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을 읽는다」
독일어 완역에 즈음하여
[기고] 프랑스와 독일의 맑스 연구 경향과 그 한계
    2014년 02월 07일 10:0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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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 한상원씨가 프랑스 맑스주의의 한 지적 근원이었던 알뛰세르의 ‘자본을 읽는다’가 처음으로 독일어로 완역된 것과 관련하여 기고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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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지도교수이기도 한 프리더 오토 볼프(Frieder Otto Wolf)의 노력으로 알튀세르의 <자본을 읽는다(Lire le Capital)> 완역판이 드디어 독일어로 번역되었다. (관련 글 링크)

독어 완역

영어 번역판, 그리고 영어 번역판의 중역인 한국어 번역판과 마찬가지로 기존의 독어 번역판은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글만 실려있고, 그 외 마슈레, 랑시에르 등등의 글들은 빠져 있다. 이것만으로도 이번 완역판의 의미는 크다고 하겠다.

독일 맑스주의 학계에서 알튀세르학파라고 할 만한 흐름은 거의 없는 게 현실이다. 독일에서는 70년대에 토이니센(Michael Theunissen)과 디터 헨리히(Dieter Henrich)같은 헤겔 해석의 권위자들을 배경으로 헤겔-맑스주의자들이 대거 등장하고(내 지도교수인 Andreas Arndt도 그중 한 사람이다), 일부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이론의 영향 하에, 그리고 알프레트 존-레텔 같은 기이한 사상가(칸트의 초월론적 주체는 상품형식이라는 ‘실재추상’의 의식적 반영이라고 보는)의 영향 하에 가치형태론 재독해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맑스 독해(Neue-Marx-Lektüre)를 발전시킨다.

헤겔의 나라에서 알튀세르가 큰 영향을 행사하긴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인 방식으로 ‘새로운 맑스 독해’의 현재 좌장격이고, 맑스의 미출간 원고들을 출간하고 있는 맑스-엥겔스 전집(MEGA)을 기반으로 맑스 해석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 미하엘 하인리히(Michael Heinrich)는 알튀세르의 여러 요소들 (문제틀과 지반변경, 인식론적 단절, 이론적 혁명, 반헤겔주의 등)을 끌어와서는, 아도르노의 제자들인 박하우스(Backhaus), 라이헬트(Reichelt)가 발전시킨 ‘화폐적 가치이론’과 결합시킨다.

재미있는 건 이 두 가지 자본 독해(프랑스의 알튀세리엥과 독일의 ‘새로운 맑스 독해’)가 그 상이한 전제와 귀결(특히 자본론 ‘상품장’을 건너뛰라고 충고하는 알튀세르와, 상품장의 가치이론 해석에만 수십년째 머물고 있는 박하우스, 라이헬트)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양자는 공통적으로 맑스의 ‘후기 저작들’, 즉 ‘정치경제학 비판’을 맑스 사상의 핵심으로 내세운다. 그리고 짧게는 스탈린주의에, 멀리는 엥겔스의 맑스 사후 자본론 편집에 기원을 두고 있는 논리-역사주의(자본론에서 전개된 논리적 개념범주들이 실제 역사의 진행과 조응한다고 보는 견해)를 주요 반박 대상으로 삼는다.

나 개인은 알튀세리앙도 아니고, 박하우스와 라이헬트의 끝도 없는 가치추상 분석에 살짝 지루함을 느끼는 상태지만, 양자 모두 충분히 매력 있는 흐름들이었다고 생각한다.

도그마적이지 않은, 맑스-레닌주의라는 하나의 화석화되고 고정된 ‘체계’에 갇히길 거부한 새로운 형태의 맑스 독해 시도였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프랑스와 독일에서 서구맑스주의의 이러한 전개가 무언가 정치적, 이론적 ‘결실’을 맺지 못하고 끝나버린 게 아닌가 하는 미련이 남는다는 점이다.

