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튜어트 홀의 여정 :
    문화주의에서 포스트주의까지
        2014년 02월 19일 10:0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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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튜어트 홀의 삶과 실천에 대한 남종석씨의 애정과 존경이 담긴 글이다. 글이 길지만 필자의 요청으로 한번에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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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스튜어트 홀의 여정

    신좌파라는 말이 처음 만들어진 곳은 영국이다. 프랑스나 독일, 미국에서 만들어졌을 것 같지만 신좌파라는 용어를 처음 조어한 것은 영국 신좌파들이었다. 영국 신좌파들은 60년대가 아니라 50년대에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영국 신좌파는 두 축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56년 소련군의 헝가리 침공에 대해 영국 공산당이 침묵하자 이에 대해 반발하며 공산당을 탈당한 구공산주의자 그룹이었다. 나머지 한 축은 영국-프랑스 동맹군이 스웨즈 운하를 장악하기 위해 이집트를 침공하면서 이에 반발해서 등장한 옥스퍼드의 독립좌파였다.

    전자를 대표하는 이가 에드워드 톰슨과 존 새빌이었다면 후자를 대표하는 이가 바로 스튜어트 홀, 라파엘 새뮤얼, 찰스 테일러 등이다. 이들은 프랑스어 nouvelle gauche에서 이름을 따서 스스로를 신좌파라고 불렀다.

    영국 공산당 탈당파들은 <신 이성인>(The New Reasoner) 라는 잡지를 발간했으며, 옥스퍼드의 독립좌파들은 <대학 좌파 평론>(The University and Left Review)라는 잡지를 발간했다.

    이 두 잡지는 1959년 통합되어 <신좌파 평론>(The New Left Review)이 탄생한다. 초대편집장은 당시 26세였던 스튜어트 홀이 맡게 된다. 스튜어트 홀은 <대학 좌파 평론>에서도 편집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63년 이 잡지는 재정 문제로 파산 위기에 처했을 때 당시 24세였던 페리 앤더슨이 인수한다. 그 이후 이 잡지는 페리 앤더슨과 로빈 블랙번 등이 주도한다. 이 두 명의 귀족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하던 흐름을 영국에서는 2세대 신좌파라고 하며, 그 이전 편집부를 구성하던 선배 세대들을 1세대 신좌파라고 한다. 1세대를 대표하는 이가 에드워드 톰슨이고 후자를 대표하는 이가 페리 앤더슨이다.

    이렇듯 스튜어트 홀이 최초로 역사 무대에 등장한 것은 영국 신좌파의 형성 과정에서이다. 영국 신좌파는 등장 초기부터 영국 사회를 활활 태우던 핵무장 반대 캠페인 (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 :CND)에 적극 참여한다. 50년대 말 폭발적으로 성장한 CND는 전후 지속된 영국 사회운동의 원형이 되었으며 모든 급진적 저항운동의 출발점이었다.

    1961년 CND 행진 모습

    1961년 CND 행진 모습

    신좌파 일반이 그러했듯이, 스튜어트 홀 역시 CND를 통해 정치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는 CND 내부에서 가장 중요한 이론, 정책 담당자였다. 신좌파들은 CND의 씽크 탱크였다. 그들은 ‘나토 탈퇴’와 ‘적극적 중립주의’를 CND의 주된 노선을 만든다. 적극적 중립주의란 영국이 대서양 동맹을 탈퇴하고 핵무기를 일방적으로 폐기하며, 제3세계와 연대하는 중립주의 노선을 의미한다.

    1964년 이후 CND 운동이 약화될 쯤 스튜어트 홀은 리차드 호가트의 초청으로 버어밍햄 현대문화연구소로 자리를 옮긴다. 그는 1968년 호가트로부터 소장직을 물려받아 10년간 이 연구소를 이끈다. 이 시기 현대문화연구소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문화연구의 중심지가 된다.

    그 이후 홀은 소장직을 리처드 존슨에게 물려주고 개방대학으로 자리를 옮긴다. 개방대학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수준 높은 교양강좌를 진행하는 성인 교육기관이다. 그 이후 은퇴할 때가지 그는 이 대학에서 머물며, 영국 공산당/노동당의 논쟁에 개입하며 지적 정치적 작업을 계속한다. 더불어 그의 본업인 문화/미디어 분석을 다양하게 확장한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알튀세, 그람시), 구조주의, 기호학,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이론을 원용하여 다양한 문화현상을 분석하고 이를 다시 정치현실에 접목시켰다.

    그의 작업 목표는 문화와 정치가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는 문화, 이데올로기 분석의 무능함으로 인해 좌파는 신우익의 등장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으며 새로운 세대의 급진적 상상력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고 보았다.

    1990년대가 되면 그는 점차 마르크스주의로부터 후퇴하여 성, 인종주의, 하위문화, 탈식민주의 등으로 연구 관심을 확장한다. 이것은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마르크스주의로부터, 계급으로부터 후퇴하는 징후라고 비판 받기도 했다.

    필자는 레디앙에 쓴 칼럼에서 스튜어트 홀을 두 번 언급했었다. 한번은 박노자 선생과의 토론 과정에서 홀의 대중 예술 개념을 인용했고, 다른 한 번은 박근혜 정권에 대한 분석에서 홀의 대처리즘 분석을 활용했다.

