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모하지 말고 기억하라
    죽은 스튜어트 홀이 우리에게 전하는 것들
        2014년 02월 18일 02:3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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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2월 10일 82세로 타계한 신좌파 운동의 이론가 실천가이자 문화연구의 개척자였던 스튜어트 홀에 대한 기고 글이 서영표 교수와 남종석 선생에게서 들어왔다. 서영표 교수의 글은 추도와 그의 실천적 기억을 되새기는 성격이 강하고 남종석 선생의 글은 홀의 생애와 연구를 비평하는 다소 긴 글이다. 먼저 서 교수의 글을 게재하고 남 선생의 글을 게재할 예정이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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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월 10일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이 세상을 떠났다. 1932년 2월 3일 생이니 82년하고도 일주일을 살았다. 예전과 비교하면 긴 삶이지만 요즘 평균 수명으로 따지면 아쉬움이 남을 만한 나이다.

    문화연구는 곧 버밍햄대학의 현대문화연구센터(Centre for Contemporary Culture Studies)와 동일시되었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그리고 1세대 문화연구의 결과를 읽으며 노동자문화 연구와 성 차별적 남성중심 문화에 대한 비판, 문화적 상대주의와 다문화주의를 공부했던 후세대, 알튀세르에서 그람시로, 그람시에서 언어적 전환으로 비판적 문화연구의 이론적 궤적을 따르는 지적여행에 동참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스튜어트 홀이라는 존재의 사라짐은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그의 생물학적 부재가 주는 충격은 아닐 것이다.

    그가 살아 숨 쉬고 있을 때 우리는 그를 잊었다. 홀이라는 이름을 박제시켜서 교과서 속의 ‘이론’으로 받아들였지만 그의 삶 전체, 그리고 그가 동참했던 신좌파 운동이 지향했던 정치운동은 버렸다.

    그래서 홀의 부재가 불러오는 충격은 그의 생물학적 죽음이 살아 있는 그를 ‘혼수상태’에 빠뜨렸던 우리의 무관심을 ‘죄의식’으로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충격이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말했거나 또는 침묵했거나, 그가 행동했거나 또는 행동하지 않았거나 그가 살았던 역사 속에서 스튜어트 홀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졌던 차별, 억압, 착취에 대한 고발에 공감했었다. 한국을 사는 40대 이상의 상당수가 여기에 포함된다.

    하지만 그의 시대 좌파들이 제기했던 사회적 문제들이 해결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되고 있는 오늘을 사는 우리, 홀에 공감했던 우리는 차별, 억압, 착취를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차별, 억압, 착취에 동참하고 있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우스운 일이지만 그 중 몇몇은 홀을 위대한 문화이론가로 치켜세운다. 자기기만을 통해 그를 교과서 속에 ‘유폐’시켰던 것이다. 그의 죽음은 차별과 억압, 착취에 무감각해져버린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지려는 그의 마지막 행동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해석하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해석해야만 한다.

    홀

    스튜어트 홀(사진=www.iniva.org/)

    홀의 죽음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대처리즘(Thatcherism)을 떠올린다. 홀은 영국의 좌파들이 마르크스와 레닌에 대한 교조적 해석과 이론적 논쟁에 몰두하고 있을 때, 그리고 노동당 좌파는 이미 수명을 다한 낡은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 노선을 부여잡고 있을 때 그들이 아직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신우파의 이데올로기와 그에 동반되는 사회적 프로그램이 가지는 힘을 인지했다.

    국가가 주도하는 관료적 복지국가에 대한 불만과 경제 위기에 따른 국가예산 삭감과 복지 후퇴가 겹쳐지는 과도기적 상황에서 신우파는 개인의 선택과 자율을 보장하는 시장의 자유(freedom)를 성장과 혁신을 막고 있는 노동조합과 비대해진 국가부분에 대한 공격과 효과적으로 결합시켰다.

    그리고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전쟁을 통해 국가주의를 동원했으며 가족과 공동체의 책임이라는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설득력 있게 전달했다.

