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립국 선택한 전쟁포로들
    [산하의 오역] 1954년 2월 21일 인도에 도착한 76인
        2014년 02월 26일 04:2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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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이들이 최인훈의 <광장>을 기억한다. 남도 북도 택하지 않고 중립국 인도를 택했고 인도로 가는 ‘타고르 호’ 배 위에서 바다에 몸을 던진 이명준의 이름도 많은 이들이 기억한다.

    양측 다 합쳐서 수십만의 포로 가운데 남도 북도 또는 중국도 대만도 아닌 중립국을 택한 것은 총 88명이었다. 그 가운데 열 두 명의 중국 사람을 제외한 ‘Korean’ 들은 76명이었다. 이중 인민군 출신은 74명, 한국군 출신은 두 명이었다.

    이들은 왜 중립국을 택했을까.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이를테면 어느 인민군 출신은 ‘조선’에 산 것은 전쟁 기간 뿐이었다. 중국에서 태어나 팔로군의 일원으로 일본군과 싸웠고 그 후 모택동이 조선족 사단을 북한에 양도함에 따라 인민군 군복으로 갈아 입고 압록강을 건넜던 것이다.

    또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진 지긋지긋한 친공과 반공의 대결의 후유증도 있었다. 친공이 장악한 수용소에서는 반공포로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반공포로가 장악한 수용소에서는 ‘빨갱이 사냥’이 벌어지는 일이 무시로 벌어졌던 상황이 어느 한 쪽을 택하는 것을 망설이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전쟁 없는 땅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이었을 것이다. 말이 휴전이지 또 언제 불 붙을지 모르지 않았던가.

    거제 포로수용소의 모습(국방부 블로그)

    거제 포로수용소의 모습(국방부 블로그)

    76명 중 상당수가 ‘미국’을 희망했지만 미국은 참전국으로 중립국이 아니었다. 그들을 일시적으로나마 수용한 나라가 인도였다. 그러나 인도로 가는 배에 올라서도 분단과 대립의 공포는 명징하게 살아 있었다. 중립국행이라는 목표 아래에서는 하나였던 76인의 포로들도 인도파와 남미파로 갈라진 것이다.

    신생국 인도는 친공적 성향을 보이고 있었고 (이 때문에 이승만은 인도군을 흰눈으로 봤다) 남미에 가기를 희망한 포로들은 인도를 선택하겠다는 포로들을 ‘빨갱이’‘로 봤다. 그 두 집단은 서로 1백미터 이내에 접근하지 않는 식으로 배 안에서의 분단 체제를 만들었다. 중립국을 택하겠다고 고향을 버린 사람들끼리 또 그렇게 갈라지다니.

    그 분단(?)이 끝난 것은 1954년 2월 21일이었다. 인도 마드라스 항에 도착한 것이다. ‘인도파’들은 즉시 인도 남부로 보내져 기술 교육 등을 받았지만 나머지 남미파들은 또 한 번의 기나긴 기다림을 겪어야 했다.

    친공적 성향을 드러낸 인도정부는 이들에게 북한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하기도 하고 인도에 정착할 것을 종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북한으로 갈 수는 없었고 카스트 제도 엄존한 인도에서 ‘최하층 계급’이 된다고 생각한 이들은 인도 정부에 중립국으로 보내 줄 것을 요구하며 맞선다.

    설득 끝에 몇 명은 북한으로 돌아갔고 이것을 안 이승만 정부는 발끈한다. 당장 포로들을 돌려 보내라는 것이었다. 다행히(?) 남미국가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이 이들을 받아들였지만 포로들을 귀환시키려는 남측의 노력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또 몇 명은 남한으로 귀환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포로들은 인도나 남미에 정착하여 지난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들의 행적을 보면 기구함의 극치를 달린다. 정착에 성공하여 일가를 이룬 이도 있으나 경제적으로 파산하거나 정신질환 등 질병을 얻어 빈민굴에서 스러져간 사람도 있고 인민군 사진병이었던 한 사람은 “난 아무 것도 모른다. 그러니 제발 나를 너희들의 일에 끼어 들게 하지 말라, 나는 사람이 싫다”며 동료들 사이에서도 스스로 고립을 자청하기도 했다.

    한겨레 2003년 7월 9일자에는 76인의 포로 가운데 한 사람인 김남수의 삶이 소개돼 있다. 그는 브라질에 정착했지만 삶이 순탄하지 않았다.

    자신을 조센징이라고 부르는 일본인을 칼로 찔러 살해하고 10년이 넘는 감옥살이를 한다. 출옥 후에는 중국 식당에서 종업원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총을 쏜다. 정당방위를 주장했지만 또 감옥행. 그 즈음 정신줄을 놔 버린 그는 감옥과 정신병원을 전전하며 살았다. 그러던 그를 한국에 오도록 주선한 건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한국에 올 때는 요란한 관심을 받았지만 이내 잊혀졌고 충북 꽃동네에 들어간 그는 “나 없이는 통일이 안된다”는 과대망상과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미워한다.”는 피해망상을 두루 가지고 있었다. 꽃동네에서도 나와 고향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보려 했지만 나이 일흔 노인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는 강원도 고성 사람이었다. 애초에 인민군도 아니었다. 중학생으로서 그저 인민군에 끌려가기 싫어서 숨었다가 국군에게 잡혔고 바로 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그의 부모는 그가 왜 사라졌는지도 모르고 죽었다. 이미 여동생이 백발이 된 세월이 흐른 뒤에야 돌아온 고향은 고향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낯설고 서먹한 땅이 돼 버렸다. 10년이 흐른 지금 그는 살아 있을까 죽어 있을까.

    참으로 기구했던 그들의 삶을 대변하는 에피소드로 인민군 소좌 출신의 주영복의 국가(國歌) 섭렵기를 보자. 그는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 국가를 배웠고 소련 군정 때에는 소련 국가를 익혔으며 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는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에”“를 불렀고 포로가 됐을 때는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습득했다. 인도에 가서는 인도 국가를 따라 했고 브라질에 갈 때는 브라질 국가를 미리 배워 그 노래를 합창하며 브라질에 발을 디뎠고 미국에 정착한 뒤 그는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들으며 기립했다.

    한국 현대사의 격류와 곡류가 사방에 흩뿌려 놓은 비극은 참으로 많다. 1954년 2월 21일 76인의 한국인이 생판 모르는 미지의 땅 인도에 도착했다.

    필자소개
    '그들이 살았던 오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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