    더불어 언젠가 필자는 홉스봄에 대한 추모 글을 쓸 때 우리 세대가 마르크스주의의 언저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영어권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글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영어권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작업은 우리 세대가 교조주의에 물들지 않으면서도 수정주의로 후퇴하지 않을 수 있는 이론적 자원을 제공해 주었다. 홀도 그런 선배 마르크스주의자 가운데 한 명이다.

    이 글은 홀의 지적, 정치적 여정을 따라가며 그의 작업의 의미를 간략히 살펴본다. 그의 작업이 우리 시대에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살피는 것이 그에 대한 가장 적절한 추모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 스튜어트 홀의 문화주의

    홀은 자마이카에서 로즈장학생으로 영국 옥스퍼드로 온다. 이 장학제도는 노동자계급 출신 아이들이나 영국령 식민지 등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고등교육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홀은 학부 시절에는 공산당에도 노동당에도 결합하지 않은 채 길드사회주의자였던 하워드 콜의 세미나에 참여하고 있었다. 콜의 영향으로 인해 홀 등은 교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로부터도, 타협적인 개량주의로부터도 자유로운 문화 속에서 좌파로 성장할 수 있었다. 대학원에서 홀의 지도교수를 맡은 이는 레이몬드 윌리엄스이다.

    레이몬드 윌리엄스는 <문화와 사회>에서 그의 지도교수이도 했던 리비스주의와 단절하여 문화를 민주주의와 연결시키고자 시도했다. 에드문트 버크, 리비스, T.S. 엘리어트 등은 문화를 “인간 정신의 정수”로 보았지만 그것은 오로지 “소수”만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이 보수주의자들에게 민주주의란 “제멋대로 나대는 것”에 불과했다. 19세기 기준으로 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듯이, 민주주의라는 언어는 경멸의 대상이었다.

    반면 레이몬드 윌리엄스는 문화란 생활양식이며, “일상적인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노동자계급의 문화와 경험이야말로 산업 자본주의에 저항할 수 있는 굳건한 토대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더불어 윌리엄스는 <기나긴 혁명>(문학동네, 2007)에서 민주주의의 확장은 문화의 쇠퇴가 아니라 장구한 혁명의 과정에 있는 문화적 진보의 다른 측면이라고 주장했다.

    스튜어트 홀을 버어밍햄 현대문화연구소로 초청하는 리처드 호가트는 <글쓰기의 효용>에서, 1930년대 살아 있는 노동자계급 공동체의 일상적 문화를 재현했다.

    호가트는 저녁이 퇴근하여 선술집에 모여 대화하고, 연주하고, 신문을 읽으며 정치를 토론하는 노동자계급의 일상적인 문화적 전통이야말로 유기적 공동체적 보존하는 힘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호가트는 그 책 2부에서 상업주의 대중문화가 넘쳐나면서 노동자계급의 전통문화가 오염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지만 말이다. 윌리엄스와 호가트는 노동자계급의 문화 속에서 사회변혁의 힘을 발견하고자 한 것이다.

    윌리엄스와 호가트의 영향은 홀 등으로 하여금 노동자계급의 일상적인 문화에 관심을 갖도록 했다. 홀은 <대학 좌파 평론>을 편집하면서 전후 노동자계급 공동체(도시 공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주목했다. 더불어 풍요의 사회가 어떻게 노동자계급 공동체에 영향을 주는가를 분석했다.

    <대학 좌파 평론>에 결합한 신좌파들은, 노동자계급 거주지구 청년들의 문화를 분석함으로써 대중문화가 어떻게 청년세대의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고찰했다. 그들은 이들 노동계급의 문화 속에서 저항의 가능성을 찾고자 한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노동당의 전통적인 관념을 교정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노동자들은 착취 받고 억압받으며 빈곤한 존재라는 그 통념 말이다. 신좌파는 변화하는 노동자계급의 삶을 인식하고 한 것이다.

    1963년 홀은 <신좌파 평론>의 편집위원장을 사퇴하고 당시 중등학교 선생이던 와넬과 함께 <대중 예술>이라는 단행본을 서술하기 시작한다.

    이 책은 텔레비전, 라디오, 영화의 오용으로 인한 청소년 문화의 타락에 대해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전국 교사 연합’의 결의를 비판하기 위해 쓴 것이다. 이 교사연합은 대중문화의 부정적 영향으로부터 청소년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한 것이다.

    홀과 와넬은 대중문화에 대해 주류 중간계급의 관점과 전혀 다른 입장을 취했다. 이들은 우선 대중문화와 고급문화를 구별하는 전통적인 엘리트주의적 관점을 배격한다.

    윌리엄스와 호가트가 그랬듯이, 이들은 대중문화의 특정한 요소들은 과거의 민속 문화가 가져왔던 건강한 전통을 유지하고 있으며, 모든 대중문화를 타락한 문화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두 저자는 구체적인 텍스트 분석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 한다. 노동자들, 농민들이 만들어낸 민속 춤, 전통가요, 수공예 등이 타락한 문화라고만 할 수 없듯이 채플린의 영화, 흑인들의 째즈, 민중들의 공연 문화를 단지 청소년들의 의식을 타락시키는 것만으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홀과 와넬은 대중문화 내에서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음은 인정했다. 대중문화에서도 그 자체로 상업주의에 물들어 아무런 가치 없는 것도 있지만 대중성 속에서 예술적 가치를 체현하고 있는 작품들도 존재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런 논의조차도 오늘날의 비평가들에게는 엘리트주의적 요소로 보일 수 있겠지만 말이다.