    권력에 근접하거나 권력을 잡은 좌파는 언제나 우물쭈물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려 하지 않았다. 대중의 폭발적 힘이 그들의 손에 권력을 쥐어주었지만 대중이 권력의 주체가 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자본을 길들이고 싶었지만 자본의 논리를 부정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처와 신우파는 달랐다. 신보수주의적 ‘개혁’을 반대하는 세력을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고 전후 복지국가적 타협의 물적, 이데올로기적 토대와 정치적 합의를 철저하게 파괴했다. 대처의 보수당은 그렇게 영국사회를 송두리째 바꾸어 버렸다.

    좌우파의 역사적 타협은 해체되었으며 혼합경제와 케인즈주의적 개입국가는 국가의 실패로 규정되었다. 공공부분은 사유화되고 정부, 특히 지방정부의 운영에는 시장의 논리가 적용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 노동조합과 지방정부의 저항은 격렬한 정치투쟁의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노동당은 선거에서 지속적으로 패배했다. 헌정질서와 합법의 틀을 벗어나려 하지 않는 노동당의 당권파들은 제도정치의 틀을 넘어서는 사회주의 정치를 추구하는 좌파의 거센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이러한 거센 도전을 빌미로 노동당 우파들은 좌파들을 마녀사냥하며 계속되는 선거 패배를 좌파의 탓으로 돌리는 캠페인을 전개한다. 그 캠페인에 붙여진 최종적인 명칭은 현대화(modernization)였다.

    현대화 전략은 1986년 당대표가 된 닐 키녹(Neil Kinnock)에서 시작되어 존 스미스(John Smith)를 거쳐 토니 블레어(Tony Blair)에서 완성된다. 선거에서의 계속되는 패배는 좌파를 솎아낼 빌미를 주었고 현대화 전략을 선거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는 주류정당으로 탈바꿈하는 전략을 추진할 수 있는 동력을 제공했다. 노동당은 좌파정당이기를 멈춘다.

    대처주의에 비판적이었고 새로운 노동당의 현대화 전략에 동참할 수 없었던 많은 좌파들은 딜레마에 빠져 버린다. 그들 중 상당수는 이미 좌파의 대안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트로츠키 운동에 동참했다가 이탈했던 이력을 가졌기에 소수만의 서클로 존재하는 극좌파 그룹으로 되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1984-85년 광부파업을 기점으로 노동조합은 정치적으로 패배했으며 지방 노동당에 둥지를 틀고 그곳을 거점으로 대처리즘에 도전했던 노동당 내 신좌파들은 대처의 런던을 비롯한 6개의 대도시 의회 해산으로 근거지를 잃어 버렸다.

    이 와중에 홀과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으로 대표되는 영국 공산당 계열의 인사들이 선택한 것이 노동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였다. 영국의 정치구조상, 그리고 사분오열된 좌파의 조건상 외곽에서 노동당에 압력을 가하고 정권을 교체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매우 익숙한 이야기 전개다. 그리고 영국이라는 먼 나라에만 이야기도 아니다. 기시감이라고 할까?

    그 다음에 전개된 이야기가 우리로 하여금 홀을 다시 주목하게 한다.

    1997년 모든 좌파의 희망과 전폭적 지지에 의해 집권한 블레어 정권의 모습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 나름대로 변명의 근거는 있었다. 세계화된 경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장에 도전에 응전해야 하며 낡은 사회주의 이념과 결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많은 ‘예전’의 좌파들은 이 논리를 수용했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리고 ‘달콤한’ 권력의 맛은 비판의 칼날을 무디게 하는 법이다. 그리고 많은 좌파 지식인들이 포스트모던한 사회에 ‘근본주의적’ 입장은 또 다른 교조와 독단을 낳는다는 타당한 비판의 근거를 ‘비판 정신’의 상실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삼아 버렸다.

    홀은 이러한 현실로부터의 ‘도피’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에게 블레어주의는 대처주의의 연장이었으며 신노동당의 노선은 신자유주의 기획의 완성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비판이 홀만의 것은 아니었다. NGO 단체로, 풀뿌리 조직으로, 녹색당의 좌파 블록으로, 십여 개에 달하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으로, 그리고 여전히 노동당의 소수파로 흩어져 있는 좌파들이 홀의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무력하다. 구심점이 없다. 그래서 홀의 생물학적 죽음을 좌파적 이념을 재생하기 위한 계기로 삼아야 한다. 행동이 없는 애도, 실천이 없는 추모는 부질없는 짓이다. 각종 일간지를 장식하는 부고란과 앞으로 있게 될 기념 학술대회는 그것만으로는 홀의 관에 못질을 하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홀은 자메이카 출신의 흑인이다. 옥스퍼드에 유학 오면서 영국 땅을 밟았지만 생의 마지막에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한 번도 영국인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영국의 좌파운동사와 문화이론에 남긴 그의 족적은 깊고 크다.

