국어-라오스어 사전은 물론 영어-라오스어 사전에 내가 동원할 수 있는 가장 이해하기 쉬운 말로 예산을 설명해서 결국 알아낸 것은, 최소한 내가 파견된 지역의 학교들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1년 예산이라는 개념이 쓰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2000년대 중반까지 라오스는 고등학교에서도 영어가 중요과목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아주 가벼운 문제였고 음악 과목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음악(교육)을 전공하지 않았을 뿐더러 악보는 물론 도레미도 읽을 줄 모른다는 것은 교사교육 관련한 내 계획을 전체적으로 다시 짜도록 만드는 좀 심각한 문제였다. 또 컴퓨터실을 갖춘 건물 신축공사를 맡은 라오스 국립대 건축학과 교수 출신(게다가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다고 했다)이 전기 용량을 계산하지 못해 변압기가 폭발하는 사고까지 발생하기도 했다.

    라오스 산골학교 ‘교장 선생님’의 실제 현실은

    연구소가 지금까지 태양광발전기를 지원해온 라오스 산골학교들은 최소 3년 안에 송전선이 들어올 계획이 없으며 이미 송전선이 놓였더라도 외부 지원이 없으면 그 전선을 끌어 설치하거나 전기요금을 납부할 수 없는 형편의, 그런데 기숙사가 있는 오지의 중학교들이다.

    이런 오지는 대부분 라오스 소수민족들의 거주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12시간 넘게 걸어 등하교를 해야 하는 소수민족 학생들을 위해 갈대로 엮은 기숙사도 있지만, 읍내에서 파견되어 오는 라오족 교사들을 위한 교사 기숙사도 필수적이다. 그 수가 적으면 소수민족 여학생과 라오족 여교사들이 같은 기숙사를 쓰기도 하고 형편이 나은 교사 기숙사는 풀잎이 아니라 나무판자로 짓기도 한다.

    산꼭대기에 주로 있는 학교와 기숙사는 라오스에서는 드물게 춥기도 할뿐더러 식수는 물론 생활용수도 산 아래로 내려가 길어 와야 하는 상황이니 아무리 점수도 높게 주고 월급을 많이 줘도 그 불편함을 감수하고 오지학교로 지원해 오는 교사들은 많지 않다. 더구나 가족을 이루고 경력 있는 교사들은 적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오지에 7,8년 적응해 가까스로 가족과 함께 나무판자로 지은 (기숙사와 별 다름없는) 별도의 집에서 사는 아직 젊은 교사가 대개 ‘교장 선생님’이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제나 3년제 교육전문학교를 나온 다음부터 따진다면 빠르면 스물다섯 여섯에도 교장이 될 수 있다는 거다. 실제로 내가 만난 이들 학교 교장 선생님들은 대개 교장이 된지 3, 4년은 지난 이십대 후반 또는 삼십대 초반이 대부분이다.

    학교의 대표나 최고관리자로서의 역할이 주인 읍내 교장 선생님들과 달리 이들 산골학교 교장 선생님들은 부족한 과목 담당 교사 역할은 물론 지역의 몇 없는 말단 공무원, 개발자로서의 역할까지 맡아야 한다.

    물론 이 모든 역할을 우리가 상상하는 만큼 전문적으로 수행해내는 것은 아니다. 교사 기숙사와 교사 가족이 사는 집의 구분만큼이나 그 경계가 모호하게 이 모든 일들을 그저 맡을 수 있는 유일한 주체로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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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로 태양광발전기가 설치된 후 싸나싸이 중학교의 기념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학생이고 나머지는 모두 교사들이다.

    배경 설명은 이쯤 하고 그럼 이제 그 문제의 사건을 다시 설명해 보겠다. 연구소에서 학교에 설치해준 태양광 패널을 자기 집으로 옮긴 교장 선생님은 두 명이다.

    한 명은 2010년 2월 연구소가 태양광발전기를 처음 지원한 학교의 교장 선생님, 아니 당시는 평교사였던 선생님이 몇 년이 흘러 학교를 옮겨 교장 선생님으로 가면서 원래 학교에서 필요없게 된 태양광 패널 하나를 가져간 것이다. 원래 학교까지 곧 송전선이 놓였고 그 지역의 최초의 중학교였던 만큼 교육청에서 지원하여 전기를 끌어오고 전기요금까지 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새로 옮겨 가게 된 학교는 원래 학교보다 두어 시간을 더 들어가야 하는 송전선이 언제 들어올 지 계획도 없는 진짜 오지.