    홀과 와넬은 대중문화 내에서도 실험성과 예술성을 견지하는 작품들이 존재함을 주장함으로써 대중문화의 예술적 가능성을 옹호한 것이다. 대중들이 일상적으로 향유하는 문화 속에서 예술적 가능성을 찾고 심지어 그 속에서 저항의 가능성을 탐구하고자 한 점에서 <대중 예술>은 윌리엄스와 호가트의 입장을 계승하고 있었다. 홀 자신의 표현대로 이 시기는 홀에게 있어 문화주의의 시대였던 것이다.

    3. 버어밍햄 현대문화연구소: 문화주의와 구조주의를 넘어

    <대중 예술>이 얼마간 반향을 일으키자 리처드 호가트는 자신이 설립한 버어밍햄 현대문화연구소로 스튜어트 홀을 초청한다. 이 연구소는 버어밍햄 대학에 세워진 대학원 과정 연구센터였는데, 홀은 연구원으로 채용된 것이다. 1968년 스튜어트 홀은 호가트를 이어 이 연구소의 책임자가 된다. 이후 10년간 그는 연구소를 세계적인 문화연구의 중심지로 발전시킨다.

    이 시기 스튜어트 홀의 지적 궤적 보여주는 대표적인 논문들은 [문화연구와 버밍엄 연구소 : 몇 가지 문제틀과 문제들]와 [문화연구의 두 가지 패러다임]이다. 이 논문들은 임영호 교수가 편역한 <스튜어트 홀의 문화이론>(한나래, 2008: 이하 <이론>)이라는 책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연구소에 처음 초청되었을 때 스튜어트 홀은 여전히 1세대 신좌파의 선배들인 윌리엄스, 에드워드 톰슨(<영국 노동자계급의 형성>, <윌리엄 모리스>등), 리처드 호가트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이들을 통칭하여 문화주의라고 한다.

    문화주의(culturalism)이라는 개념은, 1978년 이후 홀에 이어 이 연구소의 책임자가 되는 리차드 존슨이 앞의 세 사람의 이론 경향을 종합하여 붙인 이름이다. 에드워드 톰슨은, 현대문화연구소가 주최한 어떤 세미나에서, 리처드 존슨이 호가트나 윌리엄스와 함께 자신을 문화주의로 묶는 것에 대해 격렬히 반대했지만, 이 세 사람의 특징을 문화주의로 통칭하는 것은 결코 오류라고 할 수 없다.

    이들 세 사람은 구체적인 분석에서 차이점은 있지만, 공통적으로 문화 분석의 중요성을 논하고, 노동계급의 의식에서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노동자계급 공동체에서 문화가 차지하는 핵심적인 위치를 중시했다. 이들은 노동자계급 문화 내에서 저항의 가능성을 찾아내었으며, 소설 텍스트들, 대중문화들을 정치적으로 읽는 전범을 만들어내어 문화 분석을 전진시키는데 있어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다.(<이론>, 145쪽) 그들의 저작들은 주어진 삶의 조건들이 어떻게 체험되고 경험되는가에 강조점을 둠으로써 역사적 행위의 가능성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이론>, 216쪽)

    그러나 현대문화연구소는 문화주의에만 머물지 않았다. 여기에는 2세대 신좌파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1963년 <신좌파 평론>을 인수한 페리 앤더슨은 영국 좌파의 이론적, 지적 빈곤을 논하는 일련의 유명한 논문들을 생산한다. 이른바 네언-엔더슨 테제로 알려진 도발적인 논문들이었다.

    “정말 놀랍도록 똑똑한” 이 20대 젊은이는, 영국 좌파의 지적 무능력을 치유하기 위해 자신의 출판사에서 대륙의 이론을 적극적으로 발간한다. 이 출판사는 레비 스트로스, 소쉬르, 알튀세르, 그람시, 샤르트르, 프랑크푸르트 학파 등을 연이어 소개한다. 스튜어트 홀도 이 과정에서 구조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며, 그의 영향으로 인해 연구소의 작업 방향도 크게 전환된다. 홀 자신의 표현을 빌면, 문화주의가 잠시 중단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이론>, 217쪽)

    구조주의는 문화를 하나의 심급으로 파악했다. 문화란 의식의 조건이되 의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일련의 물질적, 비물질적 것들의 모순된 결합물이다. 여기에는 언어, 매체, 제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우리들의 의식이란 순수하게 주체적인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작용의 물질적 조건들에 의해 제약받으며,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체계(결정적으로 언어이다)를 통해 구성되는 것이다. 이렇듯 구조주의는 주체의 자율적인 실천이라는 환상을 벗겨 버리고, 의식과 행위자를 탈중심화 시켰다. 더불어 구조주의는 문화를 일련의 실천들에 가해지는 제약 조건으로 규정함으로써 주체가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가를 보고자 했던 것이다.(<이론>171~172)

    구조주의 가운데에서도 알튀세르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이 아니라 인간 주체가 세계와 맺는 체험된 관계라고 주장했다. 자아가 세계와 관계 맺는 과정에서 갖게 되는 세계에 대한 표상이 바로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지배의 도구이기에 앞서 모든 존재는 이미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기적 존재가 된다는 것이었다. 더불어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유명한 논문에서, 이데올로기는 단지 관념이 아니라 물질적 장치로 존재하는 구체적인 실천이며, 실천을 통해 주체를 구성하는 위치에 있음을 밝혔던 것이다.