    흑인 이주자였지만 1950년대 말 20대 초반 급진화된 대학생 그룹의 리더 역할을 하며 <대학과 좌파 평론>(Universities and Left Review)을 발간한다. 그의 주변에는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 톰 네언(Tom Nairn), 로빈 블랙번(Robin Blackburn) 등의 젋은 급진파들이 있었다.

    이 저널은 1956년 헝가리 사태 이후 탈당한 공산당 지식인(그 중 우리는 특별히 에드워드 파머 톰슨(Edward Palmer Thompson)과 존 세빌(John Saville)의 이름을 기억한다.)들이 창간했던 <신이성주의자>(New Reasoner)와 통합하여 1960년 <신좌파 평론>(New Left Review)을 탄생시켰다. 그는 오랫동안 영국공산당 기관지였던 월간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Marxism Today)를 통해 문화연구와 정치를 결합하는 새로운 이론적 지평을 열었다.

    ‘현대문화연구센터’에서 수행된 공동작업의 결과로 출간된 많은 연구 성과들은 리차드 호가트(Richard Hoggart), 레이몬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 에드워드 파머 톰슨,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거쳐 축적된 문화연구의 힘을 다양한 이론적 자원에 대한 해석과 사례 연구에 풀어 놓았다.

    홀과 문화연구자(이들을 대체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다.)들에게 ‘문화’는 정치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사회이론의 문화적 전환과 언어학적 전환을 압축적으로 경험한 한국의 문화이론가들이 현학적인 영화와 테스트 분석에 침잠하면서 문화연구를 비정치적인 아카데믹으로 끌어 내렸다면 영국 신좌파 문화연구자들은 엘리트의 전유물이었던 문화를 ‘대중’에게 되돌려 주었다.

    윌리엄스는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대중적 문화의 실천을 형성된 정치적 의식의 성장을 추적했다. 톰슨은 18세기에서 19세기 초까지 민중 투쟁을 가능하게 했던 민중들의 문화적 세계를 펼쳐 보여주었다.

    홀은 그의 동료들과 이렇게 축적된 문화분석의 역량에 대륙에서 발전하고 있는 철학적 분석도구를 접맥시킴으로써 지배적 문화가 내장하고 있는 암호를 해독하고 드러내는 작업을 수행했다. 청년문화 분석, 법과 질서를 내세우는 경찰의 범죄 대응에 내재해 있는 인종차별의 기호, 신우파의 이데올로기적 실천과 대처리즘을 분석해 냈던 것이다.

    그가 신노동당과 블레어 편에 서지 못했던 것은 이러한 그의 이력 때문일 것이다. 그는 완전히 영국인이 될 수 없었기에 영국 사회를 가장 잘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는 영국사회의 지도적 지식인이 되었지만 항상 소수자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의 용어를 빌자면 그는 이방인(stranger)이였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사회적 위치로부터 얻어진 입장은 항상 비판적 태도를 유지하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를 교조적으로 해석할 때 마르크스주의자이지만 유연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 정당에 대한 당파적 충성을 이야기 할 때 그는 영국공산당과 완전히 결별한 적은 없지만 당이라는 굴레에 묶여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동참했던 언어학적 전환과 포스트구조주의적 전환에 동참했던 많은 지식인들이 직접적인 정치로부터 거리를 두며 강단 뒤로 후퇴할 때 정치적 참여를 멈출 수 없었다.

    우리는 홀의 죽음을 애도하기 보다는 그를 기억하고 기념해야 한다. 하지만 그에 대한 기억은 신문의 부고란과 그의 업적을 기리는 학술대회에 멈추어서는 안 된다. 그가 평생에 걸쳐 실천했던 것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비판정신과 실천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기념은 살아 있는 그를 ‘죽게’했던 우리의 의식에 비판의 칼을 내리치는 의식이어야 한다.

    필자소개
    제주대 교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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