프랑스의 알튀세르학파는 알튀세르 사망 이후, 정치이론에 집중했던 발리바르(Balibr)나 경제학 이론에서 두각을 드러낸 자크 비데(Jaque Bidet)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맑스보다는 ‘스피노자’에 더 집중하며 ‘알튀세르적인’ 기획(맑스로의 복귀)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진 것처럼 보인다.

독일은 거꾸로 (해석학 전통이 강한 나라여서 그런지) 맑스, 특히 가치법칙에 대한 ‘해석’을 넘어선 새로운 ‘이론’의 전개를 낳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이 양자의 이론적 성과들을 계승해 MEGA 출간사업을 중심으로 ‘새로운 맑스 독해’의 전통을 이어가는 하인리히 역시 맑스에 대한 ‘해석’ 이상을 넘어서질 못한다. 내가 답답함을 느끼는 지점은 여기다.

(특히 독일의 경우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하노버, 브레멘 등의 대학에서 좌파 제자들을 육성하던 소위 ’68세대’ 맑시스트 교수들이 이제 학술적 재생산을 이루지 못한 뒤 은퇴하고, 대학가에서 수십 개의 <자본론> 강독 코스가 경쟁하던 시절이 끝난 뒤 이제 맑스주의는 학계로부터 고립되어 ‘자기들만의 고립된 섬’을 이루고 있는 듯한 인상마저 주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이러한 후퇴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맑스주의 지식인들의 화두로 부상하고 있다. 작년 12월 열린 ‘비판사회학회'(AKG)의 심포지엄 역시 이 주제를 다루었다.)

60년대와 70년대 프랑스의 알튀세르학파와 독일의 ‘새로운 맑스 독해’ 경향은 모두 ‘맑스에 대한 새로운 독해를 통한 맑스주의의 혁신’이라는 이론적 기획의 일환이었다.

지금 하인리히와 그가 주도하는 MEGA출간 사업 역시 자신의 의의를 여기서 찾고 있다. 나는 이러한 의도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나 역시 동일한 의도에서 이론적인 관심을 놓지 않고 있다.

그러나 맑스 텍스트에 대한 엄밀한 독해가 부재한 프랑스, 그리고 거꾸로 텍스트에 대한 해석에만 머물며 텍스트의 ‘바깥’으로 나오려 하지 않는 현재 독일 맑스 독해 진영(물론 맑스-엥겔스 전집의 발간과 이에 따른 맑스 이론 방향에 있어서 논의되고 있는 몇 가지 주요한 ‘정정’들이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은 한국에서는 이러한 독일적인 새로운 맑스 독해가 더 많이 알려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양자 모두 (서로 반대 방향의)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 양자는 정녕 ‘종합’될 수는 없는 걸까? (물론 평탄하고 완만한 결합이 아니라, 변증법적인, 불균등하고 모순적인 종합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프랑스인들은 새로운 ‘정치학’을 기획하는 능력에 있어서 아주 탁월한 반면, 독일인들은 맑스의 방대한 양의 미출간 원수고들을 읽어가며 기존의 맑스 ‘해석’이 오류였음을 지적하는 성실한 두더지들과 같다.

만약 이 양자가 결합한다면, 즉 (진부한 도식을 빌려 말하자면) 독일적인 해석의 ‘토대’ 위에 프랑스적인 정치이론의 ‘상부구조’가 결합된다면, 다시금 맑스 독해의 ‘르네상스’를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새롭고 엄밀한 독해와 해석에서 출발해 오늘날의 세계에 적합한 ‘(사회 내지 정치)이론’으로 등장할 수 있는 형태의 맑스(주의) 연구는 가능하며, 그러한 (변증법적인) ‘발전’은 오늘날 맑스주의의 전반적인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지금 하나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 다만 물음표를 던지고 있을 뿐이다. 여전히 고민은 계속된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들은 이 책의 제목처럼 ‘자본 읽기’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필자소개
베를린 훔볼트 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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