    이데올로기 개념은 매체 분석, 대처리즘 비판, 새로운 주체형성에 대한 강조에 이르기까지 홀의 작업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비록 홀에게 있어 이데올로기 개념이 의미하는 바가 늘 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에 대한 분석은 언제나 그의 작업에 중심을 차지했다. 문화 분석 자체가 저항 담론의 형성(저항 이데올로기의 형성)이라는 홀 자신의 문제의식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조주의, 알튀세르주의만으로는 작업을 진전시키는데 한계가 뚜렷했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 개념에는, 많은 비판자들이 언급하듯이, 기능주의적 요소가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론>, 269쪽) 알튀세르의 주장처럼 이데올로기가 체험된 세계관이고 이를 통해 주체가 구성된다면, 주체는 어떻게 저항적 존재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뚜렷한 답변을 제공하지 못한 것이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이 기능주의적인가 그렇지 않은가는 논쟁의 대상이지만 스튜어트 홀은 분명 알튀세르의 이론에서 기능주의적 한계를 보았던 것이다.

    그의 대안은 그람시를 원용하여 계급 경험을 강조하는 문화주의와 구조주의를 종합하는 것이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문화주의는 노동자계급의 경험을 강조했으며, 이 경험이야말로 지배체제의 재생산 논리에 능동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지배계급의 통합논리는 결코 노동자계급을 완전한 종속적 주체로 생산할 수 없으며, 그 재생산의 과정은 균열, 이탈, 저항적 요소와 마주친다는 것이다. 스튜어트 홀은 이와 같은 저항주체의 존재 가능성을 그람시의 실천철학을 통해 이론화할 수 있다고 했다.(<이론>, 226쪽)

    즉 그람시를 경유한 문화주의는 “경제적 조건에서 결정되는 즉자적 계급이 능동적인 역사적 정치적 세력 즉 대자적 정치적 세력으로 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홀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한데, 그 이유는 문화 분석의 궁극적 목적이 바로 ‘정치의 복원’이기 때문이다.

    연설하고 있는 스튜어트 홀

    연설하고 있는 스튜어트 홀

    4. 매체, 갈등의 공간

    70년대 스튜어트 홀의 작업에서 또 다른 중요성을 지닌 분야는 매체효과에 대한 기호학적 분석이었다. <이론>에 실린 [이데올로기의 재발견]과 [기호화와 기호 독해]는 매체 비평의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논문들 가운데 하나이다.

    홀은 이 논문들을 통해 미디어는 단지 매세지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지배화의 효과를 생산하는 기호화 작용을 동반한다고 보았다. 더불어 매체의 수용 과정 또한 단지 메시지의 수동적 수용이 아니라 갈등적 과정임을 주장한다. 홀은 매체에 노출된 대중들은 메시지에 따라 조작되는 존재만이 아니라 기호독해 과정에 능동적으로 개입함으로써 메시지의 효과를 전화시킨다고 주장한 것이다.

    홀은 기호화의 과정을 통해 전통적인 재현이론을 비판한다. 전통적인 재현이론은 매체와 독립된 세계가 실재한다고 주장한다. 매체의 재현이란 이 실재를 올바르게 다시 보여주거나 아니면 왜곡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통적인 재현이론은 반영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의 실재는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매체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다시 보여주거나 아니면 실재와 다르게 보여주는 것이다. 외부의 실재가 판단의 준거점이 되고, 미디어는 실재를 반영하는가 그렇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매체 비판은 매체의 재현이 어떻게 현실을 왜곡하는가에 집중하게 된다.

    홀은 이와 같은 재현이론을 비판한다. 그는 기호화 과정을 통해 재현이론과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홀에 따르면 매체가 특정한 대상을 재현할 때, 그 수단이 되는 언어, 도상적 기호들은 그 자체의 담론적 규칙들, 그 규칙들을 만들어 낸 사회적 관습들을 통과하게 된다.(<이론>294쪽) 기호는 자연적 대상을 순수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일련의 규칙들에 따라 대상이 기호화됨으로써 그 의미 체계는 새로운 실재를 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언어든 이미지이든 순수한 자연적 재현은 존재하지 않는다.

    매체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도상 기호)와 담론(청각 기호)들을 통해 세계의 의미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홀에게 있어 매체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 능동적인 구성자이다.

    더 나아가 홀은 이와 같은 재현 과정은 필연적으로 이데올로기와 연결된다고 주장한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의 어떤 도상학적 배치는 그 자체가 하나의 기호화 과정이다. 기호화는 독특한 의미를 생산해내며, 그 의미는 권력효과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매체의 언어들은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지배의 효과를 생산해 내는 것이다. 기호화는 결코 순수한 의미 전달 수단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지배와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이론>, 296) 매체의 담론화된 규칙 자체가 지배 질서, 가치, 관행들 생산하는 시스템이며 사회적인 관습들을 만들어 내는 장치인 것이다.

    그러나 스튜어트 홀의 기호화 이론은 미디어의 이데올로기적 효과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수용자들의 매체의 수용과정을 제시함으로써 기호화의 이데올로기적 효과가 어떻게 투쟁의 장(갈등의 공간)이 되는가를 보이고자 했다.