    또 다른 한 명은, 교사 기숙사는 두 채뿐으로 대부분의 교사가 학교 아래 마을에 흩어져 살면서 통학하고 있는 상태에서 태양광발전기가 설치된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다. 라오스에서는 아무리 고등학교라도 밤까지 불을 밝혀야 하는 교실은 없다. (오히려 마을마다 교실 한 칸씩이라도 있는 초등학교에서는 문맹인 주민들을 위한 야학이나 마을 모임을 위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때 학생들이 쓰는 기숙사뿐만 아니라 교실에도 전등을 밝힐 수 있도록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도록 했다. 확장될 것이 분명한 학생 기숙사와 교사 기숙사를 위한 예비였다. 이는 라오스 재생에너지 기업이 설치를 맡았던 최초 학교와 달리 이 학교의 설치작업을 맡았던 지방 정부기관인 싸이냐부리 도(道) 에너지광산국도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 그래서 교장 선생님은 교실에 불필요하게 남는 패널을 학교 가까이로 와 다시 지어 살게 된 자기 집으로 옮겼던 것이다.

    물론 애초 설치되어 있던 위치에서 무단으로 옮겨져 있는 패널을 발견하곤 나는 화까지 내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이 내 허락을 얻기 위해서 연락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며 내가 말한 목적에 맞지 않는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굳이 연락해야 할 일도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국제개발협력 활동가가 풀어야 하는 진짜 문제

    진짜 문제는 이것이다. 첫 번째 교장 선생님은 옮겨 단 패널을 잘 사용하고 있었지만 두 번째 교장 선생님은 패널을 통해 전기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

    첫 번째 선생님은 재생에너지 기업이 설치와 동시에 유지 관리와 간단한 수리 교육을 실시해 그때 교육 받은 교사 중 하나였던 첫 번째 교장 선생님이 패널을 잘 옮겨 달 수 있었던 반면, 두 번째 선생님은 에너지광산국이 고용한 기술자들이 설치 자체를 썩 잘하지 못했고 두 번째 학교 교사들에게 별도의 교육을 시키지 않았던 게 그 까닭이다.

    에너지광산국이 두 번째 학교에 교육을 시키지 않았던 데에는 내가 명확히 계약서로 작업수행을 주문하지 않은 부주의함이 한 원인이다. 이는 혼자의 실수라 더 뼈저리지만 지역정부 기관장이라도 구두 약속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고 개선하면 되는 쉬운 일이다. 헌데 에너지광산국이 고용한 지역의 기술자들마저 그 기술 수준에 문제가 있다면, 그렇다면 교육을 진행했더라도 해결이 안되는 쉬운 문제가 아닌 것이다.

    비용이 더 들더라도 앞으로는 설치 작업은 중앙의 재생에너지 기업 기술자들에게 맡기는 것은 두 번째 문제에 대해 당장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오래 시간과 노력이 들더라도 두 번째 문제는 결국 지역의 재생가능에너지 설비 관련 기술자들을 육성해 내는 것으로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라오스 산골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우리가 알고 있는 교장 선생님이 아니고, 내게 화가 나는 일이 라오스 사람에게는 전혀 잘못이 없는 일일 수 있다.

    피터 L. 버거와 토마스 루크만이 <실재의 사회적 구성>에서 말한 것처럼 티베트 승려에게는 ‘실재하는’ 것은 미국의 사업가에게는 ‘실재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따라서 믿음처럼 확신하는 ‘지식’, 상식과 ‘실재’의 특정한 결합은 특정한 사회적 맥락과 관련되고, 이 관계들은 그 맥락에 대한 적절한 사회학적 분석에 포함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왕가리 마타이(Wangari Maathai)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대 아프리카 국가는 피상적인 창조물에 불과하다.”

    케냐는 42개, 나이지리아는 250개, 부룬디와 르완다는 3개 등 몇 개부터 수백 개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아프리카의 소집단과 부족들은 식민 지배세력이 그은 국경선에 의해 하나의 국민국가로 묶였다.

    “대다수 아프리카인은 식민 지배 세력이 만들어준 국민국가를 이해하지 못했고, 국민국가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지도 않는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자기가 속한 작은 부족의 물리적‧심리적 경계를 이해했고, 부족과 관계를 맺었으며 부족에 애착을 가졌다.”는 말이 이해가 되는 것이다.

    국제개발협력 활동가라면 지리적 위치, 경제적 수준 차이보다 이런 사회적 맥락적 차이를 이해하고  ‘국가’가 다름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필자소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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