    그는 매체를 통해 기호화 된 이데올로기는 수용자들의 기호독해 과정을 통해 의미가 구체화 된다고 주장한다. 수용자들은 기호의 수동적인 수용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해석자로 개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용자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 그가 어떤 문화적 맥락 속에 존재하는가에 따라 수용자들의 수용방식도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매체의 생산자들이 텍스트들을 자신들의 의도대로 만들었다고 해도, 수용자들의 독해과정에서 전복작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송신자의 의도가 완벽하게 수신자에게 다가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로는 메시지가 송신자의 의도대로 수용될 수 있지만 때로는 그것이 중성화 되거나 수용자들에 의해 전복됨으로써 생산자들이 의도한 지배적,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정 반대의 상황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메시지는 결코 순수하게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같은 말이지만 대중매체에 노출된 대중들은 결코 수동적인 존재만은 아닌 것이다. ‘의미 작용의 정치’는 언제나 진행 중이다.(<이론>304쪽) 홀은 매체의 수용과정은 그 자체로 투쟁의 과정으로 본 것이다.

    5. 대처리즘, 신우익의 새로운 도전

    1978년 스튜어트 홀은 버어밍햄 대학을 떠나 개방 대학(open university)으로 이동한다. 이 시기 이후 스튜어트 홀은 신우익의 등장에 대한 논의와 좌파의 혁신을 위한 이론적 작업을 통해 정세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그는 일관된 이론가라기보다는 정치적 정세에 개입하기 위해 이론을 활용하는데 있어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지적일지 모르겠다. 대처리즘에 대한 그의 분석은 신우익의 등장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영향을 주게 된다. 이 시기 그가 생산한 중요한 논문들은 <대처리즘의 문화정치>(한나래, 2007: 이하 <대처리즘>)에 잘 나타난다.

    대처의 등장은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1970년대 위기의 산물이었다. 대처리즘을 분석함에 있어서 홀이 주목한 것은 신우익이 과거의 토리당의 레토릭과는 근본적으로 단절된 새로운 헤게모니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헤게모니 전략이란 전후 영국 사회를 지배해 오던 계급타협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해체시키는 우익적 담론전략 이었다.

    1979년 대처의 총리 취임식

    1979년 대처의 총리 취임식

    반면 좌파들은 이와 같은 대처리즘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으며, 이에 대한 대항 헤게모니 구축을 위한 전략적 사고를 못했기 때문에 대처리즘이 승승장구 하는 것을 쳐다만 보았다는 것이다. 노동당의 장기적 패배 역시 여기에서 비롯된다.

    1970년대는 영국 경제는 구조적인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 제조업 경쟁력은 약화되고 생산성은 후퇴한 반면 복지비용은 증가하고, 재정위기는 고조된다.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노동당 정부는 구조적 대안이 부재한 상황에서 긴축재정을 단행하고 통화주의 정책을 도입했으며 케인즈주의를 조용히 폐기한다. 말하자면 노동당 정부는 자본주의 위기를 관리하는 정권이었다.(<대처리즘>, 91쪽) 그것은 노동조합의 협조를 얻어 자본가 중심의 위기 극복을 지향하는 전형적인 코포라티즘 체제였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노동당의 정권에 집단적으로 반발하면서 노동당 정권은 아래로부터 내파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불만의 겨울’이었다. 노동당 정부는 결국 IMF 체제 전락하며 대처에게 권력을 이양한다.

    대처리즘의 핵심은 전후 노사정 합의 즉 전후 자본주의적 계급타협을 해체하려는 우익의 새로운 프로젝트였다. 그것은 전후 복지체제에 적응했던 토리당 전략의 전면적 수정을 의미했다. 대처는 이를 위해 새로운 담론전략을 구사한다. 그녀는 복지체제를 허약하고 병든 집단주의 체제라고 선전하며 소유적 개인주의의 미덕을 칭송했다. 복지에 의존하고 국가의 보호에 만족하는 것은 병든 자아일 뿐이며 스스로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인간이야말로 책임 있는 시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대처리즘>, 114쪽) 복지는 집단주의와 동일시되었으며 개인주의야말로 칭송해야할 대상으로 제시된 것이다.

    더 나아가 신우익은 60년대 이후 성장한 급진주의와 페미니즘을 공격했다. 신우익은 신좌파들이 주장했던 성적 해방, 자율성, 저항을 나태와 태만, 성적 난삽함, 국가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비난했다.(<대처리즘>, 85쪽)

    이들은 복지에 물든 자들을 ‘국가 내부의 적’이라고 규정하고, 신좌파들을 ‘사회적 무정부 상태’를 초래하는 반란집단이며, 흑인들은 ‘영국의 종족성을 좀먹는 존재’로 표상했다. 대처주의는 법, 질서, 규범의 확립을 통한 강한 영국의 건설을 강조했다. 대처리즘의 담론전략은 남성 숙련 노동자들에게 강하게 작용하면서 우파의 새로운 역사 블럭을 형성해 갔던 것이다. (<대처리즘>187쪽) 대처는 노동조합 저항(탄광노조)을 분쇄하고, 포클랜드 전쟁을 통해 강한 영국의 이미지를 대중들에게 심어준다.

    대처리즘의 분석에서 홀이 특히 강조한 것은 대처의 헤게모니 전략이었다. 대처는 자신의 시장근본주의적 관점을 보수주의적인 도덕담론, 반국가주의적인 개인주의, 질서와 안정이라는 전통적인 가치에 접합시킴으로써 다양한 세력들을 결집시킬 수 있었다. 그녀는 좌익을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책임의식이 부재하며, 국가를 좀먹는 집단으로 표상했던 것이다.

    반면 노동당과 골수 좌파들은 이와 같은 대처리즘의 담론전략을 간과함으로써 이들의 공격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노조주의는 전통적인 계급정치에만 천착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이 대처의 담론전략에 포섭되는 것을 저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6. 노조주의의 한계

    대처리즘에 대한 글들이 일정한 정치적 효과를 내던 1980년대 중반 홀은 좌파의 위기를 분석한 일련의 글들을 발표한다. 여기에는 [사회주의 이념을 위한 1980년대의 투쟁]이나 [노동당 이념의 위기], [문화 격차], [국가] 등이 포함된다.

    좌파의 위기에 대한 홀의 분석은 대처리즘의 분석에 대한 대칭적인 측면이 있다. 대처리즘의 담론전략에 비해 노조주의의 무능이 좌파의 역사적 패배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더불어 홀은 좌파가 재생하려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제기함으로써 자신의 개입을 완성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홀은 점차 마르크스주의로부터 후퇴하여 소위 포스트마르크스주의로 전환한다.

    홀은 노조주의의 근원적 한계는 1970년대의 경제위기와 복지국가의 위기에 대한 좌파의 분석, 대응의 부재에서 찾고 있다. 노동당 우파든 좌파든 복지국가의 위기를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 속에서 찾지 못함으로써 적절한 대응을 사고할 수 없었다고 한다. 특히 영국 자본주의는 한계 상황에 도달해 있었지만 좌파들은 복지와 고용안정이라는 전통적인 케인즈주의적 관점에서만 대응하는 것으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대처의 공격이 들어오자 노동자운동은 전통적인 저항의 레토릭만을 생산하며 패배했다는 것이다.(<대처리즘>, 389-390쪽)

    캘러헌 노동당 정권의 몰락, 광부노조 파업의 실패와 벤좌파의 실패 모두 이와 같은 좌파의 무능과 결합되어 있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변동이 장기적으로 노동자계급에게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를 좌파들은 사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홀은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노조주의의 한계에 주목한다. <대학 좌파 평론>시절 그는 [탈계급의 감각]에서 이미 이 주제를 깊이 있게 분석했다. 홀은 풍요의 시대에 직면한 노동자계급은 전통적인 물질적 빈곤에서 벗어났으며, 문화적으로도 단순한 계급적 경험만이 아니라 수 많은 새로운 감각에 직면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노조주의는 이와 같은 경험의 변화가 함의하는 바를 간과하고 있었다. 홀은 노동자계급 청년들이 소비하는 대중문화의 분석을 통해 이 공백을 매우고자 했다. 홀은 문화 변동이 어떻게 노동자계급의 의식의 변동에 영향을 주는가를 이해하고자 한 것이었다.

    80년대 중반에 쓰여진 [문화 격차]는 이런 문제의식을 확장한다. “대중 소비 사회의 성장은 비록 계급 격차를 해소시키지는 않았지만 민중들의 일상적 삶의 패턴, 사회적 경험과 기대치, 체엄 영역을 철저하게 변형시켰다.” 노동자들은 “여가, 오락, 휴가 패턴, 음주, 음식 소비” 과정에서 계급적 감각의 상당부분 상실해 간 것이다.(<대처리즘>, 408쪽)

    좋건 나쁘건 노동자계급의 아이들은 비디오 게임, 컴퓨터 게임이 익숙해 있고, 대중들은 일상적 욕망의 흐름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전통적인 노조주의에만 집착한다면 좌파의 기획이 지닌 대중적 설득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홀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무의식적 전제’를 공격한다. 홀은 노동자계급은 단일한 집단도 아니며 동일한 의식의 층위를 지닌 집단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균열되어 있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있으며, 상호 이질적인 요소를 너무도 많이 내포한 집단이다.(<대처리즘>, 351쪽)

    더불어 노동조합 운동의 전통 내부에는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 또한 균열의 요소이다. 노동자계급의 통일성은 계급투쟁을 통해 획득될 수 있는 것이지 그 자체로 노동자들의 통일성을 보증하는 것은 없다는 점이다.(<대처리즘>, 350쪽) 계급형성은 계급투쟁의 효과이지 그 역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운동에 토대를 둔 사회주의의 미래는 그 자체가 불확실하다. 어떤 것도 사회주의의 승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보장 없는 속에서 좌파는 작업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대처리즘』, 374쪽)

    노동자계급의 이질성, 균열에 대한 비사고는 노동당의 한계일 뿐만 아니라 소위 ‘골수 좌파’들의 한계이기도 하다. 2010년대 한국의 상황에서는 홀의 문제의식은 너무나 당연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노동당이 연이어 집권한 영국(윌슨 정부와 캘러헌 정부)에서는 이와 같은 의식이 매우 느리게 성장하고 있었음을 인지해야 한다.

    홀은 좌파가 국가주의에 물들어 있음도 비판한다. 대처가 좌파를 비난하며 반국가주의-소유적 개인주의를 옹호했던 맥락에는 분명 국가에 대한 좌파의 지나친 의존도 한 몫 했다는 것이다. “현존했던 사회주의 국가는 국가가 소멸하기는커녕 부풀려지고, 관료적이고, 고압적인 세력”으로 변해 노동자계급과 인민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변해버린다.(<대처리즘>, 423쪽) 노조주의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노조주의 역시 국가를 매개로 한 복지체제에 집착함으로써 엘리트주의적 권위주의에 물들었던 것이다. 영국 노동당의 이념적 토대였던 페비언주의 자체가 엘리트주의적 요소를 전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홀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 “국가에서 사회로의 권력이전”을 요구한다. 좌파에게 시급한 일이란 국가를 매개로한 복지 공급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민주적 삶 전체를 심화”시키는 것이다. 좌파는 “주도권을 국가에서 사회로 옮기고 사회생활의 관리에 대한 독점권을 국가 엘리트에게 완전히 넘어가지 않는” 조건 속에서 국가와 사회의 동반관계를 새롭게 구축해야 하는 것이다.(<대처리즘>441쪽)

    좌파는 국가를 부정하지 않되 국가에 앞서 시민사회 내에서 자율적 통제권, 질서, 자기 토대를 구축하는 것이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성장시키는 것이다. 이런 토대가 없다면 심지어 복지국가라 해도 관료주의, 권위주의에 물들어 민중을 실질적으로 배제하는 체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복지주의자들이 명심해야할 대목이다.

    7. 포스트마르크스주의, 홀의 마지막 귀착지?

    전통적인 좌파와 관련하여 홀이 제기한 또 다른 비판은, 골수 좌파이든 노조주의이든 새로운 사회운동의 가능성을 사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국 노동운동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무지는 고질적인 것이다. 남성 노동자계급에 토대를 둔 노동운동은 70년대의 페미니즘의 도전에 대해 일관된 침묵으로 대응했을 뿐이다. 흑인 운동, 이민자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노동운동이 능동적으로 사고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홀의 비판의식은 1990년대에 들어와 정체성의 정치, 포스트식민주의 담론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지금 스튜어트 홀>, 앨피, 2006, 252쪽)

    이 시점에 이르면 홀은 운동들 내부의 차이, 맥락의존성, 자기 반영성을 고려하여 각각의 운동들의 자율성과 공존을 주장하게 된다. 홀의 정치적 입장 또한 전환된다. 대처리즘 분석, 노조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페미니즘, 흑인 정체성, 포스트 식민주의 담론으로 이동하면서 홀의 정치적, 이론적 입장는 점차 마르크스주의에서 포스트마르크스주의로 전화한다.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홀의 문제의식은 좌파의 도약을 위한 노동자운동의 혁신이었다. 그러나 80년대 중후반 그의 입장은 점차 노동운동의 중심성에서 다양한 운동들의 공존과 절합이라는 문제의식으로 전환한다.

    1990년, 2000년대에 들어서 홀보다 젊은 세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홀에 대해 노골적으로 비판한다. <신좌파 평론>의 타리크 알리는 홀을 “좌파를 그릇되게 인도하는 애매하게 좌파적인 교수”라고 묘사한다. 테리 이글턴이나 다른 좌파 지식인들도 홀의 변화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홀에 대한 이들의 비판은 80년대 중반 벤좌파에 대한 홀의 비판에 대응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홀 자신의 이론적 입장의 전환과도 관련되어 있었다. 홀의 핵심 주장은 좌파들이 너무 계급주의에 물들어 변화하는 현실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좌파들에게 홀의 태도는 노동당이 계급으로부터 후퇴하는데 일조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 시기 홀의 문제의식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라클라우식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다. 라클라우의 두 텍스트 <마르크스주의 정치학과 이데올로기>, <헤게모니와 사회주의전략>은 80년대 이후 홀의 입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라클라우는 모든 운동은 그 나름의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으로 환원할 수 없고, 이들 운동의 등가적 연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라클라우가 말하는 헤게모니 프로젝트는 이들 운동을 절합시키는 담론전략을 의미한다. 라클라우에 따르면 세계는 담론구성체의 결과이다. 90년대 이후 정체성의 정치에 대한 홀의 탐색 역시,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라클라우의 영향을 제외하고는 사고할 수 없는 것이다.

    라클라우의 주장이 그람시의 언어를 활용하여 담론전략을 주장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명백히 ‘계급으로부터 후퇴’하는 것이었다. 라클라우의 저작을 둘러싸고 <신좌파 평론>에서 격렬한 논쟁이 이뤄졌던 것도 나름 이유는 있는 것이다.(이 논쟁은 전효관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민맥, 1992 참조)

    홀의 입장 역시 결은 달랐지만 계급으로부터의 후퇴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90년대 이후 그가 보여준 정체성의 정치와 탈식민주의에 대한 친화성은 좌파들의 혐의를 확증시켜 주는 것이었다. 각종 포스트주의에 대한 홀의 태도는, 프레드릭 제임슨(<후기마르크스주의>)이나 테리 이글턴(<포스트모더니즘 비판>), 알렉스 캘러니코스(<포스트 모더니즘에 반대하여>), 데이비드 하비(<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 페리 앤더슨(<The Origins of Postmodernity>)는 확실히 다른 것이었다.

    홀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는 몇 가지 지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홀은 문화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문화 분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의 입장은 대처리즘 분석에서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문화나 이데올로기가 중요하다는 것과 그것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노조주의의 실패는 자본주의의 위기와 직접 관련이 있었고,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후기 자본주의의 구조변동과 연결되어 있었다. 데이비드 하비 식으로 말하자면, 포스트모더니티의 조건은 자본주의의 유연축적 체제와 맞물려 있었던 것이다.

    노동당, 사민주의 일반의 위기도 이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파의 공격적인 태도(신보수주의)와 노동당의 타락(신자유주의로의 전향)은 20세기 후반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와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관점이 경제적 환원주의라고 누군가 비판할지라도, 필자는 최근 20년 간의 정치 사회적 변동은 근본적으로 경제정세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본다. 홀은 영국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해 언급했지만 좌파의 위기를 너무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차원에서만 접근하는 오류를 보였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노동운동을 상대화 시키고 정체성의 정치를 더 중시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 것이다.

    기호학에 대한 그의 입장도 징후적이다. 4절에서 보았듯이, 기호화 과정과 기호해독 과정에서 보여진 홀의 입장은 관념론적 요소가 작용하고 있다. 홀은 재현이 단지 반영이 아니라 구성으로 나아간다고 했다. 재현은 세계를 구성함으로써 그 자체로 세계의 한 부분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은 ‘세계는 담론적 구성물’이라는 라클라우의 주장과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 라클라우에 따르면 욕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듯이 세계란 담론적 실천의 결과물로 구성되는 것이다. 이는 기호 밖의 세계를 상대화시키고 기호 그 자체가 세계를 구성하는 능동적인 힘이라는 점을 뚜렷이 한다. 80년대 중반 홀 자신은 라클라우의 입장이 담론중심주의라고 거리를 두었지만, 90년대의 “재현”에 대한 그의 해석은 상당부분 라클라우와 같은 것이다.

    홀은 담론 밖의 세상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예컨대 보들리야르처럼 ‘걸프전은 없다’라고 헛소리을 하지는 않았지만, 재현에 대한 그의 입장은 기호 밖의 현실, 담론 밖의 실재, 문화 밖의 경제와 정치에 대한 사고를 상대화시키는 측면이 있었다. 말하자면 문화연구는 점차 자율성을 띠기 시작했고, 담론 분석은 경제 분석 보다 더 큰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1990년대 이후 문화 분석은 점차 정치로부터도 단절되어 갔다. 문화에 대한 홀의 강조는 “문화를 이야기해야 무엇인가 섹시한 좌파가 되는 시대”를 만들어내는데 일조한 것이다. 문화연구에 대한 테리 이글턴의 비판은 좀 더 신랄하다.

    “학계라는 거칠고 거친 바닷가에서 프랑스 철학을 위한 관심이 프렌치 키스를 향한 매혹에 자리를 내주었고, 몇몇 문화연구 집단은 중동의 정치보다는 자위 행위와 다를 바 없는 자신들만의 정치에 훨씬 더 매력을 느끼고 있으며, 사회주의는 사도마조히즘에 굴복해 버렸다. 문화 연구를 공부하는 학생들 사이에는 육체가 굉장히 인기 있는 얘깃거리가 되었지만 그들이 관심을 보이는 육체는 배고픔에 굶주린 육체가 아니라 에로틱한 육체일 뿐이다. 거기에 서로 짝을 이루는 육체에 대한 관심은 있을지언정 노동하는 육체에 대한 관심은 없다.”

    8. 홀을 떠나보내며

    90년대 초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논쟁이 한국에 도입되었을 때, 논쟁의 지점은 매우 기이하게 비틀려졌다. 전통적인 좌파들은 냉소적이었고, 노동운동은 아예 이런 논의 자체를 무시했던 반면 전향을 준비하던 자들은 선뜻 포스트주의를 받아들였다.

    박형준과 이병천 등이 포스트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은 한쪽은 한나라당으로 가기 위해 다른 한쪽은 사민주의로의 퇴행하기 위한 길 닦기였다는 것이 분명했다. 전통적인 좌파들에게는 노동자계급 중심성을 부정하는 모든 입장들은 수정주의에 불과했고, 마르크스주의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완전한 사상이었다.

    반면 마르크스주의를 폐기하려던 많은 지식인들, 활동가들은 각종 포스트주의를 “자신의 후퇴를 위한 변명꺼리”로 활용했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논쟁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1980년대 홀이 직면한 상황은 1990년대 한국의 마르크스주의자의 상황과 같다고 할 수 있다. 90년대는 노동운동 중심성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 각종 포스트주의의 범람, 페미니즘의 성장, 신사회운동의 도전,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결합되어 있었다. 그 속에서 홀은 라캉식 포스트마르크스주의(라클라우가 대표적이다)에 의존하여 정체성의 정치, 문화주의로 후퇴했다.

    한국의 많은 운동권들은 급진주의를 포기하거나 아카데미즘에 안착했고 활동가들은 사민주의로 전향했다. 반면 얼마 남지 않은 골수 좌파들에게 마르크스주의는 여전히 신성불가침이었다. 나 같은 소수의 PD세대는 후기 알튀세르의 작업에 기대어 마르크스주의의 언저리에 남아있게 되었다.

    나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의 일반화’라는 과천 연구실의 작업에 지적으로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나 같은 이들은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폐기하지 않는 방향을 선택한 것이다. 홀과는 다른 길이다.

    스튜어트 홀이 후기에 이르러 마르크스주의를 폐기 했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시절도, 그로부터 벗어난 시절도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그는 당대의 문화적 변동과 지적으로 대결하면서도 노동자운동의 성장과 좌파의 성장이라는 과제에 늘 골몰해 왔다. 그는 지식을 아카데미즘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정치적 실천의 수단으로 여긴 점에서 늘 활동가의 위치에 서 있었다. 비록 그는 창조적인 이론을 생산하지 못했지만 다양한 지적 도구를 동원하여 문화 현상이라는 원석을 분석함으로써 좌파가 어떻게 현실에 다가가야 하는지 실천적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더불어 그는 이론적 입장, 정치적 입장의 전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변명을 동원하지 않았다는 점만은 기억해야 한다. 그의 죽음은 우리를 이끌던 20세기의 ‘빛나는 별들’이 점차 저물어 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 준다. 지식이 직업 안정의 수단으로 전락한 시대에 이 빛나는 별들은 점점 더 그리워 질 것이다.

    필자소개
    남종석
    부경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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